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티슬턴의 대표작이 아닐까 싶다. <두 지평>의 작업에 그다지 별로라는 분들이 계시지만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이 1960년도에 나왔고 이 책은 1970년대에 나왔다. 그렇다면 티슬턴의 이 작업이 굉장히 유익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번역되고 나서 한 차례 논쟁(?), 잡음(?), 이슈가 된게 있었다. 독일에서 해석학을 전공하고 온 사람이 티슬턴의 <두 지평>을 완전히 까내린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주로 그분의 폭언이 시작되었다. 아마 그분은 티슬턴이 원전을 충분히 독해하지 못하고 해석학을 오해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영미권을 싸잡아 비난했다. 반면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전공하고 있는 페친분은 그게 오버라고 했다. 티슬턴이 크게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의 인품이 별로기에 내 페친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신학을 전공하고 있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티슬턴도 마찬가지. 심도있는 철학자가 아니라 그 철학적 해석학을 매개로 성경 연구를 하는 사람이다.
책은 번역이 참 잘 되어있다. 존경하는 박규태 목사님께서 번역을 해주셨다. SFC에서 나온 <해석의 새로운 지평>이 가장 가독성이 낮았고 새물결플러스에서 낸 티슬턴 책들은 대체로 가독성이 좋았다. 이해가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IVP에서 나온 <두 지평>이 가장 잘 눈에 들어왔다. 박규태 목사님께선 역주도 상세히 달아주시고 독일어 원문을 직접 인용하여 티슬턴이 부정확하게 인용한 부분까지 대조해서 옮겨 주셨다. 정말 리스펙할 수밖에 없으신 분이다!
이 책을 읽고 가다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가다머를 공부하고 싶어졌다. 원래 리쾨르, 레비나스, 지라르를 나중에 공부하고 싶었는데 거기에 가다머도 추가되었다.
저자의 지평이 없다?
일 전에 김진규 교수님께서 이 책에는 저자의 지평이 없다고 페이스북에 비평을 했었다. 김진규 교수님은 이렇게 평가를 하였다.
띠셀톤의 이론에는 저자나 저자의 의도에 대한 지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목회학 석사과정에서 해석학을 배울 때에는 저자의 의도를 찾는 것을 중요한 해석의 목표로 삼는데, 그런데 저자는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일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20세기 중반까지 성서학에서 성경해석의 도구로 사용해온 역사비평학의 근본 전제를 이해해야 알 수 있다. 자료 비평, 양식 비평, 편집 비평 등이 만ㄹ들어 놓은 결과가 뭔지 알아야 한다. (김진규 교수님 페이스북 글 중, 2017년 10월 22일)
나는 이 글을 읽고 내가 다른 책을 읽은 건가 싶었다. 이 책에선 성경 비평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나타난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때문이다. 그리고 저자에 대해서 아에 언급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한 챕터 따로 떼어내서 저자에 대한 관점을 쓰지 않았을 뿐 설명을 한다. 이때 내가 쓴 글을 가져와 본다.
김진규 교수님 의견에 물음표.
나는 두 지평을 읽으면서 티슬턴이 슐라이허마허를 말하며 저자의 관점을 이야기해 준게 참 좋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의 언어 혹은 문법 측면과 해석 주체의 심리 측면을 구분했다... 심리적 해석학은 저자 자신의 의식을 특징짓는 사상의 내부 연관 관계 속으로 파고드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해석자는 상상과 공감이 담긴 이해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이해할 텍스트의 저자가 가진 생각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심리 차원에서도, 한 언어 표현 뒤편에 자리한 각 개인의 '사상'은 저자의 삶이라는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저자의 삶과 의식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삶과 실존 전체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두 지평, 174)
역시 오늘 읽은 가다머 편에서도 계속해서 슐라이어마허를 들어 강조하는데
"이해해야 할 것은 정확한 말과 그 말의 객관적 의미뿐 아니라... 저자의... 개성이다... 그것은 결국 예언 과정으로서, 자신을 저자의 생각 속에 놓아두는 것이요... 창조 행위를 재 창조하는 것이다."(두 지평, 464)
저자의 지평이 없다는 맥락에서 어쩌면 한 챕터를 따로 떼어서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도구를 이용하고 저자와 텍스트 또, 그 당시 정황, 그리고 해석자와 해석자가 처해있는 정황까지 등등 티슬턴은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다. 굳이 텍스트 저자의 챕터만 하나 떼어놓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왠지 김진규 교수님이 성경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두 지평을 가지고 온건 아닌가 싶다. 구약은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은 최근에 나온 에릭 이브의 <예수에서 복음서까지>, 마이클 버드의 <주 예수의 복음> 등과 같은 종류의 책이 맞지 않을까?
나는 지금도 김진규 교수님께서 성경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티슬턴을 언급한 것은 아닐까 싶다.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만큼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주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니깐. 나는 김 교수님께서 오독하셨다고 본다.
누구에게 이 책이 필요할까?
해석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말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이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분들께는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 하이데거, 불트만, 가다머, 비트겐슈타인이 주로 대화의 상대자들이다. 목차를 살펴 보고 관심있는 해석학자들이나 관심 분야를 읽으면 될 것같다. 나 역시 불트만 부분을 읽고 요약한 부분이 있다.
2020/01/26 - [북리뷰] - 두 지평 불트만 챕터를 읽고 나서
나는 위의 글처럼 이렇게 활용했다. 한 챕터 요약한 부분도 있기는 하다. 주관성과 객관성에 대한 부분도 나오고 공부할 게 참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나가면서
해석학 공부를 하면서 나는 철학적 방법론이 과연 성경을 해석하는데 유익할까 아직도 의문이다. 가다머의 두 지평은 성경해석(물론 비유는 다시 자세히 읽어보아야겠다)보다는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져 온 방식을 작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 결과물이 티슬턴의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인 것 같다.
