느낀 점
대표적인 복음주의 운동가 양희송의 책이다. 2년 전부터인가 복있는사람에서 출판 예정책으로 있었는데 이제 나오게 되었다. 양희송은 기획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으로는 CBS의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줄여서 '세바시' 역시 양희송이 아이디어를 주었다. 그외에도 청년때 온누리교회에서 많은 참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자세한 건 한국복음주의운동 연구소에서 하는 팟빵 <그리스도인의 책 나눔, 책 나눔의 즐거움, 복팟> http://www.podbbang.com/ch/8931?e=22791583양희송의 <세속성자>편을 참고하길 바란다. 저자가 직접나와서 재미있다.
나는 저자의 강의에서 큰 배움을 얻었다. 예전 청어람에서 톰 라이트에 대한 강의를 양희송 대표가 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큰 그림을 그 강의에서 그렸다. 그 큰 그림이 있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글을 읽을 때 덜 헤매어서 읽을 수 있었다. 강의를 정말 잘 한다. 그래서 그가 대구에서 내려와서 강의를 했을 때 참석해서 다 듣기도 했다. 강의 후 참석자들과 다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식사 때에는 이야기를 못했지만 마치고 난 뒤 걸어가면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가나안 성도라는 명칭을 함석헌 선생님께서 먼저 하셨는데 거기에서 참고하셨나?", "대형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도 가나안 성도로 볼 수 있는가?"를 내가 물었다. 기억 나는 답변으로는 자신은 함석헌 선생님이 그말을 먼저 했는지 모르고 했단다. 강의때 가나안 성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니 무교회주의자들과의 접점이 참 많았다고 했는데 그 기억이 난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답변은 자신은 그들도 가나안 성도로 본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개신교가 축소되고 결국에는 몇몇 대형교회만 살아남고 대부분은 전멸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소수의 집단이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에 그 역시도 공감한다고 해주었다. 아마도 그가 복음주의운동을 열심히 했던 것은 그 전망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대화 후 종교인구통계가 나왔는데 개신교는 성장을 해서 내심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후에 그의 문제가 터졌고 그는 지금 활동을 중단했다.
세계관
세계관을 설명할 때는 세상을 보는 눈으로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하지만 눈으로 말하면 시각으로만 한정되기에 저자도 이러한 설명이 불완전하다고 말한다("'세계관'이라는 말은 세상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굉장히 다양하다. 흔히 인간은 오감 곧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다섯 감각으로 자기 주변을 파악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 중 다른 감각을 제쳐 두고 특별히 '본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 사실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핵심 감각을 시각으로 전제함으로써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48)
나는 그렇기에 세계관 수업을 하면서 개인의 시각이 객관적이라는 근대의 시선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구조주의자들을 통해 이야기를 해주었다(저자는 착시와 원근법을 들면서 설득력있게 말한다). 거기에 대한 내용과 세계관 전반적은 내용은 이 강의를 참조하시라.(2020/03/26 - [공부흔적] - [강의] 기독교 세계관 강의[철학적 바탕, 구조주의, 세계관 충돌(하나님의 형상, 사도행전 내시, 왕족 이재형)])
설교활용
지난 번 설교에서 이 책의 내용 중이 번뜩였다. 이 부분이다.
예수가 정말 누구였는지를 절실하게 묻지 않는 시대는 결국 예수가 아무것이나 되어도 상관없는 시대가 되고 만다.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나치가 우상화될 수도 있고, 그 예수의 이름으로 노예들을 억압할 수도 있고, 그 예수의 이름으로 인종 차별이 정당화될 수도 있는 그런 예수가 등장한다. 케제만이 1953년에 이런 지적을 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의 등장과 유태인 학살을 보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중지했을 때 예수가 사라지기보다 사람들의 욕망에 영합하는 왜곡된 예수상들이 무비판적으로 범람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한 선명한 이해와 공통의 확신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 자리를 무언가 다른 것으로 채우기 마련이다. (167)
양희송은 톰 라이트의 <예수의 도전>을 언급하고 이 부분을 서술했다. 나는 라이트의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p. 59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봤다. 여튼 이 내용을 나는 설교에서 어떻게 활용했을까?
원래 내가 준비하고 있던 설교는 십자가 이야기가 주 내용인데 마무리를 십자가의 길은 어떤 길인가를 윤동주를 예시로 들면서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때는 코로나가 터지고 신천지로 인해 전국감염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그래서 마무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을때 이 책의 저 부분이 딱 생각나는 것이었다. 내 설교문을 일부 가져와 보겠다.
질문이 사라졌을 때 간혹 괴물이 등장합니다. 신약의 학문 중에 역사적 예수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묻는 게 이 분야의 주요 작업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물음을 그만뒀을 때가 있습니다. 흔히 무탐구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기 예수님이 누구신가 절실히 묻지 않았을 때 결국 예수님은 아무 것이나 되어도 상관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역사적 예수 탐구를 이끌고 있던 독일에서 나치를 예수의 이름으로 용인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절실히 묻지 않으니 예수님을 나치의 이름으로 정당화 시킬 수도 있었던 겁니다.
