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이야기를 한 철학자들이 몇 몇 기억난다. 하이데거, 가다머, 비트겐슈타인 등이 있다.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선이해’라는 표현을 썼고, 가다머는 ‘지평’, 비트겐슈타인은 ‘그림’이라는 표현을 썼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그림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다. 뭐 이렇게 어렵고 거창하게 철학자들의 이름만 말하지 않겠다. (세계에서 보는 지도)(ppt) 세계지도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지도를 본다. 자, 왜 우리를 극동에 있다고 표현하는지 대번에 알 것이다. 여기 대한민국은 지도에서 극동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 세계지도는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동쪽에서 약간 떨어진 지역을 근동이라고하고 중간쯤 떨어진 지역을 중동, 극단적으로 떨어져 있는 지역을 극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세계지도는 어떤가?(ppt) 우리는 이런 세계지도를 보고 자랐다.
여기 또 다른 지도가 있다.(ppt) 이건 아프리카의 실제 크기이다. 아프리카 안에 미국, 인도, 중국이 들어간다. 왜 우리가 실제로 보는 지도의 크기와 다를까? 이게 중간선 그러니깐 적도와 가깝게 있는 곳들을 축소되고 위의 극점들과 가까우면 실제보다 더 커져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보는 세상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저마다 보는 세계가 있다. 세계관은 곧 자기 지도를 갖는다는 말이다. 곧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도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곧 어떠한 틀을 가지고 세상을 보며 계속적으로 나와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한 그림을 소개하겠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란 그림이다. 이 그림은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하는 그림이다. 일단 정면에서 그림을 본다면 나오는 두 사람이 있다. 좀 잘 사는 사람 같다. 부자같다. 옆에 지구본도 있고 소품들 보니 뭔가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 같다. 그런데 밑에 해골이 찌그려져 있다. 해골은 서양에서는 인생의 덧없음이나 삶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두 사람 앞에서는 해골이 보잘 것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선 자리를 달리해서 이 그림을 본다면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자리를 옮겨서 해골이 온전하게 보이게끔(ppt) 위치를 달리해보면 반대로 다 가진 것 같은 두 사람이 이번에는 찌그러져 있다. 실제로 보면 그렇단다. 언제 유럽가서 보길 바란다.
그렇다.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지만 사람의 서있는 곳이 다르면 시선이 달라지고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어느 관점에 있느냐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듯이 의미는 다르게 다가온다. 이 그림을 통해 누구는 부유해 보이는 두 사람을 동경할 것이고 누구는 그것이 덧없음을 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진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까? 다른 말로는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를 어떻게 파악할까? 그것을 파악해야지만 세계관이란 것이 좀 더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이 세계관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1. 서양에서 세계관을 공부하신 분들은 크게 8가지 세계관으로 분류를 한다. 1) 기독교 유신론 2) 이신론 3) 자연주의 5) 허무주의 6) 실존주의 7) 범신론적 일신론 8) 뉴 에이지 9) 포스트모더니즘. 그렇다면 이 세계관들을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일곱가지 질문을 던져서 이 질문에 답을 달 때 알 수 있다고 한다.
(1)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곧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명제적으로 곧, A는 B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세 번째 질문 ‘인간은 무엇인가’로 말해보겠다. 기독교 유신론에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인격, 자기 초월성,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 등을 지닌 존재로 본다. 이신론에서는 인간은 비록 인격체이지만 우주라는 기계의 한 부품으로 본다. 자연주의에서 인간은 복잡한 ‘기계’이다. 인격이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그저 화학적, 물리적 성질의 상호 관계다. 허무주의(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인간을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본다.
이러한 ‘A는 B다’로 접근하는 명제주의는 너무 철학적인 냄새가 난다. 비교해서 서로의 세계관을 파악하기에는 좋은데 신앙인의 삶으로까지 파고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이성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근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다음 나온 것이 내러티브적 접근이다. 즉, 이야기로 접근하는 것이다.
2. 내러티브적 접근은 세계관을 이야기로 본다. 핵심 내러티브가 있다. 그 핵심 내러티브는 네 가지 질문을 통해서 밝혀진다.
