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처음 보는 저자였지만 사고 보니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를 쓴 사람이더라. 그 책을 한 챕터 읽었지만 재미있었다. 대신 사고 보니 책값이 굉장히 비쌌던 기억이... 여튼, 그래서 반가웠고 이 책 역시 재미있고 유익했다. 그는 신학의 의미를 묻는다. 그 물음이 더 와 닿았던 건 그가 일본인이라는 점이다. "비그리스도교 세계와 마주했을 때 '신학 따위는 필요 없는 것 아닌가?'" 그가 마주한 물음이다. 일본과 한국 철저히 비그리스도교 세계인 곳에서 과연 신학은 의미가 있을까? 부제에 달려 있듯이 그는 사회사를 오가며 그 의미들을 찾아간다.
일본 저자들의 책은 가독성이 높다. 이 책은 예전에 사사키 아타루의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과 비슷했다. 같은 문화권이라서 그런가? 번역을 잘 해서 그런가? 모르겠지만 한 번 읽으면 잘 물리지가 않는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이 책을 팟캐스트 <금요일, 책에 빠지다>에서도 한 분이 나랑 똑같은 얘기를 해서 놀랐다.)
내 신학의 관점에서 동의되지 않는 부분
신학에 관한 좋은 인문서라고 볼 수 있지만 다 동의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수에게도 일정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예수 자신이 세운 신학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나름대로 해석을 가한 뒤, 복음서라는 그릇에 기록해 남긴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이라는 점, 둘째, 설사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과 예수의 신학이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전한 가르침의 목적은 학문을 정초 하거나 종교를 수립하는 데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토모야키는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론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당대 사회와 종교 제도를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40)
물론, 신약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견해다. 그렇기에 복음주의권 학자들의 견해들이 이러한 견해들에서 방어해 준다. 하나님 나라 관점이든 선교적 관점이는 성경의 상호간본문성은 예수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고 행동했는지 우리에게 가장 적실하게 알려준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냥 본인들의 정황에 맞추어 예수의 말을 재해석한 것이 아니라 구약 역시도 가져왔다. 구약의 반향이 에코가 울림이 있다. 독일에서 전공해서 그런지 몰라도 복음주의권에서 논의되는 목격자들의 증언이라던가, 구술문화에 대한 신뢰성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는다. 앞의 논의들이 신학 메인계에서는 그렇게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래서 일라나?
도울 김용옥의 <마가복음> 강해를 들었다. 그가 서두에 양식비평과 편집비평을 언급하는 걸 들었다. 그전에 개신교는 대한민국에서만 유행하는 거라는 그의 말에 공부를 안 하는구나 싶었다. 남반구 기독교가 유럽의 기독교인들을 넘었고 이는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주요하게 하는 말이다. 기본적인 책들만 읽었어도 그런 말들은 안 할 것이다. 아마 자신의 영역 외에는 공부를 안 하는 것일까? 그리고 비평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었다. "기억과 전승"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서 지금 논의되고 있는 학술까지 언급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보컴까지는 몰라도 사무엘 뷔쉬코그는 그리 무시될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D. A. 카슨의 <요한복음> 주석을 추천한 도울 김용옥이기에 지금 논의되고 있는 "기억과 전승"에 대해서 잘 살펴서 언급해주는 성실함까지 갖추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 논의가 메인 스트림에서까지 언급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곳에서 언급 안 하기에 도올 김용옥이 강의 때에 언급 안 할 것일 수 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이 이유는 사실 오스 기니스의 <르네상스>에서도 비슷하게 말했고 김용규의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에서도 비슷하게 말했다고 팟 캐스트에서 들은 것 같다. 일단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신학의 역사를 기술하며 각 시대에 신학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본 이라면 신학에 대한 앎이 적어도 유럽의 역사, 그리고 오늘날 유럽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모르면 유럽을 알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이다. ... 그렇기에 유럽을 알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아는 것은 비유럽 세계에 사는 이들에게만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 모든 현대인에게 주어진 과제다.
... 다만 신학을 앎으로써 유럽이나 미국이라는 세계를 이해할 가능성이 조금 더 생긴다면 그것은 그 세계의 '심층 구조'에 관한 것이다. '심층 구조'라 하면 막연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기만 남극에 떠다니는 빙산을 떠올려 보라. 빙산은 해수면 위로 보이는 부분보다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몇십 배, 몇 백 배는 더 크다...
신학을 안 다는 것은, 이러한 수면 아래 있는 얼음의 세계, 사회의 심층 구조, '눈에 보이는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이다. (188-189)
서구의 역사는 기독교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역사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나 일본이 가지고 있는 국가 시스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민주주의가 서양에서 왔다. 그 기저를 알려면 역시 신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도 그렇고. 저자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다양한 사회 조직, 배심원 제도와 같은 법제도, 인권이나 연방제, 끊임없이 연구되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및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 등은 서구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및 그리스도교 신학과 밀접한 연고나을 맺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러한 요소들, 문제들을 단순하게 그리스도교적 가치관과 묶거나 그리스도교적 기원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별다른 효용이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가치관이나 제도를 돌이켜보고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그 설계도와 역사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신학은 현대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191-192)
저자는 인류 역사에서 신학은 무용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다. 오히려 신학을 공부함으로서 현대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나가면서
우리는 신학을 너무 우습게 본다. 내가 자란 전통에서도 그런한 분위기가 있다. 물론 공부를 해보니깐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신학을 포기하고 뇌피셜로 접근할 때 무수히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난다. 이미 우리는 그 몸살(?) 아니 어쩌면 암(?)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부제가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이다. 부제의 제목처럼 시대별로 잘 정리가 되어 있어서 더더욱 유익했다! 특히 기독교 전통에서 우리가 왜 신학을 공부해야 하고 신학이 어떤 효용이 있을지 궁금한 사람은 꼭 보길 바란다. 막연히 생각했던 부분에 저자는 살을 잘 입혀주었다. 사회사를 통해!
