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리뷰/인문

[책리뷰] 김응교 -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by 카리안zz 2020. 1. 26.
반응형

느낀 점

 이 책을 읽었을 때가 29살이었다. 마침 윤동주가 그쯤 살았다더라. 윤동주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왜 이 책을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페친이었던 김응교 시인의 글들을 봤기 때문일까? 이 책은 아직까지 나에게 따뜻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읽은 책은 아니었지만 설교때도 종종 인용하고 작년 교회 강의에서 윤동주 <처럼>을 내 나름 요약해서 강의하기도 했었다.(강의문은 밑에 적어두겠다.) 

 

 아마 영화 동주도 나오고 그때 좀 윤동주에게 필이 꽂혔나 보다. 영화에선 문학을 가지고 논쟁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송몽규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문학을 이용하려고 했고 윤동주는 문학 그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보았다. 강창래가 이어령과 대화하고 그에 대해 쓴 책인데 <유쾌한 창조>에서 김수영과 이어령의 논쟁이 그랬다고 본 것 같다.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이라고 하려나. 기독교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다. 현실참여 vs 개인영성 간의 논쟁? 요즘은 잘 안 보이는 거 같은데 그런 류의 논쟁이 예전에 좀 있었던 듯하다. 둘 다 중요하지만 무엇이 먼저인가 가지고도 논쟁을 하는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은 <처럼>인데 윤동주의 가장 핵심적인 시인 <십자가>의 한 행 "처럼"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조사만으로 된 시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영어, 일어, 중국어에서도 말이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윤동주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다. 그것도 책을 처음 읽었던 당시의 나이와 비슷할 때여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글귀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문장이 더욱 그랬다. 내 나이 20대 후반은 생명력이 넘치던 때여서 타오르던 때여서 죽음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와 같은 나이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다. 

 

'아, 윤동주는 종말을 기다렸다면, 우리는 종말이 있다고 외쳐야 하는 구나'

 

그때 들었던 생각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영원한 것 같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찬란한 시대이니까.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처럼. 어둠이 일상이던 고대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시대. 빛이 영원히 있는 시대.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걸 살고 있는 시대. 그러나 그 빛이 정령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그 빛일까. 도시의, 문명의 빛이 진정 어둠을 이긴 것일까. 

 

"빛은 어둠을 이길 수 없다."(요 1:5)

마지막은 있다. 끝은 있다. 이것을 나는 설교단에서 외쳐야 하는 사람이구나!

 

여튼, 이 책! 윤동주의 교회생활도 얼핏 그렸는데 친근한 주일학교 교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윤동주가 계속 살아있었더라면 공동번역 시편을 윤동주에게 맡겼을 거라고 그의 친척인 문익환 목사님이 말했다. 참 아쉬운 대목이다. 윤동주가 번역한 시편이라니!

 

책의 전개는 윤동주가 쓴 시를 순서로 전개를 해 나간다.

 

이 책 강력 추천한다! 

 

 

 


 

 

<신앙을 읽다> 윤동주 편 (김응교 시인의 처럼 요약)

 

드디어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윤동주를 살펴 보겠습니다. 윤동주는 만으로는 27년 2개월 횃수로는 29년을 살았습니다. 서른도 채 살지 못했지만 시인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한 명입니다. 마지막 시간, 그의 삶과 시, 그리고 엾게 보이는 그의 신앙을 추적해 나가겠습니다.

 

윤동주는 만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만주국 안에서 명동마을이라는 곳(함경북도 바로 위쪽)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만주는 지리적으로도 중국의 주변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았던 다민족 지대이기도 했습니다. 한반도, 러시아 등 다양한 민족의 디아스포라들이 합쳐져 혼종적인 주민 집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중국인들에게 보이지 않던 쓸쓸함이 그들에겐 있었습니다. 윤동주는 이런 쓸쓸함이 있는 만주에서 태어난 조선인 디아스포라(흔터졌기에) 였습니다. 그렇기에 윤동주의 모든 시에 숨어 있는 귀중한 욕망 한 가지는 조국을 찾는 고향의식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윤동주가 1939년(22살)에 쓴 <종시>에서 그 의식이 잘 보입니다.

 

만주의 특징이 주변성, 디아스포라, 혼종성으로 볼 수 있는데 윤동주가 나고 자랐던 곳은 이 특징을 다 담아내지는 않았습니다. 흩어지긴 했지만 같은 민족인 조선인들만 모인 마을이었고, 민족문화를 중시하는 특수한 공동체였습니다. 그 공동체가 바로 명동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의 특징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라고 합니다. 봄에는 온갖 꽃이 피고, 여름에는 싱싱한 전원, 가을에는 황금색 전답, 겨울에는 은색 찬란한 설야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합니다. 윤동주와 같은 마음으로 자란 김정우 시인은 그 도시를 "꽃과 향기 속에 파묻힌 무릉도원"이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명동마을에서 살면서 윤동주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있습니다. 김약연이라는 사람입니다. 김약연은 윤동주뿐만이 아니라 당시 윤동주 또래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던 분입니다.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삼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오빠가 바로 김약연이었죠. 이분은 조선 말기 사회에 더이상 희망이 없음을 발견합니다.... 아쉽게도 이 명동학교와 은진중학교의 출신들은 일제시대때 핵심적인 독립운동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김약연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음이 참 안타깝스비다. 

