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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공부흔적

두 지평 불트만 챕터를 읽고 나서

by 카리안zz 2020.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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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지퍙 8장을 보면서 불트만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여타 다른 해설서를 보면서 나는 그저 불트만이 실존주의에 출실하며 그 시대에 당연히 내어 놀 수밖에 없는 작업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걸. 이미 불트만은 하이데거와 만나기 전에 이미 실존주의의 냄새를 내기 시작했다. 

 

불트만은 <공관복음 전승사>에서 양식비평은 단지 묘사하고 분류하는 과정에 그치지 않고 (궁켈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전승 단위들의 삶의 정황을 원시 교회의 설교 및 예배와 관련지어 확증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는 마르틴 디벨리우스의 판단을 지지한다. (348, <두 지평>)

 

<공관복음 전승사>는 1921년 나왔기에 1927년에 나온 <존재와 시간>과는 큰 상관이 없다. 이 외에도 많기에 이미 불트만은 하이데거를 만나기 전부터 실존주의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봤을 때 하이데거와 불트만의 만남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라고 말한 김동건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더군다나 하이데거는 당시 바울과 루터 연구에 관심이 많았고 불트만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현대신학의 흐름>, 373)

 

2.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 부분은 역시 전문 철학의 영역이라서 그런가 싶다. 불트만이 신칸트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서 티슬턴이 설명을 해주는데 그게 잘 이해가 안 된다. 역시 이럴 때는 전공자가 옆에서 일러주는게 최고인데. 한계가 있다. 

 

3. 얼마 전에 김진규 교수님이 티슬턴의 두 지평에는 저자의 지평이 없다고 했는데 오히려 나는 두 지평을 읽으면서 티슬턴이 슐라이어마허를 말하며 저자의 관점을 이야기해 준게 참 좋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의 언어 혹은 문법 측면과 해석 주체의 심리 측면을 구분했다... 심리적 해석학은 저자 자신의 의식을 특징짓는 사상의 내부 연관 관계 속으로 파고드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해석자는 상상과 공감이 담긴 이해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이해할 텍스트의 저자가 가진 생각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하다.... 마찬가지로 심리 차원에서도, 한 언어 표현 뒤편에 자리한 각 개인의 '사상'은 저자의 삶이라는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저자의 삶과 의식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삶과 실존 전체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174, <두 지평>)

 

역시 오늘 가다머 편에서도 계속 슐라이어마허를 들어 갖오하는데

 

이해해야 할 것은 정확한 말과 그 말의 객관적 의미뿐 아니라... 저자의... 개성이다... 그것은 결국 예언 과정으로서, 자신을 저자의 생각 속에 놓아두는 것이요... 창조 행위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464, <두 지평>)

 

저자의 지평이 없다는 맥락에서 어쩌면 한 챕터를 따로 떼어서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도구를 이용하고 저자와 텍스트, 또 그 당시 정황, 그리고 해석자와 해석자가 처해있는 정황까지 등등 티슬턴은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다. 굳이 텍스트 저자의 챕터만 하나 떼어놓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왠지 김진규 교수님이 성경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두 지평을 가지고 온 건 아닌가 싶다. 구약은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은 최근에 나온 에릭 이브의 <예수에서 복음서까지>, 마이클 버드의 <주 예수의 복음> 등과 같은 종류의 책이 맞지 않을까? 

 

4. 정확히 언제 나온지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 쯤에 나온 이 책의 당시 상황을 따져본다면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나 싶다. 하이데거야 좀 오래되었지만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은 1960년도에 나왔으니 해야될 작업을 티슬턴이 했다 싶다. 철학자들의 개념들을 빌려와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이어가고 특히나 가다머를 읽는 이번 장에 인상 깊은 점이 있다. 조직신학과 주해를 가다머의 지평융합 개념으로 풀어나가는데 참 좋다! 당연 주해를 하다보면 당연히 고민해야 될 부분들인데 전통(조직신학)과 주해의 긴장관계를 놓치 않으면서 전통을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텍스트를 역사와 현재의 지평에 비춰 이해한다. 하지만 가다머는 전통이 그저 수동적 퇴적물이 아니라 해석을 통해 텍스트에 참여하고 텍스트와 소통하는 능동적 과정이라고 말한다. (483, <두 지평>)

 

티슬턴의 작업은 너무나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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