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괴리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있었는가? 나는 거기에 대해서 고민이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공부한 곳의 조직신학자들의 수업은 최악이었다. 특히나 M교수는 최악이었다. 자기 분야도 아닌데 샌더스, 던, 라이트는 신약학계에서 한물간 사람들이라고 평하고 유해무 교수님을 저격하며 동방신학 별거 없다고 우습게 말했다. 신약학자들 중에 톰 라이트야 급을 높이 쳐주진 않지만 샌더스와 던을 무시하는 신약학자는 본적이 없다. 무시하는 조직신학자의 발언에 참으로 기괴함을 느꼈다. 또, 동방신학을 깔 땐 원문은 읽을 수 있을까나? 읽어보고 비평도 받아보고 그렇게 평가하는 건가? 칼빈주의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하면 '읽어보고 비판하라', '제대로 읽어보고 비판하라' 류의 이야기를 할 거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나마 L교수님은 바빙크를 읽게 해서 좀 나았다. 수업은 페이스북에 뜨는 내용들을 너무 많이 말하더라. 아참, M교수는 바르트를 비판하면서 아래로부터 신학자라고 비판한다. 신학교과서의 내용과는 정 반대의 주장을 할 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아직 그 근거가 신학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명확하진 않나보다. 바르트 전공자가 되셔서 아래로부터 신학을 했다는 근거를 많이 가져와 주셔야 할 듯하다. 그리고 불트만과 판넨을 같은 쌍으로 보고 실존주의라고 하고. 이거 뭐 판넨은 그 불트만의 실존주의를 엄청 깐 사람아닌가... 모르겠다. 신학교과서같은 류의 책과는 전혀 다른 말들을 해주셔서 신뢰가 안 되는 분이시다.
그러니 나같은 사람은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 조직신학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낀다. 사실 이 환멸은 조직신학이 아니라 특정 조직신학'자'에게 가해져야 하지만 그걸 잘 구분하고 싶지 않아질 때가 있다. 그러나 조직신학을 무시할 수 있겠나? 우리의 역사가 담겨 있는 분야인데 반드시 숙지해야 하고 공부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러던 차에 티슬턴의 이 책을 스터디 그룹에서 읽게 되었다. 나는 그 고민의 연장에서 이 책을 읽었다.
티슬턴은 성경신학자다. 저명한 NIGTC 주석의 <고린도전서>부분을 쓰셨다. 이걸 목회자 버전으로 쓴게 SFC에서 나온 <고린도전서>이다. 성경해석학에서도 권위있는 분이신데 그래서일까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을 연결시켰다. 몇 년 뒤 IVP에서 티슬턴의 <조직신학>이 나왔는데 그 책이 나에겐 더 필요한 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때 가장 의미있었던 것은 이 책이였다. 과연 이 어려운 문제를 티슬턴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할까?
교리 역시도 내러티브
티슬턴은 교리 역시도 내러티브였다고 말한다. 그는 바르트, 곤잘레스를 인용하는데 곤잘레스를 인용한 말이 가장 그 의미를 잘 드러내 준다. 물론, 이 뒤에 여러 신학자들의 말들을 인용하며 논증을 강화시켰다.
곤잘레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교리는... 대대로 교회가 하나님에게서 들은 것을 분명히 하고자 힘쓴 결과물이다.... 교회의 삶에서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교리와 하나님을 혼동하는 것이다." 교리는 종종 새로운 도전들에 대한 반응으로(우리가 믿음의 성향 이론을 분석하면서 확인한 것처럼) 또는 가변적인 언어나 상황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또한 교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동적이고 활동하는 분이기에, 살아 있고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형태를 취한다. 만일 교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반영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교리는 인간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못지 않게 "살아 있고" 시간성과 관련될 것이다. (138-139)
교리 역시도 시간 안에서 진행된 것이기에 내러티브가 있다는 말이다. 교리 역시도 드라마 구성과 같이 볼 수 있다. 이는 맥그라스가 말했던 것처럼 "성경 내용 자체의 내러티브 성격"에서 나온(144-145) 것이 아닐까 싶다. 나도 맥그라스의 말에 동의한다. 티슬턴은 좀더 부연 설명을 해준다.
