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흑인 차별 정책)이 있다. 위키백과를 보면 "인종별로 거주지분리, 통혼금지, 출입구역분리 등을 하는 등, '차별이 아니라 분리에 의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사상 유례가 없는 노골적인 백인지상주의 국가를 지향하였다."(위키백과)로 간략하게 잘 요약했다. 이 정책을 시행했던 사람들은 칼빈주의자들로 알려져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 여기에 혐의점이 있다는 것을 나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충격이었다. 우리의 신학이 이런 암흑의 역사가 있었구나. 이 남아성의 상황에서 두 명의 영웅이 있었다. 한 명은 넬슨 만델라, 한 명은 데즈먼드 투투이다. 두 분 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 중 한 분, 데즈먼드 투투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이다.
두, 세 시간 기다리는 선거
남아공의 사람들이 투표를 한다. 개중에는 이런 말들이 오간다.
"나는 투표하려고 두 시간이나 줄 서 있었다."
"난 네 시간 기다렸어!" (13)
과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긴 줄을 서고 있었던 걸까? 이유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성취가 실현된 날이었다. 그 심정이 바로 첫 문단에 들어 있다.
1994년 4월 27일, 우리는 이날을 너무나 오랜 세월 기다려 왔다. 아파르트헤이트(흑인 차별 정책)에 맞선 모든 투쟁이 바로 이날을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우리 국민이 최루탄을 맞고 경찰견에 물리고 채찍과 뭉동이로 얻어맞은 것도,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감금, 고문, 추방을 당한 것도, 투옥되거나 사형선고를 받은 것도,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것도 모두 이날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첫 투표일, 우리가 태어난 땅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선거를 치르며 투표를 하는 날이 마침내 밝았다. 투표권을 얻기까지 나는 62년을 기다려야 했다. 넬슨 만델라는 76년을 기다렸다. 그리고 바로 오늘, 1994년 4월 27일에 이 일이 벌어졌다. (9)
기득권층과 과격분자들이 조금이라도 수가 틀린다면 이 선거날 대량학살의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위험이 있을 만큼 그들의 선거는 우리가 하는 선거와는 양상이 다르다. 물론, 우리도 민주화 과정이 있긴 했지만 이보다 극적이고 인종적인 차별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데즈먼드 투투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선거가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남아공의 선거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진정한 영적 체험이며 최고의 체험이다. 투표 부스에 들어간 흑인은 변화된 새사람이 되어 나왔다. 쓰레기 취급을 받던 기억이 황산처럼 존재의 본질을 갉아먹는 바람에 괴로움과 억압에 눌린 채로 투표 부스에 들어갔던 사람이 '자유로운' 새사람이 되어 고개를 높이 쳐들고 어깨를 쭉 편채 힘찬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생전 처음 맛보는 달콤한 음료수 같은 자유의 감미로움을 어떻게 설명할까?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웠던 사람에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느낌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빨간색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14)
이제 데즈먼드 투투가 활동했던 진실과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다.
진실화해위원회(진실과 화해 위원회,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 비극을 해결하려 했을까. 그들이 가려고 한 길은 무엇일까? "새로운 체제로 넘어가려면 과거를 효과적으로 처리해야"(28) 했다.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용서의 길을 택한다. 어떻게 그런 이상적인 길을 택했을까. 그것이 현실세상에서 과연 사람들에게 어떤 반발을 일으킬까. 당연히 심각한 질문이 일어났다.