(1)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 우리는 누구인가?
(3)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4)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몀제적인 방식이 아니라 설명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설명이 바로 각자의 세계를 잘 보여줄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을 내러티브로 설명하는 방식은 바로 창조-타락-구속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좀더 세분화 시켜서 본다면 창조-타락-구속의 시작(이스라엘의 이야기)-신구약중간기-왕의 오심(구속의 성취)-교회와 선교-구속의 완성(왕의 귀환). 이것을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보는 세계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시기에 너무나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였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나? 바로 우리는 반역을 하였다. 하나님처럼 되려 했다. 하나님의 가족이었는데 반역을 하여 죄로 인해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계획하셨다. 그리고 그 통로로 쓰임 받은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새 창조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 민족이자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탄생한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다. 그리고 죽어서 끝난 게 아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새 창조하시는 그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그 시작은 교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곧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구원자로 믿는 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복음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이 온 세상의 왕이시며 그토록 기다리던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교회와 선교는 다른 왕을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진정한 왕이 누구이신지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 왕이 다시 오시는 그날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된다.
이야기는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살아온 발자취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 발자취들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 그러니깐 이야기는 살아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이야기를 살아왔는가? 어떤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 이야기를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필시 부딪힘이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세계관을 흐르던 철학적 바탕들을 살펴보자.
세계관을 형성하는 철학적 바탕
서구의 중세엔 성경에 ‘왜?’라는 질문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중세는 신에 대한 지식으로 세계를 구성하였던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이 여기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그 사람은 바로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이 어떤게 떠오르는가?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중세에는 자신들의 존재를 신의 지식이나 신에 의해 존재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를 의심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의심하던 끝에 그는 의심(생각)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나”는 의심할 것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깐 당연히 이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지식을 쌓아간다. 왜냐하면 내가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스스로 존재하는 신(I am that[who] I am)을 통해 지식의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자(I think therefore I am) 곧 내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시작이 되었다. 인간이 주체이며 인간의 이성이 이제 주체가 되었다. 성경 역시도 인간의 이성 아래에 두기 시작했다.) 이를 계몽주의라고 하며 근대의 시작은 이렇게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 근대가 한창 타오를 때쯤 여기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19세기 초 대표적인 3인방.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이다.
1. 마르크스
먼저, 마르크스를 보자. 칼 맑스! 나중에 한 번쯤은 꼭 들어볼 이름이다. 맑스는 보편성에 대한 것에 질문을 던진 사람이다. 그러니깐 ‘나에게도 확실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확실할까?’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인간의 사고와 판단은 어떠한 특수한 조건에 의해 성립되지 않을까 의문을 품었다. 그 특수한 조건을 마르크스는 바로 계급으로 보았다. 어느 계급에 속하느냐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를 계급의식이라 한다. 이것에 따르면 보편적인 인간상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이라는 추상적 원형이 있고 거기에 따라 인간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속한 계급에 따라 인간이 하는 일에 따라서 또 그 일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그러니 각자의 인간상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상은 없다. 데카르트로 시작된 근대는 생각하는(객관적인) 인간 존재에서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있다고 했지만 마르크스는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그러니깐 인간이 무엇을 하는 가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정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 사상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세계에 큰 영향을 준다.
2. 프로이트.
프로이트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무의식이다. 근대의 인간은 의심하여서 나타난 확실한 것이 바로 생각하는 나, 의식하고 있는 ‘나’가 주체적이며 객관적 지식을 쌓아올리는 근원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완전히 뒤집는 말을 한다. 그렇게 자각하고 생각하는 의식(나)가 아니라 무의식이란 것이 ‘나’를 지배한다고 말이다. 이 무의식이란 것이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프로이트는 의사였기에 환자들을 만남으로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건망증이 있거나 강박증, 히스테리 등 모든 심적 증상은 의식(생각)하고 싶지 않은, 또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무의식적인 과정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 지금 내 의식들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가끔 보고해주는 것일 뿐이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계급에 따라 생각하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통해 나오는 것이 생각이라고 했다.