"플롯" 또는 "구성"은 반전, 갈등, 놀람, 복잡성, 희망, 좌절, 성취를 허용한다. 이것들은 (이론적 사상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가 상호작용하는 인간 삶의 참된 요소다. "거대 내러티브"(비록 리오타르가 제시한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다루시는 것을 자세히 말할 수 있다. 반면 "작은" 내러티브는 여정이나 내러티브를 도중의 것으로 규정하는 해석의 애매함과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특정 사건과 사람들의 척도에 따라 신적 행위의 전유를 묘사할 수 있다. 여기에는 리쾨르가 "계급의 위계"라고 부르는 것을 위한 여지가 있다.
따라서 많은 신학자가 기독교 교리의 본질을 내러티브, 드라마 또는 드라마틱 내러티브에 맞춰서 설명하려고 애쓴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44)
이를 잘 적용한 것은 벤후저이다. 벤후저의 책 <교리의 드라마>(부흥과개혁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을 보려면 이 책을 보시길 추천한다. 잠깐 맛보기를 보자면 이렇다.
벤후저는 교리가 본 것에 대한 반응 곧 "우리가 보고 들은 바"(요일 1:3)에 대한 반응이고, 행동의 관점에서 보면 살아 있는 수행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교리가 명제적 진술이나 정적 규칙이 아니라 생명력을 주는 드라마틱한 지침"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더 구체적으로 "기억된 과거는 플롯을 통해 표현된다"고 덧붙이고, 이것은 명제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156-157)
교리가 단순히 명제의 나열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고 우리가 드라마틱한 연기라는 것이라는 티슬튼의 언급은 교리를 새롭게 보게 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가장 큰 변화가 교리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는 것이다. 교리는 함꼐 수행해야하는 것이다!
해석학과 교리에서 형성, 교육, 훈련?(제1부 5장 내용)
이 책을 다 읽고 좀 시간이 지났다. 한창 제임스 스미스의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를 보고 있었을 때다. 욕망, 성품, 형성에 대해서 저자는 말한다. 근데 왠걸. 이 책의 목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제1부 5장이 거기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티슬턴은 해석학과 교리에서 이 내용을 말한다.
웰스는 예배에 함께 참여하고 성경을 함께 경청하는 것이 성품을 형성하는 행동 습관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중보기도는 인내, 오래 참음, 타인의 자리에 자신을 두는 것과 같은 덕을 형성하는 데 유용하다. 세례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 때 빈손 들고 나아가는 태도와 그리스도와의 동일화 행위에 있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태도를 길러준다. 성찬 곧 주의 만찬에서 평화를 공유하는 것은 타인과 화목한 관계를 이루며 살고 공동의 사명과 헌신에 따라 협력하며 사는 습관을 배우게 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참여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습관이 길러진다. 놀이를 하는 것처럼 예배도 자신만의 규칙과 관례를 갖고 있다. 웰스는 이것을 이튼 운동장의 훈련장과 비교하고, 여기서 종말론적 성취를 바라본다. 웰스는 "천국은 예배의 놀이가 현실이 될 때 온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성의 습관과 훈련은 윤리적 판단과 행동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와도 관련되어 있다. 웰스는 "즉흥적 훈련은 예배와 제자도에 대한 유비"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즉흥성과 수행은 공동으로 인정도니 대본이 있는 배경 속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넓게 보면 성경 및 합의된 교리 전통에게 주어진 것에 상응한다. (180-181)
참 중요한 말이 이 글 속에 있는 것 같다. 예배 속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형성하고 기를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어 참 좋았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습관이 길러진다는 것에서 <습관이 곧 영성>이라는 제임스 스미스의 주장을 실감하게 한다. 앞서 교리 역시도 연극의 대본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더 보여준다. 하나의 대본인 성경이 있기에 교리 역시도 대본이 있는 배경의 시대에서 그 대본을 수행해야 했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을 언급하며 계속 주제를 추적해 나간다. 중요한 문장으로는 "부르디외는 비트겐슈타인(메를로-퐁티와 함께)이 자신의 사상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고, 사람들이 참여한느 삶의 양식을 기초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의 행동 성향을 가리키는 뜻으로 아비투스라는 말을 사용한다."(186) 아비투스라는 말이 중요하기에 한 번 옮겨 봤다. 제임스 스미스를 공부하신 분들은 이 챕터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나가면서
2장 <믿음의 성향 이론>도 참 좋았다. 교리라는 것이 단순한 명제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가 수행해야하는 일이였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교리의 틀이 많이 달라진다. 교리는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실천이라는 것을 단순히 구원의 행위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런 식의 도식을 많이 썼던 것 같다. 믿음 vs 행위 말이다. 하지만 요즘 행위가 너무나 엉망인 개신교다. 밑에 티슬턴의 비유처럼 우리가 정말 믿고 있는 바와 다른 것을 의도적으로 명백히 계속 행동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머리에 입력된 것을 줄줄이 말하는 것과 진정 행동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 나는 제임스 스미스가 강조한 것처럼 욕망이 이론에 앞선다고 본다. 행동에는 욕망이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런 접근을 하지 않지만 색다른 접근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스미스를 공부했던 분들은 이쪽으로 넘어와 광대한 광맥을 채굴해 보라!
