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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강성호 -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세상을 밝힌 한국 기독교 저항사)

by 카리안zz 2020.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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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강성호 작가는 <한국 기독교 흑역사>라는 책을 지었다. <한국 기독교 흑역사> 책에서 한국교회가 식민지 시기부터 독재시기까지 흑역사를 담고 있다면 이 책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에서는 식민지에서부터 독재시대까지 한국교회의 빛된 모습을 담고 있다. 3.1 운동은 앞서(2020/02/27 - [공부흔적] - 정의로운 사람을 만드는 교회(저항하는 그리스도인, 3·1운동과 기독교, 3.1절, 31절)에서 요약을 한 바가 있다. 

 인상 깊었던 점을 차례로 이야기해 해보겠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신사참배

 한국의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을 포함하여) 모두 신사참배를 했다. 일제시대 가장 비참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야 고신교단 출신이기에 여기에선 늘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에 대해 신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란 시선이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신사참배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학교에서는 그렇다. 선교사들은 처음에 반대입장이었지만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입장도 있었다. 왜 이들 사이에서는 찬반이 있었을까? 

 일단 일본 조선총독부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논리(66)를 내세워 참배 행위를 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나간다. 

 

사실 조선총독부와 미션스쿨의 갈등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915년 3월 총독부는 미션스쿨이 성서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한 적이 있습니다. 교육과 종교의 분리를 강제한 정책이었습니다. 거기다 천황의 사진을 걸어 경례를 해야 하고, 일요일에 학교 행사를 치러야 했습니다. 미션스쿨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하여 학교를 유지하되 일본어 교육을 대폭 강화할 것인가, 아미녀 10년 유예기간 동안 자유롭게 가르치되 불이익을 받을 것인가. (67)

 

 불이익이란 고등보통학교를 포기하는 것인데 이를 포기하면 졸업자들이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이러한 조선총독부와 미션스쿨의 갈등은 1935년에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평양에 부임한 야스다케 타다오 도지사가 회의 시작 전에 평양신사 참배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제안에 숭실학교 교장의 매큔, 숭의여학교의 교장 벨마 스누크, 의명학교의 교장 이희만은 반대하였다. 그런데 이 제안을 반대한다는 말은 학교를 문닫겠다는 의미였다. 신사참배 반대는 학교 유지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미국 남장로회와 호주 장로회가 적극 반대를 하며 학교의 문이 닫혔습니다. 

 하지만 미국 북장로회는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언더우드를 위시하여 북장로회 교육선교사들이 신삼참배를 수용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하게 되면 교육사업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부담(69)때문일 것입니다. 북장로회 교육선교사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래 옮긴 글을 보시지요. 

 

선교사들의 교육사업 철수는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미국으로 떠나면 그만이지만, 미션스쿨의 교사와 학생들은 하루아침에 직장과 학교를 잃어버리는 셈이니까요. 학교운영을 자신들에게 맡기라는 조선인들도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밖에 교육 철수 기간에 신사참배를 강요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신입생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재학생의 졸업을 위해 교사진을 둘 경우 재정은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 등 문제가 산적했습니다. (69)

 

 당연히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학교에 교사와 학생들을 생각한다면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장에 그들의 먹고 사는 것과 정부 인가가 나지 않는 학교에 졸업한다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교사들 입장에서는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는 논리라고 그냥 받아드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그렇게 불합리하지만 받아드리면 선교라도 지속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반론으로 그렇게 전하는 복음이 온전한 것이냐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두 의견 다 일리가 있고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미션스쿨에서 일어난 신사참배에 대한 갈등은 쉬운 일이 아니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자신들의 미래와 먹고 사는 것을 버리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한 것은 역사에 기록되어야 하고 박사를 받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신사참배를 수용한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요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힘을 쓰는 것보다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여 더 기억하려고 하고 더 박수를 쳐주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5.18민주화운동: 기억해야 할 이름 문용동 전도사

 광주 도청을 지키다 죽은 전도사님이 계셨다. 이름은 문용동(1952-1980) 전도사님이다. 그는 불우한 청소년들을 보살피며 문학의 꿈을 심어주었던(220)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5.18항쟁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집으로 가는 길에 목격한 충격적인 모습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 상무대교회를 다녀오는 길에 할아버지 한 분이 금남로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혀 구타당하는 걸 그가 본 겁니다.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병원에 데려가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게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후 그는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의 교회 후배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5.18항쟁 당시 문용동 전도사에게서 최루탄 가스 냄새가 나기에 물었더니 시내에서 데모를 하다 왔다고 했답니다. 그 후배는 무슨 전도사가 데모를 하느냐, 말도 되지 않는다고 따졌고요. 이에 문용동 전도사는 세상이 어렵고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럴 때 목사들이 앞장서서 나가야 한다, 모세를 보라,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을 인도해 나갔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221)

 

 수많은 분들이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고 모두 기억을 해야 겠지만 특히 문용동 전도사님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전남도청에는 엄청난 양의 총기와 폭탄이 보관되어 있었다. 계속 이어서 저자의 글을 읽어보자. 

