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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김진혁 - 신학 공부(질문으로 푸는 조직신학1, 하나님과 세계)

by 카리안zz 2020.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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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나는 조직신학에 대해서는 아직도 감이 잘 잡히질 않는다. 조직신학에 대한 책을 많이 못 읽은 것도 한 몫한다. 그런 나에게 가장 적합한 책은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일단 이 책은 설명일 참 잘 되어 있다. 이런 책의 느낌은 정성욱 교수의 <티타임의 나누는 기독교 변증>이 있다. 정성욱의 책보단 김진혁의 책이 조직신학의 틀이 더 잘 잡혀있다. 

 

왜 신학을 공부하는가?

 저자는 왜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초반부터 설명을 한다. 저자의 설명은 참 잘한다. 그 이유는 비유를 곁들여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왜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했을까? 

 

요즘 TV를 켜면 건강에 대한 프로그램이 많이 나온다. TV에 나온 의사들은 우리 몸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설명을 한다. 그리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생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도 조언한다. 사실 이런 건강 정보를 얻기 전에도 많은 사람이 하루하루 잘 살고 있다. 심지어 의사의 당부를 전혀 지키지 않음에도 건강하게 잘 사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는 매사에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고 조심하게 하는 건강 염려증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전문가가 준 정보는 몸을 이해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또한 적은 노력으로도 더 건강해지도록 효율적인 운동법을 찾게 해줄 수도 있으며, 잘못된 생활이나 식습관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게다가,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주변 사람이 건강해지게 도와줄 수도 있다.
신학의 역할과 기능도 이와 유사하다. 몸에 대한 지식 없이도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있듯, 신학을 모르고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건강에 대해 넘치는 지식이 건강 염려증을 불러 일으킬 수 있듯, 너무 많은 신학적 지식은 간혹 지루한 논쟁이나 추상적 사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간에 대한 지식 덕분에 우리가 간의 기능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간을 건강하게 관리할 가능성이 높아지듯, 하나님과 인간, 교회, 구원 등에 대한 적절한 지식은 그리스도인으로 더 충실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학은 교리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실천적 지식에 가깝다 할 수 있다. (27-28)

 

 이렇게 저자는 설명을 참 잘 한다. 이 외에도 바로 그 다음 하는 이야기가 '신학은 목회자나 신학자만 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본인의 유치부 시절이야기를 하면서(29) 설명을 잘 한다. 

 

삼위일체란?(96-115)

 가장 궁금해할 수도 있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저자의 설명을 요약해 보려고 한다. 일단 저자는 '셋은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라는 것은 인간 지성과 언어를 뛰어넘는 신비라고 말한다(97). 일단 삼위일체의 발전 과정을 살펴 보자.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170년경 안디옥의 테오필루스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를 함께 지칭하면서 사용한 triados라는 단어이다. 그러나 2세기 중엽부터 삼위일체론이 쓰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직까지 삼위일체론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적' 연합을 논하는 신학적 사유나 언어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99). 

 논의의 기초를 다진 사람은 라틴계 신학자인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이다. 그가 사용한 라틴어 표현 trinitas(삼위일체)나 tres personae, una substantia(세 인격과 한 본질) 등이 그리스어로도 번역되면서, 로마제국 동편과 서편에서 삼위일체론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 설명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고 이단의 공격과 유혹에 대응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99). 그러나 부정적인 면도 있다. 발전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된 철학적, 문화적, 정치적 개념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그렇기에 어느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삼위일체가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지고 난해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왜 초대교회 교부들은 성서에도 나오지 않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붙들고, 불가능한지 알면서도 이 신비를 설명하려는 '신학의 모험'을 감행했을까?(100) 저자는 성서가 증언하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 패턴이 삼위일체적이었고 그들이 경험한 신적 존재가 추상적 '하나'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어서 인간의 지성과 언어의 한계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무모한 도전을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렇기에 인간 스스로 만들어 냈고 불가해한 황당한 이론이 아니라, '계시'의 빛 아래서 인간 지성이 오랜 숙고의 시간을 통해 만들어 낸 종교적·사상사적 도약으로 보아야 하지 않냐고 묻는다. 

 웨인 그루뎀은 성서가 비록 삼위일체론을 교리적으로 제사하지 않더라도, 이 교리의 핵심 뼈대를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1) 하나님은 삼위(three persons)이시다. 

-요 17:24; 마 28:19; 롬 8:26-27 등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fully God)이시다. 

-요 1:1-4; 고전 3:16; 시 139:7-8 등

(3) 하나님은 한 분(one God)이시다.

-신 6:4-5; 고전 8:6 등

 

무엇이 삼위일체가 아닌가? 

 위의 개념을 인간의 지성에 맞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많은 오류들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삼위일체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삼위일체 이단들을 잘 살펴보면 어떤 이는 '셋'을 더 강조하고, 어떤 이는 '하나'를 더 강조하였다. 전자의 극단적 입장이 '삼신론'(tritheism)이라면 후자의 극단전 예가 '양태론'(modalism)이다. 이 예들은 오늘날 심심찮게 우리에게도 들려진다. 

 양태론은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드러나는 세 모습 혹은 양태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설교에서 흔히 듣는 액체 상태의 물과 얼음과 수증기가 다 H2O이듯 하나님도 세 분이라는 설명이 양태론의 대표적인 예다. 한 남성이 가정에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로 나타난다는 예도 양태론적이다. 