남아공이 선택한 이 방식은 심각한 질문들을 야기했다. 앞으로 차차 다루겠지만, 범죄자 처벌을 면하게 해 줄 수 있는가? 이것이 대표적인 질문이다. 정부가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추진하는 활동이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생각을 부추기지는 않을까? 범죄자들에게 사과를 받아 내고 범죄 사실이 공개되는 창피를 주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정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신청자가 사면을 받게 되면 민형사상 책임이 모두 없어지게 되는데, 범죄자와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는 희생자의 헌법적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 과연 공평한 일일까? (40-41)
우분투(Ubuntu)
이 물음에 투투는 '우분투'(Ubuntu)를 이야기한다. 우분투는 <하나님의 어릿광대>라는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남아공 특유의 정서란다. 아마 우리나라의 '정'과 같은 민족적 특성이 아닐까 싶다. '정'에 그러한 면에 대해서는 <제노사이드> 리뷰를 참조하길 바란다. 이 우분투는 인간됨의 본질을 뜻한단다. 관대하고 호의를 베풀며 친절하고 다정하고 남을 보살필 줄 알고 자비롭다는 뜻이다. "내 인간성은 당신의 인간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사람이 된다", "나는 속하고 참여하고 나누기 때문에 인간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41) 더 나아가서
우툰부가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인격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 앞에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더 큰 전체에 속한 존재임을 아는 그에게는 온당한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욕을 받거나 위축되거나, 고문이나 압제를 당하거나, 실제보다 못한 취급을 당할 때 그 자기 확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화, 친절함, 공동체는 모두 가치 있는 선이지만, 사회적 조화는 우리에게 숨뭄 보눔, 즉 최고선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추구해 온 이 선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모든 것을 역병처럼 피해야 한다. 분노, 적개심, 복수심, 심지어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공은 이 선을 좀먹는다. 용서는 그저 이타심만 발휘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된다. 상대방을 비인간화하려는 것은 틀림없이 나도 비인간화한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회복될 힘을 얻고,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려는 모든 것을 이겨 내며 여전히 인간답게 살 수 있다. (41-42)
회복의 정의
응보의 정의가 있지만 회복의 정의도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아프리카의 사법 제도적인 특징이라고 한다.
회복의 정의의 주된 관심사는 징벌이나 처벌이 아니다. 우분투의 정신에 따른 불화의 치유, 불균형의 시정, 깨진 관계의 회복, 희생자와 범죄자 모두의 복권 추구이다. 범죄자도 자신이 상처 입힌 공동체에 재통합될 기회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범죄를 사람들에게 벌어진 일로, 그 결과를 관계의 파괴로 보는, 훨씬 더 인간적인 접근법이다 따라서 정의, 즉 회복의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유와 용서, 화해를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70-71)
아마도 이러한 정서에 대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보편적으로 이러한 정서가 현실 세상에서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제시대와 독재시대의 피해를 회복의 정의로 말하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도 이는 피해 당한 분들께서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는 이상 그 말을 하기가 어렵지 싶다. 특히나 아무런 연관이 없는 타인이 말이다.
투투는 성공회 주교답게 자신의 활동에 신학적 성찰이 돋보인다. 그 신학적 성찰 바탕에서 진실화해위원회가 움직였다.
요점은 우리가 범죄자들을 괴물과 악마로 단정하고 포기해 버리면 자연히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은 그들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모두 버렸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신학은 그들이 참으로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여전히 회개하고 달라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위원회는 진작 문을 닫았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달라질 수 있고, 자신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며, 참회, 혹은 최소한의 뉘우침을 경험할 수 있으며, 어느 시점에 이르면 자신의 비열한 행동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게 될 거라는 전제 아래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괴물이라 부르며 내쳐 버리면, 그들에겐 용서와 화해 같은 지극히 인격적인 과정에 참여할 가능성 자체가 없어지고 만다. (102)
앞서 개혁주의자들이 인종분리정책을 행했다고 썼다. 그들의 백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였고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당화했던 신학적 이론을 제공했다. 하나님께서 인종분리정책을 시행한다고 정치인보다도 먼저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바벨탑 건축과 이후에 나타난 언어 혼란과 인종의 분산, 함의 저주 등의 성경 이야기들을 원주민들을 적절한 자리에 묶어 두기 위한 근거 구절로 제시했다.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에 인종 분리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고 주장"(220)했다. 이를 비판하면 이단이 되었다. 참으로 한심한 행태지만 그들의 후에 입장을 바꾸었다. 참 다행이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알렸고 분명하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위기도 있었다. 투투는 이 위기를 이렇게 극복했다. 매일 성찬에 참여하는 즐거운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은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중보기도가 없었다면 투투는 무너지고 말았을 것(241)이라고 고백한다. "선을 이루기 위한 온갖 수고를 방해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는 악의 세력들의 뜻이 이루어져, 상처 입은 국민들을 치유하기 위한 엄청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241)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하다. 평소 기도를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이 기도가 누군가에겐 큰 힘이 될 수도 있다! 기도를 얕잡아 보지 말자.
청문회에서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위원회의 활동이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지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나 폭력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남아공에서 다시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책의 제목처럼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청문회에서 드러나는 죄의 고백에서 놀라운 모습들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아니지만 김요한 목사님의 <지렁이의 기도>에서 이 대목이 나온다. 필립 얀시의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다. 재인용을 한 번 옮겨보겠다.