 

 당시 전남도청 지하실에는 2,500여 정의 총기와 8톤가량의 폭탄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군 무기고를 연상할 정도의 엄청난 물량이었죠. 만약 사소한 부주의라도 있어 무기고가 일시에 폭발한다면 광주는 잿더미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도청으로부터 반경 3-4킬로미터 이내의 시가지를 파괴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무등산, 광주교육대, 전남대, 광주역 등이 사정거리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나 조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청년 몇 명이 폭약관리반을 자처했습니다. 처음에는 9명이었지만 최종적으로 5-6명이 남았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문용동 전도사였습니다. 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문용동 전도사가 폭약관리반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기에 묘사된 광주의 상황은 처참했습니다. 도청 앞 분수대에 놓인 32구의 시신, 병원 영안실의 시체들, 병원마다 꽉 찬 총상 환자들, 눈에 뒤집어진 시민군, 폐허 같은 금남로, 불에 타버린 문화방송국, 앙상한 뼈대만 남은 차량들. 그는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폭탄의 뇌관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폭탄물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무차별 사격을 가한 예엄군에게 역사의 심판이 내려지길 바라던 그였지만, 목숨을 걸고 계엄군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이유입니다. 이 일로 그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뇌관 분리작업을 마칠 수 있었으나, 5.18항쟁 이후 계엄군의 프락치였다는 오해를 샀습니다. 
 그는 무기고에서 폭탄을 해체하고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만약 그가 계엄군의 프락치였다면, 폭탄의 뇌관을 분리한 시점에서 도망치지 않았을까요. ...
 ...
 그와 함께 뇌관 해체작업을 수행했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가 있습니다. 바로 폭약관리반 멤버 김영복이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문용동 전도사의 최후는 서글픕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거의 탈환한 계엄군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문용동 전도사는 자신이 앞장설 테니 함께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인들의 함성소리만 났을 뿐 총성은 완전히 멎은 상태라 다소 안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장선 문용동 전도사가 문을 미고 나서는 순간 갑자기 총성이 나며 문용동 전도사가 자기 앞에서 쓰러졌다고 합니다. 투항하라는 방송에 문을 열고 나갔지만, 돌아온 건 가슴에 박힌 총탄이었던 겁니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습니다. (221-223)

 

 그의 행동으로 어쩌면 민주화운동의 가치가 지켜지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도 저기 극우에서는 광주가 북한에서 일으켰다고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총선에서 폭망한 정당에서 그런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그 정당은 폭망해야 한다. 아니면 물갈이를 하고 완전히 새로운 정당으로 거듭나던가. 지금도 이러할 진데 만약 저때 무기고와 폭약을 시민국이 사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극우는 더욱 더 힘을 실어서 선동할 것이다. 그것을 떠나서도 많은 생명을 지켜내었다. 만에 하나 폭탄이 터져버렸을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목숨건 행동이 지금의 민주화운동을 지켰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나가면서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일들을 그리스도인들이 한다. 대표적으로 독재정권의 부정선과와 위안부 문제를 알린 것도 그리스도인들이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일들은 진보 개신교로 보이는 분들이 많다. 그들은 대한민국 개신교의 주류는 결코 아니다. 그러한 점이 참 아쉽다. 개신교 주류는 아마도 저자의 전작인 <한국 기독교 흑역사>에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주류가 아니기에 정말 그들은 개신교에서 밀알과 같은 역할을 했고 더 넘어서 대한민국의 밀알이 되셨다. 이 책, 보수 개신교인들이라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읽고 우리 자극을 받읍시다! 영화 <1987>에서 진보 개신교가 <향림교회>로, 보수 개신교는 조반장(박휘순)으로 나왔다. 전자는 역사의 주역으로, 후자는 역사의 불의로 기억되었다. 왜냐하면 조반장은 고문하는 그 자리에서 읽고 있던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은 신앙서적이었다(그외에도 감옥에서 성령충만해져서 찬양을 열광적으로 부른 장면도 있다).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 서로가 그렇게 기억된 것이다. 

 우리는 나는 어떻게 기억될 것이고, 우리는 어떻게 기억될까?

 

 이 책에서 아쉬운 점도 물론 있었다. <예언자적 거리두기>가 모호했다. 좀 더 설명을 해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한 점을 포함하더라도 이 책은 완성도도 높고 책도 잘 써졌기에 강력히 추천한다. 