메모
예수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 나라를 드라마로 연기한다. 예수와 바울은 하나님의 드라마를 창조의 드라마(제1막), 이스라엘의 포로기 드라마(제2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결정적이고 적극적인 하나님 말씀의 드라마(제3막)를 거쳐 이제 복음과 복음 교리에 참여하는 자들이 발견하는 교회 시대의 드라마(제4막)로 막을 넘긴다. "전체 5막으로 이루어진 신적 드라마"의 마지막 대단원은 종말에 이르러 절정에 달할 것이다. (159)
- 라이트의 5막비유이지!하하
프라이스는 우리가 단순히 믿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실제" 믿음의 시금석은 이 믿음이 의식적으로 지성 속에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믿음으로부터 도출되는 행동 과정 또는 습관적 행동 속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하길 "누구든지 밤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낮에 일을 잘할 수 없다고 믿는다"고 해보자. 만일 사람들이 다음 날이 정말 중요한 날이라는 걸 알면서도 새벽 1시 반까지 브리지 게임을 하면서 놀고, 그것도 주기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이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그들의 주장의 지위는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 프라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매우 자주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을 관찰함으로써 그의 믿음 -그가 믿는다고 고백한 믿음과 반대되는 그의 실제(real) 믿음- 을 판단한다" (79)
- 그런데, 자신의 몸에 안 좋을 지 알면서도 몸에 안 좋은 행동들을 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가령, 먹는 거라던가.
6장 마지막 쪽 223에서 메모
- 초기의 교리와 그 이후 교리들 간의 차이는 없을까?
책 맛보기
이것은 리쾨르가 "상징은 생각을 낳는다"는 격언으로 정식화한 그의 초기 사상을 반영한다. "상징은 한없는 주석을 낳는다." 상징(단어의 차원에서), 은유(문장의 차원에서), 구성(내러티브의 차원에서)은 단순히 사전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생각을 창조하고 확대시키고 현실화한다. (143-144)
때때로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 전통을 합법화하고 옹호하려는 욕구는 우리가 해석자로서 각각의 개별적인 모델에 어떤 비중을 두는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580)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슈트라우스가 만들어내고 결국은 슈트라우스를 패퇴시킨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성육신이라는 교의학의 원리가 구체적인 역사적 개인 곧 나사렛 예수 속에서 충분히 체현되었다는 주장으로부터 분리된다면, 그 신앙은 붕괴되거나 재해석되어야 한다." (696)
나중에 판넨베르크는 회고하면서, 이 요소들이 1세기 말이나 심지어 2세기에 나온 것으로 보지 않고 이렇게 설명한다. "이 요소들은 이미 바울 이전 전승과 케뤼그마 속에 들어 있었다." 나아가 판넨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최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몸이 무덤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예수의 부활에 대해 성공적으로 설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활 사건은 "이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주장을 함축한다... 부활 사건은 이 세상에서, 말하자면 여자들이 찾아가기 전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710)