3. 니체
니체는 인간은 인간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이 생각함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부순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자이다. 고전에 쓰여진 책들을 읽고 거기에 대해서 해설을 하는 사람이었다. 니체는 그리스 고전 문헌들을 보니까 보편적인 것은 없었다. 니체가 걸고넘어진 것은 선악의 개념이다. 선악의 개념은 없다. 선악은 인간이 발명해낸 것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보호해줄 수 없는 야생상태(법, 정부, 복지가 없는)에서 인간은 경쟁하며 살아남아야 했다. 한정된 자원(음식 포함) 안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보호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공리주의자들은 자연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권리를 주장하면 서로 죽이고 죽이는 상태가 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사회, 국가, 법률, 재판 등이 없을 때는 우리의 생존의 권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이때 선악의 개념이 생겼다고 본다. 타인의 것을 힘을 써서 빼앗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된 것이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성립된 것이다. 이처럼 니체는 선악개념이 신에 의해서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으로 본 것이다. 보편적으로 모두가 동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와 각 문화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니체는 말했다. 그렇기에 니체는 당시 유럽 사람들이 극렬히 비판했다. 지금 유럽 사람들의 사고와 사상은 어떤 절대 유일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시대에 특정 지역의 세계관일 뿐이라고 말했다.
4. 소쉬르
자, 이제 포스트모던이라는 구조주의가 등장하기까지 땅고르기가 있었다. 이 땅고르기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가 했다. 이제 구조주의를 시작한 사람을 말하겠다. 그는 언어학자인 소쉬르이다. 소쉬르는 사물이 단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 이름에는 자기가 속한 세계가 반영된다고 했다. 단적인 예로 영어에서 ‘devilfish’[악마의 물고기]라는 단어가 있다. 여기에는 ‘가오리’와 ‘문어’가 속한다. ‘devilfish’는 혐오스러운 동물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사람에게 ‘악마의 물고기’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전혀 다른 생물이 떠오를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그 세계의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인간은 언어를 습득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 세계 속에서 언어를 습득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세계의 가치와 사고가 인간에게 습득되는 것이다. 언어 자체에 그러한 것이 습득되어 있기에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 자체는 말이 되지 않는다. 고로 어떠한 세계에 내가 영향을 받는 것이다.
5. 레비스트로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을 보자. 여기에는 총 네 명의 대장들이 나온다. 아쉽지만 다 살펴보긴 힘들거 같고 대표적으로 한 명만 살펴보자. 레비스트로스를 잠깐 살펴볼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문화학자이다. 처음에는 미개인이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고 질서를 세우는지 살펴보려고 했다. 미개인과 문명인의 차이를 보고 우열을 따지려고 했다. 하지만 미개하다고 알려진 부족을 경험하고 나니 다르게 여겨졌다. 레비스트로스가 한 부족의 사람에게 갈 가에 있는 풀의 이름을 물었다. 그랬더니 부족민이 비웃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잡초에 이름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름이 없는 것은 그 문명에 식물학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집단에서 그 풀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언어의 사용이 고등한 문명과 저등한 문명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집단이 관심이 있냐 없냐의 차이에서 온다. 레비스트로스는 여러 원시부족이라는 곳들을 살펴보면서 하나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계가 없다는 것에 확신했다. 그에게는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사회구조에 따라서 사고가 다르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긴 이야기를 잘 들어다. 우리가 이러한 사상가들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수용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한 가지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보는 시각이 진리이며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에 영향을 받으며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한 예로 여기 원숭이가 있다. 당신은 원숭이를 어디에 연결시킬 것인가? 팬더인가? 바나나인가? 대부분 동양인들은 바나나를 선택했지만 서양사람들은 팬더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동양인들은 관계적인 접근에 익숙하고 서양인들은 범주의 접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으니까 더 가까운 관계를 선택한 것이고 서양인들은 원숭이, 팬더는 동물이라는 범주의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선택한 것이다. 간략한 예이지만 우리의 세계가 보는 세계가 내가 완전히 통제하고 내 의지대로 보는 세계는 아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구조가 있을까?