오늘 시대 교회를 묻지 않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이고 예배가 무엇인지 묻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볼 때 저건 뭐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모여주려고 할 때 그렇습니다. 예전에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그랬고, 작년에는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가 그랬습니다. 결국 드라마에서는 사회의 편견을 맞서 깨트리는 공동체를 보여주었습니다. 최근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라는 드라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꿀밤이라는 식당에서 편견이 사라지고 서로가 이해해주는 공동체를 드라마에서 그려 냈습니다.
이런 드라마들 속에서 저마다 소망하는 공동체의 그림자가 비취는 거같아서 참 신경이 쓰였습니다. 신경이 쓰였던 이유는 교회는 그런 모습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어떤 곳인지 물음은 없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방법만 가득한 것이 제가 바라본 교회의 모습들이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괴물이 저는 신천지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제 친구가 신천지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주 중고등부에게 신천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몇 개 영상들을 봤습니다. 그리고 중고등부에게 알려줄 때 저는 신천지를 가히 악마처럼 묘사했습니다. 그랬는데 제 친구는 그런 악마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교회 봉사에 열심히 였고 묵묵히 자신의 일들을 해나갔던 친구였습니다. 무엇이 그 친구를 신천지로 가게 했을까요. 저는 교회가 무엇인지 질문을 멈췄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을 멈춘 교회는 기업처럼 변했기에 기업은 영혼을 보듬어 줄 수 없습니다. 신천지라는 곳은 사람에게 그렇게 잘 해준다고 합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심어주기 위해 엄청난 사기극까지 보여줍니다. 그렇게 신뢰하고 좋은 사람의 말은 이만희가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 말해도 믿게 합니다.
예수에 대해 묻지 않았을 때 나치라는 괴물을 키웠듯이, 교회에 대해 묻지 않았을 때 교회는 어느 것이라도 될 수 있고 결국, 기업이 되어 신천지라는 괴물을 키우게 되었다는 게 나의 논리였다. 세계관과는 조금 엇나간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갑자기 번뜩인 내용으로 인해 내 생각의 빈 곳을 메울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메모
이 그림은 우리가 어느 관점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같은 그림에서도 읽어 낼 수 있는 메시지가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해석 이전에 관점이 인식을 지배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선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는 법'이다. (64)
- 오세훈 시장? 반지하? 베테랑.(이 내용은 예전 김두식 선생님이 진행한 창비 팟캐스트였지 싶은데 영화감독 류승완 씨가 나온 편에서 들은 내용이다. 류승완 감독은 어린 시절 정말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와 자신, 동생과 좁은 반지하에서 생활했다던가? 여튼, 그런데 서울 시장이었던 오세훈 씨가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냐고 말했단다. 그때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약간 분노에 일었던 것같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 베테랑이란 영화를 기획했다는 기억이 난다.)
문제는 인간은 동시에 서로 다른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현재 선 자리에서 보이는 것밖에는 보지 못한다. 세계관을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무엇보다 마음에 새겨애 하는 대목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으로 인해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므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선 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본질적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삶을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64-65)
- 세상을 침투. 타인의 세계에 침투. 유치부 사역할 땐 라바, 뽀로로 보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 중고등부 사역에서는 교과서 읽고, PC방에 가서 게임을 같이 하는 것. (예수님은 성육신을 하셨다. 우리는 누구도 예수님께 우리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아냐고 물을 수 없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공동체 내러티브가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미국은 소위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개념 속에 그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적 삶을 담고 있다. '당신이 어떤 인종이고, 어떤 계층에 속했든지, 성실하게 노력하면 미국은 당신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당신은 적절한 교육을 받고, 직장을 가질 수 있으며, 차별 없이 가정을 꾸리고, 안전하게 가족을 돌볼 수 있는 중산층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이상은 미국 사회의 현실과는 여전히 괴리가 있을지언정 이 이상에 근거해서 사회적 통합을 이끌어 내는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101-102)
-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부자되세요'라는 멘트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 멘트가 우리 사회(공동체)의 내러티브였다. 부자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소망하는 것이기에 어떤 방식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어진다. 비록 비윤리적인 방식이라도 말이다.)
책 맛보기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의 지도를 갖는다는 말이다. (43)
세계관은 내가 세상을 보는 틀이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내 자신과 세상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세상을 본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작업이지만, 세상을 보는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을 알아 가는 과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 가는 과정이 곧 세상을 알아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상 속에 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44)
피카소를 비롯한 현대 작가들은 미술가의 과업은 세상의 한쪽면만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려고 하지 않는 현실까지도 맞닥뜨리도록 해야 하지 않느냐는 확신에 기반을 둔다. (60)
'세계관'이 자신이 이미 봐 오던 방식을 절대화하고 자신이 아는 것에 일방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는 자기 폐쇠적 작업이 되지 않고, 새로운 발견과 각성에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내어주고, 세상의 다양성을 향유할 줄 알며, 자기 중심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가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5-66)
내러티브는 쉬운 말로 하면 이야기다. 세계관은 이야기라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이해되고 소통될 수 있다. (93)
세계관은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공통의 이야기다. 특정한 경험, 사고방식, 체계를 공유하는 이들 간에는 전적으로 동일하지 않지만 유사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 내러티브는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확립된다. 어떤 공동체든지 자신들의 고유한 내러티브가 없이 유지되기는 어렵다. (100)
한국 사회가 다시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국민소득이 얼마나 더 올라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야기를 공동체 전체가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공유하는 사회가 될 수 있냐 없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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