바르트는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13장의 사랑에 대해 "사랑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완전히 폐하여 질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 현상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어떤 것을 지시하는지, 무엇을 증언하는지 하는 것이다." (770)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수난"에 대한 온전한 물음에 다시 문을 열어놓는다. "무감정성, 불가분리성...본질(ousia)... 불변성"과 같은 교부들의 고전적인 교리는 분명히 성경의 영향보다는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더 크게 반영한다. 고전적 견해를 비판하는 글이 이토록 많이 쏟아지는 오늘날, 성경의 내러티브뿐 아니라 몰트만의 선구적인 통찰력을 따르는 소위 "열린 신론"이 마치 대담한 혁신인 것처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놀랍다. 이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열쇠는 "고난 당할 수 없는 하나님은 사랑도 할 수 없다"는 몰트만의 확고한 격언뿐만 아니라, 루터와 칼뱅의 신학 중심에 놓여 있는 언약적 배경과 약속의 신학에도 의존한다. 만일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스스로 고난당하기로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작정하신다면, 이것은 자신이 어떻게 행할지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의 축소가 아니라 오히려 확대다. (818)
목 차
감사의 말
약어
서론
제1부 교리 해석학을 탐구하는 이유
1장 부유하는 "문제들"에서 삶의 해석학적 물음으로
1.1. 가다머의 "문제들"과 "발생하는 물음" 사이의 대조
1.2. 기독교 신앙고백과 삶의 배경: 신약성경에서 2세기 말까지
2장 믿음의 성향 이론
2.1. 비트겐슈타인의 심적 상태와 성향적 믿음, 그리고 요한1서의 믿음
2.2. 프라이스가 제시한 믿음의 성향 이론과 요나서의 "반쪽-믿음"
2.3. 신약성경에서 교부들의 교리까지: 성향적 반응의 연속성
3장 삶의 양식, 체현, 장소
3.1. 이스라엘의 삶에 나타난 공동체적 신앙고백과 성경에 나타난 체현
3.2. 기독교 전통 속에 나타난 체현, 탈체현, 장소
3.3. 해석학에서 "삶"과 "삶의 양식": 딜타이, 아펠, 비트겐슈타인
4장 교리 해석학: 시간과 공동체 내러티브의 해석학
4.1. 시간, 시간성, 내러티브: 살아계신 하나님
4.2. 드라마틱 내러티브로서의 기독교 교리: 한스 폰 발타자르
4.3. 케빈 밴후저의 정경적-언어적 접근법에 나타난 드라마로서의 교리
5장 해석학과 교리에서 형성, 교육 훈련
5.1. 가다머, 리쾨르, 베티에 나타난 형성, 교육, 훈련
5.2.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에서 훈련과 적용, 웰스의 사상에서 훈련과 수행
5.3. 비트겐슈타인과 가다머의 사상에서 교육에 대한 추가 사실 및 교리와의 상관성
6장 타자성과 도발의 해석학을 통한 형성
6.1.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형성: 야우스의 수용과 도발
6.2. 형성, 해석학, 교리에서 공적 담화: 트레이시와 고전
6.3. 형성적 능력으로서의 교리에 대한 보다 명시적인 언어: 평가와 비판
제2부 가능한 반론에 대한 답변
7장 해석학과 교리의 변증법: 정합성과 다성성
7.1.정합성과 우연성: 가능한 긴장의 원천?
7.2. 공동체적 · 우연적 · 해석학적 접근법은 인식론을 배제하는가?
7.3. 변증법, 체계, 다성성, 그리고 정경에 대한 다른 이해: 바흐친
8장 "과학"으로서의 교리가 여전히 해석학적이면서 형성을 증진시킬 수 있을까?
8.1. 토랜스의 사상에서 과학, 신학적 과학, 해석학적 형성
8.2. 버나드 로너간의 사상에서 정합성, 인식, 형성, 해석학
8.3. 정합성, 체계, 학문적 진리 기준: 판넨베르크
8.4. 과학의 연구 프로그램에 관한 제안: 라카토스와 머피
제3부 기독교 교리의 주요 주제
9장 인간됨의 해석학을 위한 다양한 이해의 지평
9.1. 이해의 지평: 첫 번째 실례, 관계성의 해석학
9.2. 이해의 지평: 두 번째 실례, 공동체적 틀의 해석학
9.3. 이해의 지평: 세 번째 실례,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해석학
10장 창조: 인간의 상태를 해석하기 위한 이해의 지평
10.1. 성경 전통에 나타난 이해의 지평으로서의 창조
10.2. 이레나이우스에서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지평으로서의 창조
10.3. 최근의 "해석학적" 신학에 나타난 창조: 몰트만과 판넨베르크
11장 인간됨: 하나님의 형상, 타자와의 관계성, 육체적·시간적 삶
11.1. 인간의 상태를 해석하기 위한 이해의 지평으로서의 하나님 형상: 세상을 위한 지혜와 책임
11.2.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타자"로 관계 맺기 위한 능력
11.3. 하나님의 형상과 체현된 인간 생활의 선물이신 그리스도
11.4. 삶의 지분을 높이는 정서, 성, 그리고 다른 은사들