학교에서도 이러한 구조가 있다. 그 구조에는 폭력이 있다는 게 드러날 때도 있다. 한 예로 장애를 가진 A선생님이 한 분 계시는데 어떤 학생이 자신의 장애의 부분을 나쁘게 말하며 놀리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 아이가 악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사회의 잔인한 폭력 구조에 악을 습득한 희생자일 수 있다는 것이 A선생님의 분석이었다.
또, 아이들 중에 선생님을 때리는 경우까지 있다. 왜 그랬는가? 선생님을 때리는 것은 극단적이긴 하지만 반항하거나 욕설을 내뱉는 행동을 바로 쎈척이라고 한다. 왜 폭력을 일으키는 아이는 쎈척을 할까? 그건 자신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게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폭력을 행사한다. 심지어 어른인 선생님께 폭언과 폭력까지 행사하는 것은 선생님도 괴롭힐 수 있다는 사람인 것을 어필하는 것이다. 곧 교실이라는 이야기 배경 속에서 각자 아이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보여 지는 모양새다. 그 모양새가 폭력의 구조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폭력을 일으키는 아이는 그 교실 안에서, 자신의 학우들에게 ‘나는 선생님도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네는 내 말 잘 들어’ 또는 ‘부럽지? 너네가 못 하는 거 내가 다 해줄게. 난 영웅이니까’ 이야기(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실 안의 팽배한 내러티브가 폭력적인 구조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세계관의 충돌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본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이 세상은 하나의 어떠한 영향으로 형성된 세상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로 형성된 그리스도인은 필시 이 세상의 이야기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충돌은 성경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그렇다. 성경이 아닌 그와 같은 시기의 자료들에서도 신의 형상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고대 중동 지방에서 알려진 창조의 이야기들에서다. 중동 지방의 창조를 보면 세상의 창조가 신들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신들이 있었기에 이런 싸움이 가능했다. 그들의 신들은 해, 달, 별과 같은 많은 존재들이였다. 이러한 점들은 철저히 우리의 창조 신앙과 차이가 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구약은 오직 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세상이 신들로 섬겼던 해와 달과 별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사람들이 피조 세계에 대해 지니는 공포와 두려움은 하나님의 창조 앞에서 사라진다. 사람을 위협하는 그 어떤 제도나 폭군 그리고 억압과 박해가 있을지라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초라해질 뿐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당시 문화에서도 써졌던 말이다. 성경학자들은 이 형상이라는 단어를 그러니깐 히브리어 원어로 성경 안에서 많이 나오질 않으니깐 성경 외부 문헌들을 찾아서 그 쓰임새를 살펴 보았다. 그런데 성경학자들이 문헌들을 살펴보다가 하나의 사실을 발견했다. 이 형상이라는 표현은 당시 왕들이나 고위직에게만 쓰여 졌던 말이었다. 이집트로 따지자면 바로와 같은 그런 왕들에게만 써졌던 말이었다. 이 말들이 밑바닥에서 노동을 하던 사람들에게나 벽돌공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말이다. 이렇게 차별된 인간은 신들의 종일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피조물을 숭배하고 피조물에 굴복하는 세상이고 사람의 존귀함은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세상은 이를 정확하게 뒤집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왕과 특정 고위층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왕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들렸다. 요셉이 죽고 시간이 많이 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한다. 이 등장과 함께 상황은 변하게 되는데 이들의 상황은 출애굽기 1장에 나온다. 출애굽기 1장 11절에서 14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자.
11절: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서,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 나갔다.
12절: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몹시 싫어하였고,
13절: 그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절: 이집트 사람들이,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므로, 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다.
이후에 더 모진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심지어 원료를 주지 않고 일을 시키기도 했다. 이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 형상이라는 말씀은 붙잡을 수밖에 없던 말씀이었고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 당시 세상에서는 바로를 위시한 특정 왕들과 고위직들만이 특별한 형상들이고 이스라엘 사람들같이 거의 노예처럼 일을 하던 사람들은 전혀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과 전혀 다른 계층과 계급이라고 생각했기에 방금 출애굽기 1장에서 본 것 같이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했다. 세상은 이런 소리를 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른 소리를 들려주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사람이 타락했지만 그 형상에 대한 회복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망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고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약속을 해준 민족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세상에서 구출 받았다. 출애굽한 것이다.