 


메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4월 말에는 국기에 대한 배례가 주목례로 바뀌었습니다. 국기를 주목한 채 차려 자세에서 오른손을 왼편 가슴 심장 위로 얹는 방식으로 변화된 겁니다. 지금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형태입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 한국 교회의 요구에 전적으로 수용한 까닭입니다. 국기배례 문제의 초점을 저항에 맞추다 보니 이 책에서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승만 정권은 한국 교회에 여러 가지 특혜를 준 친기독교 정권이었습니다. 이후 한국 교회가 이승만 정권을 전적으로 지지할 때 내세운 근거 중 하나가 국기배례를 주목례로 바꾼 사례입니다. 국기배례를 거부한 이들은 국기의 우상화를 경계하며 저항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의 저항은 정교유착의 소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107-108)

-참 역설적이다. 

 

 

 

여성신학자들은 이 본문에서 한 여성의 슬픔이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는 정절에 대한 요구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들이 돌아와 설 자리가 업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은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음지에서 죽어 가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이 애곡되기는커녕 동족에게서조차 외면당하고 멸시당했음을 여성신학자들은 콕 집었습니다. (202)

- 신학이 의미가 없다고? 이것이 신학함이다. 

 

 

 

교회여성연합회의 인권운동은 한마디로 환대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여성연합회는 '장소'를 갖지 못해 배회하는 이들에게 머물러도 좋은 자리를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드렝게 기독교 공동체란 배제된 존재를 인정하는 환대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폭력과 가부장적 질서의 피해자들이 유령에서 사람으로의 성원권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건 무조건적인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204)

- 환대의 사례

 

 

 

 개인적으로 201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또한 정권교체에 대한 이들의 간절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후보 단일화에 대한 복음주의 기독인 선언>을 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 어느 한쪽의 집권을 손들어 주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복음주의 진영이 보수 양당의 구조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 이 선언문은 복음주의진영이 권력과 관계 맺는 방식을 주도적으로 설정하지 못하고 종속적으로 가버린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한쪽의 손을 들어 주는 상황이 되더라도 휘둘리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1987년 대선과 2012년 대선의 사례는 '정치 질서 만들기'라는 구조 속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스스로를 제한하고 말았습니다. 특정 진영의 논리에 갇혀 버리는 순간 한국 기독교는 직능 단체로 전락할 뿐입니다. (303-304)

- ?. 2012년의 그 말들이 특정 진영의 논리에 갇힌 것인가? 당시로서는 그것이 특정진영의 논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주장이 아니었던가? 차선이었다. 

 


책 맛보기

 

1971년 대선은 4월 27일에 치러졌습니다. 그해 부활절은 4월 11일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학생회총연맹(KSCF), 한국기독교청년회(YMCA) 등 진보 기독교 진영의 기독청년들은 부활절 전날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선두에 세우고 행진을 시도했습니다. 불의를 방관하고 있는 교회의 죄를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고, 교회와 사회를 향해 양심의 부활을 촉구하겠다는 결단의 표시였습니다. 예수가 골고다를 향해 십자가를 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듯이 말입니다. (126-127)


그 사이에 정신대문제연구위원회는 교회여성연합회로부터 독립하고 '정신대연구회'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신대연구회를 중심으로 1990년 11월 16일 '정신대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발족되었습니다. 이로 보아 정대협의 기원이 교회여성연합회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이후 교회여성연합회는 정대협의 회원 단체로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5)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일본 정부의 발뺌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91년 4월 일본 정부는 '위안부' 동원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이야기를 구두로 통보했거든요. 이에 교회여성연합회는 원폭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수소문을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알고 있으면 데려와 달라는 부탁이었죠. 그렇게 해서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금까지 살려 준 거는 이거를 가지고 싸우라고 한 거다. 그러니까 나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으니까 나한테 기회를 주면 한다"라는 김학순 할머니. 지금까지 자신을 존재하게 만든 힘이 '증언'이라고 믿었던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로 일본군 '위안부'에 얽힌 비극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6)


불의에 저항하는 삶이야말로 예수를 다르는 길이라는 것. (226-226)


이 책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문익환 목사는 "생이란 결국 몸부림이다"라고 했습니다. 몸부림치다 보니 감옥에도 갔고, 사회 밑바닥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게 되었고, 사람 사랑하는 법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고, 인생을 사는 보람과 기쁨을 더 깊이 느끼게 되었고, 자유 정의 믿음 희망 참이 없는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질타한 일로 두 번째 수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예순. 환갑을 맞이할 때 문익환 목사는 차디찬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몸부림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고백이었던 겁니다.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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