12장 왜곡된 욕망의 해석학: 인간의 죄의 본질
12.1. 죄의 다면적 본질에 대한 전이해를 일으키는 지평들
12.2.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죄의 다면적 이해
12.3. 이레나이우스에서 칼뱅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죄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지평
13장 타락과 집단적 죄의 해석학
13.1. 전통적으로 타락의 신학으로 해석된 성경 본문의 해석학
13.2. 타락과 본래 상태? 교부들의 사상과 개혁파 신학
13.3. 슐라이어마허에서 니버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상에 나타난 죄의 해석학
13.4. 페미니즘 학자에서 판넨베르크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상에 나타난 죄의 해석학
14장 십자가 신학의 해석학과 언어적 통용성
14.1. 해석학의 출발점: 두 종류의 이해 지평
14.2. 성경 언어의 경화들: 구속과 구원
14.3. 다른 유효한 경화들: 화해, 중보, 나아감
14.4. 신약성경에서 모델과 한정사로 나타난 복합적 개념과 이미지
15장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해석학: 성경의 내용을 해석함
15.1. 이해와 논리적 문법의 지평: 대표, 참여, 동일시, 대속
15.2. 이해와 논리적 문법의 지평: 속죄와 유화
15.3. "그리스도 안에" 있음: 은헤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칭의의 해석학
16장 속죄 교리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해석학적 요소
16.1. 속사도 교부와 초기 교회 변증가들의 특별한 중요성
16.2. 안셀무스의 접근법이 낳은 해석학적 문제
16.3. 아벨라르두스에서 종교개혁자들과 아울렌까지: 추가 문제와 지평들
17장 기독론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17.1. "예수는 주시다": 실존적 해석학인가 그리고/또는 존재론적 진리-주장인가?
17.2. 예수, 하나님, 인간: 현대의 논쟁 및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나타난 이중적 배경
17.3. 예수, 하나님, 인간: 히브리서의 독보적인 공헌
17.4.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예수: 환원주의적 지평 안에서 벌어진 실패한 논쟁
17.5. 포괄적인 해석학적 지평: 세 번째 탐구와 판넨베르크
18장 성령: 성경, 역사, 경험, 그리고 해석학
18.1. 내재하는 저편에 의해 형성된 지평, 기독론과 종말론에 의해 확장된 지평
18.2. 그리스도를 형성하는 성령: 인격성, 공동체, 은사, 거룩함
18.3. 성령의 신성: 교부들과 삼위일체적 지평
18.4. 오순절의 은사, 그때와 지금: 역사와 해석학의 문제
18.5. 방언과 예언에 대한 주석과 해석학
19장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 해석학
19.1. 해석학적 출발점: 경험의 타당성과 애매성
19.2. 해석학적 출발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행위에 대한 신약성경의 내러티브
19.3. 해석학적 보충과 샛길: 행동 속에 계시된 하나이신 하나님
19.4. 하나님의 초월성의 해석학: 은혜와 거룩한 사랑
20장 해석학적 관점에서 본 교회와 목회
20.1. 해석학적 지평: 집단, 공동체, 신학 및 제도, 송영의 지평
20.2. 교회 "모델"의 공헌: 신학적 · 제도적 모델에 대한 더 깊은 고찰
20.3. 교회의 "표지"와 교회의 목회: 사도권
21장 말씀과 성례의 해석학: 세례와 성찬
21.1. 성례를 이해하는 다섯 가지 해석학적 물음
21.2. 해석학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례에 관한 문제
21.3. 성찬에 관한 해석학적 문제: 성경 및 역사적 전통
21.4. 세례: 다양한 전이해와 해석의 문제점
22장 종말론: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해석학적 의미의 지평
22.1. 네 가지 해석학적 출발점: 약속, 공동체, 새 창조, 묵시
22.2. 추가된 세 가지 해석학적 지평: 소망, 기대의 문법, 시간-파루시아의 "임박성"
22.3. 부활에 관한 언어의 해석학: 부활의 실존 양식
22.4. 파루시아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논쟁적 해석
22.5. 시간의 변혁, 그리고 약속된 영광의 누림에 대한 상징
참고 문헌
인명 색인
성경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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