당시 저자의 지평과 당시의 지평 그리거 지금 나의 지평까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해석학적 도구를 활용한다. 진정한 지평융합이 신앙을 하면서 일어나길 바란다.
메모
그러나 불트만은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칼 바르트와 견해를 같이하며 공통 관심사를 피력했다. (60)
- 이 점에서 불트만을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현상학의 목표는 "나타나는 것이 그 자체에서 나타나는 그대로 그 자체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62)
- 있는 그대로?
프란츠 마이어는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에 다가가는 방식이 유사하다고, 특별히 언어 사용이 사전 '이해'를 반영한다는 믿음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하는 또 다른 저술가다. (74)
- 선이해가 아니라 전이해라고 번역한 이유가 있을까?
"요한에게 예수 '이해'는 무엇보다 역사 지식이었다. 동시에 "회고는 예수의 역사를 기계처럼 재생하는 것이 아니며, 보는 행위가 이루어질 때 성령의 영향을 받은 설명이 일어난다. 그 결과 역사 속 예수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된다. (88)
- 이것은 신앙의 예수가 역사적 예수, 곧 역사 속의 예수란 말과 비슷한 말 아닐까?
나인햄은 C. H. 도드가 말하는 실현된 종말론과 불트만이 말하는 이른바 실존주의를, "끔찍하게 뒤섞인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요 "현대의 안경을 통해 고대 텍스트를 읽어 낸 산물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100)
- 내 말이!(아마도 나인햄은 실존주의 개념이 현대의 관점이기에 불트만이 오독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불트만의 비신화화가 바로 고대 텍스트를 읽어내려던 불트만의 해석학적 장치이지 않았을까?)
역사적 해석이 그 과업을 철저히 이룰수록, 해석은 성경의 기록을 그야말로 우리 세계가 아닌 다른 인간들이 실존하던 세계 속으로 더욱 완벽하게 옮겨 놓는다. (103)
- 동의!
역사가 자신이 겪은 삶의 경험은 그에게 역사의 개연성을 판단할 기준을 제공한다는 트뢸취의 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나인햄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보여 주는 사건"이나 "유일무이한 성육신을 믿는 믿음에 의존하지 않으면"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제시하는 자료를 재해석할 수 없느냐는 질문을 십중팔구 던질 수밖에 없다. 이런 역사관에 따르면, '하나님의 간섭'은 사건일 수 없고 다만 또 다른 평범한 사건을 바라보는 방법일 뿐이다. (106)
-트뢸취의 말과 나인햄의 말이 같은 말 같고 이어지는 것 같다. 삶의 경험 ↔ 성육신을 믿는 믿음
그러나 미란다와 보니노는 (주관성과 대립하는) 주관주의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미란다는 이렇게 강조한다. "나는 성경을 마르크스로 축소하지 않는다.··· 다만 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우리는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183)
- 나의 해방식학에 대한 오해가 풀린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그저 반복한 것도 아니며 자신들 특유의 상황에 텍스트를 몰아 넣은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점들도 있겠지만 그런 문제는 해방신학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불트만은 <공관복음 전승사>에서, 양식비평은 단지 "묘사하고 분류하는 과정" 에 그치지 않고 (궁켈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전승 단위들의 삶의 정황을 원시 교회의 설교 및 예배와 관련지어 확증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는 마르틴 디벨리우스의 판단을 지지한다. (347-348)
- 여기에서 삶의 정황은 실존주의와 연결되는 걸까? 하이데거와도?
하지만 불트만은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선포를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공동체는 예수라는 인물을 주로 유대 묵시 문학에서 끌어낸 신화의 배경 속에 놓아두는 방법으로 자신의 신앙 태도를 표현한다. 헬라파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묵시 문학을 끌어오지 않고, 먼저 퀴리오스(kyrios, 주) 숭배와 신비주의 종교의 언어, 두 번째로 영지주의 신화를 끌어왔다. (348-349)
- 그래서 구약적 맥락에서 끌어왔다는 걸 강조할 수 았다.(먼저는 불트만이 구약적 맥락을 무시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두 번째 영지주의 신화를 끌고 왔다는 것에서 전통적인 사람들과 의견차이가 심한 것 같다.)
- 과연, 조직신학자들이 이 말에 동의할런지?
책 맛보기
이해는 단순히 문법책이나 사전에서 낱말 하나하나를 찾는 일이 아니라 두 지평 사이의 소통이다. (264)
하지만 가다머는 전통이 그저 수동적 퇴적물이 아니라 해석을 통해 텍스트에 참여하고 텍스트와 소통하는 능동적 과정이라고 말한다. (483)
그러나 바로 기서이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목적과 관련하여 강조하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들의 측면은 감춰져 있다. 그 측면이 단순하고 친숙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늘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푸는 길은 새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잘 정리하는 것이다." (570)
기독교 신학이 현재의 의미라는 문제를 해석에서 배제할 수 없음은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대하는 태도에서 일부 암시된다. 우리가 앞서 논증했듯이, 이런 태도는 비판을 모르는 순진함에서 나온 게 아니다. 해석자는 어쨌든 자신이 속한 지평을 벗어나지 못하며, 본문을 볼 때 자신이 속한 시간 및 전통과 무관한 사람처럼 행세하지 못한다. 해석자의 주관성은 비판을 통해 통제받아야 하며, 해석학의 과업은 본문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거리, 그리고 본문과 해석자의 관계가 허용하는 만큼 본문과 긴밀한 지평 융합을 이루는 쪽으로 전진한다는 점을 포함한다. (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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