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2018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강영안 교수님의 책이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 지성계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강영안 교수님이실 거다. 철학을 전공하셨고 오랜 시간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한국철학학회와 칸트학회 회장까지 역임하셨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개교한 학교이다. 바빙크도 이곳에서 가르쳤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서 강 교수님의 해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칼빈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정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다. 그 설명을 보니 예정론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주권이 바탕이 되지 않은 예정론 이해는 그저 인간들이 저 사람이 구원받았나 안 받았나 분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전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이었지 싶은데 칼뱅을 소개하는데 '예정론'을 중심으로 설명을 했다. 성당에 다니는 내 친구가 여기에 분개를 한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내 세계에선 당연했던 내용이 친구의 세계에서는 경멸을 할 만큼 말이 안 된다는 것에서 나름 충격이었던 것 같다.
저자는 이렇게 해설을 잘 해주신다. 그래서 IVP에서 <강 교수의 철학이야기>를 아주 재미나게 몇 챕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를 공부할 때면 꼭 강 교수님 책을 먼저 읽어본다. 이 책도 저자를 너무나 신뢰하기에 구입했다. IVP 대표 작가인줄 알고, 또 책도 IVP에서 나올 법한 디자인(?)이라 생각했는데 복있는사람에서 나와서 참 의외였다. 과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강교수님은 이번엔 어떻게 설명을 해주실까.
믿음 · 소망 · 사랑
이 책을 요약해서 정리하는 것도 참 좋을 작업같다. 하지만 블로그 성격상 들어가는 말에서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강교수님의 해설을 보도록 하자. 사도 바울이 언급한 믿음, 소망, 사랑은 참 유명한 말이다. 아마도 믿지 않는 분들도 여기에 대해서 들어는 봤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이다. 그런데 뒤에 그중 제일이 사랑이라는 말을 보면 믿음과 소망이 사랑에 종속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바울이 쓴 말을 살펴봐야 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각각의 미덕은 동등하게 강조된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믿음의 열매가 삶으로, 행위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참된 믿음이 아니라 해야 되고, 소망이 있다고 하면서 인내의 모습이 없다면 참 소망이 없다고 해야 하며, 사랑이 있다고 하면서 사랑에 수반되는 수고가 없다면 참 사랑이 아니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성령의 임재와 도우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참되게 섬기는 공동체에서는 어디서나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15-16)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그중의 제일이 사랑이라는 말은 어떻게 이야해야 할까? 저자는 이를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바탕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믿음의 결과가 사랑이고 사랑의 결과가 소망이라고 말하겠습니다. (17)
결국 이 셋은 다 이어진다. 그렇기에 바울은 계속해서 성경에서 이 셋을 같이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세 단어 다는 아니지만 두 단어라도 같이 언급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그러므로 소망은 믿음과 사랑과 마찬가지로 다 같이 하나님께 부리를 둔다고 보아야"(20)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믿음을 언급한다.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이 책 안에 담겨있다.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 저자의 말을 옮겨보겠다.
그러면 이제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을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질문 또는 물음이 믿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반응을 보이고 응답하고 부름에 응하는 믿음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믿음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는지, 어떤 과정이 발생하는지, 믿음이 어떻게 한 순간의 결단과 연결되면서 이어지는 삶 속에서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지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작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삶과 믿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믿음이 왜 윤리와 무관할 수 없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질문하는 믿음, 응답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의 모습을 그려 본 다음 우리의 믿음이 왜 지성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지성의 바탕에 왜 우리의 감성과 의지가 근원적 동력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지, 여러분 앞에 서서 강의를 하듯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22-23)
위의 내용을 잘 숙지하면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나가면서
믿음이라고 하면 행위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과연 믿음은 행위와 반대되는 개념일까.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의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두껍지도 그렇다고 너무 얇지도 않다. 한 번 쯤 도전해보면 좋으리라.
(아참, 제임스 스미스는 이성중심, 믿음중심보다 욕망이 인간에게 더 우선한다고 보았다. 과연, 이에 대해서 강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했는데 그 내용이 여기에 나와서 반가웠다. 성경구절이 의외로 많아서 좋았고, 역시 철학자여서 철학을 이해가능하게 설명해주셔서 넘 좋았다.)
메모
우리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 영혼의 불멸, 그리고 신의 존재는 시간과 공간 안에 주어진 대상을 규정하는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는 판단할 권한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칸트가 자유와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덕법칙을 수립하고 명령하는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자유와 영혼 불멸과 신의 존재는 도덕 실천을 통해 실재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43)
- (자유주의 신학이 칸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지 얼추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질문조차도 사실은 삶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삶의 세계는 많은 전제, 많은 선지식, 많은 의견을 담고 있습니다. ...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서 전통으로 내려오는 지식 체계를 따르고, 이 체계에 따라 사물을 지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망치질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참된 것,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45-46)
- 아하!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특별히 나에게, 우리에게 누구인가? (51)
- 두 번째 질문과 첫 번째 질문은 바꾸면 좋지 않을까?
책 맛보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은 단순한 믿음의 내용을 수용하거나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의 변화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변화를 확연하게 보게 됩니다. (34)
이로부터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몸담고 있는 삶의 세계 안에서 질문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49)
바울의 언어로 표현하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63)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며,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는 이 근본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 믿음은 질문하고 탐구하고 추구하는 삶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응답, 우리의 반응을 요구하는 믿음입니다. (70)
예수를 구주와 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이 구주와 주이심을 깨달아 알고, 그분이 나의 주이심을 동의하는 마음으로 입으로 고백하고, 그분께 나의 삶과 죽음,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하고 신뢰하고 의탁하고 맡겨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분을 따라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87)
무엇을 믿는가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삼위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신뢰를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교리나 세계관, 기독교 신학과 철학을 아는 것도 좋지만, 이 모든 것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야말로 신앙에서 으뜸되는 일이요, 우리가 무엇보다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언약 관계 안에 들어감에 있기 때문입니다. (88-89)
내가 무엇을 믿는가, 왜 믿는가, 어떻게 믿는가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사랑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무엇을 열망하는가?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가?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다른 것을 사랑하는가? 사랑의 문제는 다시 예배의 문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예배하는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 세상 속에서, 정치적 선택에서, 경제 행위에서, 교육과 관련된 행동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나는 정말 누구를 예배하는가? 누구를 섬기는가? 누구에게 소망을 두는가? 누가 나의 주인인가? 누가 나에게 어젠다를 설정하며, 나의 돈과 힘과 시간을 쓰게 하며, 나의 심장, 나의 가슴을 움직이는가? 나의 심장은 어디로 향하는가? 세속 속의 성공에 대한 욕망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고 추구하는 믿음인가? (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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