2. 에디오피아 내시(행 8:26-40)
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한 이후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막 태동하고 번성할 때였다. 이때 에디오피아 한 내시가 있었다. 이 사람은 아프리카 중상부에 위치하기에 흑인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나라에서 굉장한 고위급이였나 보다. 한 나라의 국고를 맡은 관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재무장관쯤 되지 않나 싶다. 당시에 왕실 관리인들은 내시들이었다.
그런데 27절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 이 사람은 유대인도 아닌데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일 확률은 극히 드물다. 사실상 불가능이라고 봐도 된다. 이방인인데다가 그는 내시였다. 아시다 시피 내시는 거세를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할례(쉽게는 포경수술)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신명기 23장 1절에 거세를 한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명시해놨다. 요즘 말로 아싸 중에 아싸입니다. 유대교 체제 안에서는 저기 끝에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그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갔다. 아마도 이 에디오피아 사람은 자기가 인정받지 못 하지만 유대교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나 보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왜냐하면 두루마기를 개인 소유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값비싼 두루마기인데 여간 마음이 아니라면 개인이 구입하고 지니긴 굉장히 어려웠다.
어쨌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 내시는 복음을 전하는 빌립을 만나게 된다.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소리 내어 읽고 있을 때였습니다. 성령님께서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가라 하셨다. 가까이 가니 내시가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게 들린다. 빌립은 묻는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무슨 뜻인줄 아느냐고. 내시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 알 수 없다고 말하며 빌립에게 수레에 올라와서 앉으라 합니다. 내시는 아마도 빌립이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나 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전한다. 예수님이 바로 그 고난 받는 종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이제 이루어졌다는 말이었다. 내시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받아드린다. 곧장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에게도 닿았다. 이방인이자 내시인 그 역시도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내시가 세례를 받기로 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의미다. 이제 하나님의 이야기가 자신이 살아갈 이야기 속에 나타날 것다.
이방 나라 에디오피아 사람이자 내시였던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 경계가 허물어졌다.
3. 조선시대 나타난 세계관의 충돌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충돌이 나타난 사례가 있다. 이재형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왕족이다. 조그만 더 빨리 태어났으면 고종 말고 이 사람이 왕이 되었을 것이다. 왕위계승권 순위는 더 높았지만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 이 사람이 태어나지 못해 왕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 사람이 세속의 권력을 다 내려놓고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이 때 한 마부를 만나게 된다. 마부는 이런 사람이다.(ppt) 그 마부는 엄귀현이라는 마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 여행길 동안 마부와 함께 다니게 되었다 한창 전도의 열기가 뜨거울 때라 마부는 이 왕족에게도 복음을 전한다. “나으리 황송하오나 오늘부터 예수를 믿으소서!”하고 전도했단다. 하지만 왕족 이재형은 ‘건방진 소리하지말고 말이나 잘 몰거라’고 핀잔을 주었다. 예수믿으면 마부꾼 신세도 면하냐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여행을 같이 다니다 이 마부의 태도가 사뭇 진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왕족 이재형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 1907년이 되었다. 불길까지 대한민국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마침 한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아내의 권유로 이재형 영감은 부흥회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부흥회의 열기가 뜨거워진 가운데 이재형 영감은 부흥회 현장 가운데 엄귀현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를 만나자 이재형은 놀라운 말을 한다. “내가 교회 밖에서는 왕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한 형제일 뿐입니다. 형님!” 이재형은 사회적으로 세상적으로 신분이 비교도 되지 않게 낮은 마부에게 형님이라고 말하고 평생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이 모습이 바로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로 사는 이들의 모습이다. 세상의 모습이었다면 이 왕손은 마부를 하찮게 취급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 벽들이 다 허물어진다. 왕족도 마부에게 형님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세계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 부딪힘이 있는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 것 같나? 나는 세계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생각해보고 어떤 게 보고 행동하는 것이 기독교인다운 생각이며 행동인 것 같은가?
이러한 물음에 고민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이며 하나님 나라 시민이다.
각주가 옮겨지지 않아서 이렇게 캡처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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