반 드 브렉이라는 백인 경찰관은 한 청문회에서, 자신과 동료들이 열여덞 살의 흑인 소년을 총으로 쏜 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 시신을 바비큐 고기처럼 불에다 대고 이리저리 그을린 사건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8년 후, 반드 브렉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했다. 아내는 경찰관들이 남편을 장작더미에다 묶어놓고 그의 몸에다 휘발유를 끼얹은 뒤 불을 붙이는 과정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다. 그 백인 경찰관에 의해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노부인에게 대꾸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청문회 법정은 조용해졌다. "반 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판사가 물었다.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반 드 브렉이 남편의 시신을 불태운 장소로 가서 그 재를 모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 경찰관은 머리를 숙인 채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그녀는 추가 요구 사항을 덧붙였다. "반 드 브렉 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한 달에 두 번, 나는 그가 우리 집에 와서 하루 동안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나는 반 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걸 반 드 브렉 씨가 알도록 그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노부인이 증인석으로 걸아가는 동안 법정 안의 누군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 드 브렉은 그 찬양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졸도해버렸던 것이다.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194)
정말로 선으로 악을 이겼다. 이 위대한 행동에 악을 졸도했다.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죄를 지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가면서
용서. 누군가는 대단히 불편할 수 있는 단어일 수도 있다. 용서를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특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용서를 비꼬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용서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용서란 무엇일까. 이 책은 그 단초를 보여 준다. 용서. 정말로 용서 없이 미래 없다.
메모
당국은 그들이 허리띠로 목을 매어 자살을 햇고, 샤워를 하다가 비누를 밟아 미끄러져 사망했으며, 구금 중이거나 심문을 받던 중 건물 창밖으로 불쑥 뛰어내렸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자해로 죽었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스티브 비코였다. ... 경찰은 ... 심문자들과 터무니없는 언쟁을 벌이다 갑자기 벽에 머리를 들이박았다고 했다. 당시 경찰청장은 스티브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도 그의 사망 따위는 "아무 흥미도 없다"는 잊을 수 없는 냉담한 말을 내뱉었다. (26)
- 탁! 치니 억! 하고... (이 말의 남아공 버전인가...)
책 맛보기
놀라운 장면이었다. 온갖 인종의 사람들이 같은 줄에 함께 서 있었다. 그들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문직 종사자와 가사도우미, 청소부와 집주인이 투표소까지 꾸물꾸물 서서히 나아가는 줄에 섞여 서 있었다. 재난이 될 법했던 상황은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 그 줄은 남아공의 새롭고 독특한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 즉 우리 모두는 똑같은 인간이며, 인종, 종족 피부색의 차이는 정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3-14)
진실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것들이 반드시 서로를 배척하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증빙 자료를 갖추어 검증 가능한 '법적 사실적 진실'이 있고, "사회적 진실, 상호작용, 토론과 논쟁을 통해 확립되는 체험의 진실"이 있었다. 모하메드 판사가 "상처 입은 기억의 진실"이라 부른 '개인적 진실'은 치유하는 진실이었다. (36)
그 27년의 세월과 만델라가 겪은 온갖 고통은 용광로의 불길처럼 그의 강철 같은 의지를 담금질하고 불순물을 제거해 주었다. 그 고통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듯 자비롭고 관대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 고통 덕분에 만델라는 다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놀라운 권위와 신뢰를 얻게 되었다. 진정한 리더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자신의 활동이 자신의 명예나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추종자들에게 심어 줘야 한다. 그리고 고통만큼 이 사실을 설득력 있게 입증해 주는 것은 없다. (52)
교회가 우리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ㄹ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 흑인 지도자 대부분이 감옥에 갇히고 망명생활로 내몰리고 어떤 식으로건 발이 묶여 있을 때,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떠밀리다시피 투쟁의 최전선에 섰고, 그 덕분에 교회는 특별한 신뢰를 얻게 되었다. (56-57)
모든 사람의 과거에서 옛 남아공을 지워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천 번 만 번 사면을 받으면 뭐하나. 하나님과 다른 모든 사람이 나를 천 번이나 용서해 줘도, 나는 이 지옥을 안고 살아야 해. 문제는 내 머리에, 내 양심에 있어.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뿐이야. 권총으로 내 골통을 날려 버리는 거지. 내 지옥이 거기 있으니까" (69)
영국에서 태어난 막내가 "아빠, 그네 타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힘없이 "안 된다, 아가야. 넌 가면 안 돼"라고 대답해야 했다. 그 말에 아이가 "하지만 아빠, 다른 아이들은 놀고 있는데요?"라고 말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어린 딸에게 네가 어린이는 맞지만 조건에 맞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놀이터에 갈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순간마다 나는 죽음을 경험했고, 내가 너무나 처참하고 수치스럽고 한없이 작게 느껴져서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내 아버지가 어린 아들 앞에서 느꼈을 수치심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124)