메모
바르트는 일종의 특례로, 촉탁교수의 업무 영역으로 이 수업을 맡았고 신학부 입문 강의로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진행하는데, 훗날 이 강의 내용을 정리해 출간한 책이 바로 <개신교 신학 입문>이다. (23)
- 이 책이 등장한 배경을 잘 설명해 준다. 아마 <개신교 신학 입문>이 복있는사람에서 나온 바르트의 <개신교신학 입문>일 것이다.
그 와중에 히브리어로 '야훼'라고 읽었던(그렇게 읽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하느님(신)의 이름은 그리스어 '테오스'로 번역되었다. 하르낙은 바로 여기에, 하나의 문화권에서 탄생한 종교가 다른 문화권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와 전환에 주목했다. ... 원래부터 헬라 문화권에서 '신'(하느님)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미 쓰이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야훼'가 단순히 '테오스'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야훼'가 '테오스'라는 문화로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과 '테오스'로 번역된 '야훼'를 듣는 사람은 '테오스'가 원래 갖고 있던 의미와 '야훼'라는 또 다른 신의 의미 모두가 결합된(혹은 혼합된), 전혀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다. (59-60)
- 성서의 단어들은 구약의 맥락을 살리지 못하는가?(확실히 나와는 다른 신학관을 가지고 있다. 나는 구약을 맥락 아래에서 헬레니즘의 맥락이 포개어져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구약의 맥락이 가장 큰 기준이며 잣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전서 3장 16절) 이 구절에서 래리 허타도는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에서 구약을 그토록 강조하고 교육하기에 힘썼다고 말했다. 저기에서 모든 성경은 지금처럼 완성된 성경이 아니라 구약 성경을 말한다. 어느 주석에서는 아마 구약 성경과 예수에 대한 몇몇 기록들이라고 본 기억이 있다. 구약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신약의 언어를 읽어내기에 힘들 거라는 허타도의 말에 동의한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정부는 오늘날 장례 회사와 같은 조직을 설립했다. 교회와 결합되지 않은, 죽음을 취급하는 전문직으로서 장의사 집단을 별도로 키운 것이다. 이들은 장의를 세속적인 업무로 다루었기에 이것이 확장되면 교회의 힘은 약해지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교회의 가르침과 명령을 따를 명분 역시 약해질 것이 분명했다. (145)
- 저자의 그럴 듯한 설명인가, 아니면 근거 있는 설명인가?
리츨에게 그리스도교의 본질, 계시의 의미는 예수에게 인격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신학이 이 예수의 인격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이 인격에 사람들이 감화받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이 시대에서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 분명 고도의 도덕성은 리츨에게 있어 종교의 궁극적 귀결이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신학은 윤리화 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일정의 '시민 윤리'가 되었다. (152)
- 이것은 실험관찰 할 수 있으니까?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되는 것 아닐까?)
미국 사회에 흐르고 있는 청교도 DNA는 미국이 자유 경쟁의 나라라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은 경제 활동은 물론 교육, 정치 등 모든 영역에 경쟁 원리가 반영되어 있다. 모든 영역이 일종의 시장이기에 미국인들은 국가의 영향력이 배제될수록, 민간단체들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될수록 좋은 사회,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독점을 없애고, 관리를 최소화하는 것, 그리하여 시장이 생기고 그 안에서 경쟁을 유도하는 것, 이를 '민영화'라고 부른다. (167-168)
- 신자유주의는 청교도로부터?(지난 주 20년 3월 15일 주일 설교 내용이 전 영역의 시장화였는데 사실은 이 뿌리가 저자의 설명으로는 청교도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이 부분은 공부해볼 여지가 있다.)
책 맛보기
대다수 사람은 신학의 제 분야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는 일, 혹은 바르트식으로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에 낯설어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신학이 왜 필요하게 되었는지, 신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 왜 신학이 필요한지를 본격적인 '입문'으로 다루는 것이 더 온당한 방식이 아닐까 싶다. (27)
이 책의 목적은 신학이 어느 정도 '필연성'을 지니고 전개되어 온 과정을 살핌으로써 그 '필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데 있다. (34)
마찬가지로 시대별로 신학이 놓인 사회 상황을 분석하면 신학에 영향을 준 시대정신의 특징이나 지배적인 사상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 점에 주목해 신학이 과거에 무엇으로 존재했는지, 그리고 현재는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살피려 한다. (36)
좋게 보면 시대정신에 호응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시대 자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잃은 채 시장을 지배하는 익명의 대중에 호소력을 발휘하기 위해 시장에서 유행하는 사상이나 조류를 별다른 고민 없이 남용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시대가 보수화하면 이에 응하는 '고전적인 정치적 자유주의를 뒷받침하는 신학'을, 진보화하면 해방신학의 개량판을 내놓는 것(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해체' 담론이 유행하면 '해체 신학'을 말하며, 현상학이 다시금 유행하면 신학도 현상학으로 회귀해 쓰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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