 삼신론은 간단히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독립된 신성이고, 이 셋을 통칭하여 하나님이라 부른다는 주장이다. 교회에서 많이 쓰는 예 중에 계란이 껍데기, 흰자, 노른자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듯 하나님이 셋이라는 설명이 삼신론에 가깝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비교 종교학자들이 주로 그렇게 주장하는데 힌두교의 창조신 브라흐마, 보존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가 통합되어 일체화된 신을 이룬다는 트리무르티 교리도 얼핏 보면 삼위일체와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과 사귐, 역사 속에서의 활동 등에 대한 가르침에 깊게 들어가 보면, 두 종교 사이의 차이가 뚜렷이 보인다. 

 그외에도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이 아니라 성부보다 '열등하다'고 보기 때문에 생긴 이단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리안주의'다. 아리우스를 따라 급진적 유일신론적 입장을 취하여 오직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성자가 다른 피조물보다는 우월하더라도 여전히 성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일 뿐이라고 봤다. 

 양자설은 인간인 나사렛 예수가 특정 시점에 신적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나사렛 예수는 원래 피조물 인간 중 하나인데, 세례 때 성령을 받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 1:11)라고 성부의 인정을 받으면서 신적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설명들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인간의 이성'에 적합하게 만든 설명이나 이미지에 고착하게 되면 오히려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리게 될 위험이 있다. 삼위일체라는 가장 깊은 신비를 마주하게 될 때, 단순화의 유혹을 피하고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가장 중요한 자세라 할 수 있다(105).  

 

 삼위일체의 신비를 풀어내는데 성 빅토르의 '리샤르'라는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샤르의 논증 구조는 뜻밖에 단순하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완전하시기에 그 '사랑도 완전'하다.
(2)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사람이 완전하지 못하면, 그 사랑도 완전할 수 없다. 그렇기에 완전한 사랑은 동일하게 완전한 인격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3) 사랑에서는 기쁨이 솟아난다. 하지만 사랑의 기쁨을 자기들만 향유한다면 그들은 이타적 존재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완벽한 사랑은 이타적이기에 기쁨을 둘의 관계를 넘어서까지 누군가와 나누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흘러넘치는 기쁨'을 받고, 그 기쁨을 풍성히 만들어 줄 세 번째 완벽한 존재가 있어야만 '완전한 사랑'이 성립될 수 있다. 즉, 완전한 사랑은 논리적으로 완전한 존재 셋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108)

 리샤르의 삼위일체 구조는 단순한 것 같지만 '완전한 사랑'의 개념으로 풀어내기에 그 통찰은 심오하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추상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이면서도 역동적이다. 신과 인간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인격'(person)은 홀로 떨어진 섬처럼 고립된 '개인'(individual)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존재의 근원적 '관계성'과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기쁨'이 인격을 구성한다. 또한, 리샤르는 완전한 사랑이 가진 '삼위일체 논리'를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나-이웃'의 삼중적 관계의 필연성도 보여 준다. 완전한 사랑인 하나님은 그 사랑을 나눌 자기 밖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나'와의 사랑의 관계가 은혜로 형성된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발현된 기쁨은 둘의 관계에 함물되지 않고, 이 기쁨을 나눌 제삼자인 '이웃'에게로 흘러간다(109-110).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삼위일체론이 사변적인 교리로 봐서는 안 된다(111).

 

삼위일체론과 송영

 "옥시린쿠스 찬가에서 삼위일체께 영광을 돌리고자 침묵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눈을 감고 침묵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눈을 감고 침묵 속에서 이 아름다운 찬가의 가사를 되새겨 보면, 시공간을 초월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초대교회 교인들과 하나 되는 연대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초대 교회부터 강조되었듯 삼위일체론은 그 본질상 신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송영(doxology)임을 이 찬양 덕분에 다시 확인하게 된다"(114). 

 정리하자면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림과 함께,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알아야 하고 우리가 어떻게 신앙을 가지고 성숙해야 할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을 인간 지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인정하고, 그분의 구원에 바르게 참여하고, 성부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성령 안에서 닮아 가려 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론을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이 누구시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을 삶에서 발견하고, 그 사역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이자 지향점이다"(114-115). 

아쉬운 점

 이 책이 아쉽다기 보단 이 책 이후에 나온 김진혁 교수의 책이 참 아쉬웠다. 이 책 이후 김진혁 교수는 <질문하는 신학>(복있는사람)이란 책을 냈다. <신학 공부>를 재미있게 봐서 <질문하는 신학>역시도 구입을 했다. 그런데 구입을 하고 나니깐 1부의 내용이 <신학 공부>의 내용이더라. 왠지 책을 두번 산 느낌이었다. 지금은 <신학 공부>를 팔지 않는데 뭔가 참 기분이 찝찝했다. 

 

나가면서

 그럼에도 이 책은 참 좋다. 이후의 내용이 <질문하는 신학>에서 나오니 그 책을 봐야할 듯하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읽어도 참 좋을 듯하다.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적혀있다. 조직신학 기본으로 하기에 좋지 않을까 싶다. 다니엘 밀리오리의 책을 조만간 읽으려고 하지만 이 책을 곁에 두고 읽으려고 한다. 추천한다! 


 


책 맛보기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낙원에서 가지고 있던 언어의 힘을 되찾는 계기와 장소가 필요하다. 과연 그런 이상적인 사건과 공간이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성서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첫 인류에서 선물로 주었던 언어의 힘이 진정한 예배를 통해 회복된다고 증언한다. (174)


무엇보다도 새 창조는 만물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계시되는 창조의 목적이요, 피조 세계 전체의 갱신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성서적 의미에서 종말은 단순히 원래 창조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175)


성서는 하나님은 역사에 참여하심으로써 인간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며, 심지어 그 아픔의 무게를 함께 지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252)


질문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풍성해지고, 미지의 영역을 향한 상상력도 확장될 것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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