그러나 우리나라는 또한 생존자들의 멋진 나라이며, 대단한 용서의 힘과 아량과 고상한 정신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선언해야 마땅하다. (125)
인생의 큰 비극 중 하나는 우리가 가장 미워하는 존재와 똑같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이 그런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66)
여기서 우리는 이런 악행을 저지른 이들이 그냥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악에 관하여 사람들이라고 해서 끔찍한 외모를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과 나처럼 어느 모로 보나 보통 사람이었다. (174)
진실화해위원회는 사람들이 찾아와 울고, 마음을 열고, 기나긴 나날 동안 품어 왔지만 하소연할 데 없이 홀로 삭여 온 아픔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179)
피터 비일 씨와 린다 비일 부인은 사면 신청 청문회에 참석해 자신들은 화해와 사면의 모든 과정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딸을 살해한 이들의 가족들과 포옹했다. (185)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을 우리가 돕길 기대하신다. (192)
구 남아공방위군(SADF)이 위원회에 거의 협조하지 않은 것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서글픈 약점이었다. 군인들이 많이 나와 증언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의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았다. 사면 신청을 한 주요 군인들은 군경합동작전에 참여했던 경찰관들이 사면 신청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동참한 경우였다. 우리의 치유와 화해가 영속적이고 실질적인 것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말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279)
1994년 르완다에서 종족 살로 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 그 장면은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얼마만큼 사악한 죄를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참으로 심란하고 끔찍한 기념비였다. 이렇게 서로를 처참하게 공격한 살마들은 대개의 경우 같은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마을에서 사이좋게 살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돈을 맺었고 신앙도 같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었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유럽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배층이던 투치족을 후투족보다 우대했는데, 이러한 정책은 현대 아프리카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살을 낳은 씨앗이 되었다. (세 번째 종족은 트와족으로, 수가 더 적었다.) 이 종족 학살을 보면 인종 차별이 인류에게 내려진 가장 큰 악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된다. 백인들이 흑인 종족 간의 유혈분쟁을 조장하긴 했지만, 실제로 흑인을 학살한 사람은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304)
나는 르완다의 역사에서 피로 물든 보복과 재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하고, 그 길은 응보의 정의를 넘어 회복의 정의로, 용서의 자리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용서 없이는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306)
우리 모두가 우정과 조화를 누리며 사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것이 바로 에덴동산 이야기의 요점이다. 에덴동산에는 종교적 제사를 위한 피 흘림마저도 없었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고 모두가 풀을 먹었다. 그러다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던 태초의 조화가 산산이 깨어졌고 피조세계 전체가 근본적으로 망가졌다. 인간들은 서로 싸우고 탓하며 필사적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멀어졌다. 그들은 함께 동산을 거니셨던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려 했다. 자연계는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든' 살벌한 곳이 되었다. 친목이 있던 곳에 반목이 나타났다. 인간들은 뱀이 그들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기 전에 그놈의 머리를 부숴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 성경은 상상력이 풍부한 시로 심오한 실존적 진리를 표현한다. (310-311)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양팔을 쭉 펴신 것은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우주적인 포옹으로 품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 모든 것이 그뿐께 속하게 될 것이다. 외부인은 없고 모두가 내부인, 모두가 한 무리가 된다. 이방인은 없고 모두가 한 가족, 하나님의 가족, 인간 가족의 일원이 된다. 유대인과 그리스인,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의 구분은 더 이상 없다. 분리와 나눔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모든 차이는 근본적인 통일성 위에 서 있기에 오히려 풍부한 다양성을 이루는 데 필요한 긍정적인 요소가 된다. 우리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312-313)
그분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것을 흡수해서 그냥 담아 두지 않고 하늘 아버지께 넘겨 드렸다. (337)
우리가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헨리 나웬의 유명한 구절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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