 

윤동주는 미션계 교육기관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합니다. 송몽규, 문익환이 함께 입학했던 그해 4월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감했습니다. 이 시기 윤동주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자신의 첫 시를 씁니다. 바로 그 중의 하나가 <초 한 대>입니다. 1934년 (17세) 12월 24일이 창작일로 써 있습니다. 

 

초 한 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같은 논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윤동주, <초 한 대>

 

이 짧은 시 속에서 우리는 열일곱 소년의 순수함과 그가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일관하는 윤동주의 정신의 시작을 보게 됩니다. 레위기 4장 24-29절, "그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지니 이는 속죄제라... 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를 윤동주는 읽었을 것입니다. 

이 시가 "1934년 12월 24일", 곧 성탄절 전날에 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불살라 소멸하는 제물인 초 한 대처럼, 12월 24일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물과 피를 모두 쏟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날입니다. 염소의 갈비뼈 역시 구약시대의 속죄제물입니다. 이쯤에 이르면 "염소의 갈비뼈" 이미지는 속죄양이 되었던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중첩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촛불=제물=예수'라는 등식을 알 수 있습니다. 

윤동주의 첫 깨달음은 단순한 인식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촛불=제물=예수'에 자기 자신을 겹쳐 살아가려 했습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 사학년 때 쓴 <십자가>를 보면, 자신을 '초 한 대'로 삼아 괴물 같은 어둠 속에서 "생명인 심지까지" 자신을 불살라버리려 했던 모습들이 보입니다. 

 

윤동주는 1935년(18살)에 숭실중학교로 삼학년 이학기에 편입을 합니다. 이 해 12월에 썼던 시가 <조개껍질>입니다. 이 시는 "12월 봉수리에서"라고 메모되어 있습니다. 이를 추측해본다면 당시 봉수리의 주일학교와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봉수리의 주일학교에서 교장을 맡고 있던게 문익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둘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왔던 터라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윤동주가 친구 문익환이 봉사하던 봉수리 겨회에서 성경학교를 도우며 아이들과 놀 때 얻었던 '조개껍질'을 갖고 시로 썼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당시 숭실중학교에서는 교회 출석과 봉사뿐만 아니라 순회 전도활동을 의미로 하고 있었기에 더욱 신빙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신앙심 깊던 이 아이에게 신사참배라는 큰 어려움이 닥치기도 합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시에 그 흔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숭실중학을 자퇴한 뒤, 친일 학교인 광명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때를 윤동주 시인은 "냉침을 거지로 삼키"는 괴로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라던 연희전문에 입학한 윤동주는 새로운 길에 대한 약간의 기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서 세상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는 윤동주의 모습도 보입니다. 윤동주의 <이적>이라는 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도의 형식으로 쓴 이 시에서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예수님이 물 위로 걸으신 것이 기적이 아니라 "내사"(나야, 나와 같은 것의 겸손한 표현) 그저 호숫가에 불리어 온 것이 "참말 이적"이러고 합니다. 나처럼 부족한 존재를 부르는 이도 없는데 이 호숫가로 불리어 온 것이 "참말 기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욕망이 자꾸만 "금메달처럼 만져"지니 이 모든 욕망을 "물결에 써서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파도치는 호수로 불러 세워달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한 것이지요. 

그런데 새로운 길에 대한 의욕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조선의 비극을 직접 목도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1939년(22살) 9월 이후 1940(23살) 12월까지 그는 시를 남기지 않습니다. 이 침묵의 기간에 대해서는 정병욱이라는 그의 후배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시기 둘은 영어 성경을 함꼐 공부했었습니다. 정병욱은 윤동주에 이끌려 "주일이면 영문도 모르고 교회당"에 가야했습니다. 이 모임은 연희전문학교 종교부장 교수로 활동했던 케이블 선교사 부인이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단순히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어 성경반이 끝나면 반드시 그 의미에 대해 대화하고 싶어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윤동주가 좋아했던 것 같은 여학생도 목격합니다. 또한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앙생활에 대해 구체적인 증언을 남겼습니다. 

그렇다고 윤동주가 늘 소극적인 신앙이지는 않았습니다. 교인인 척하면서 세속적인 사람을 비판하기까지 했고, 속물들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침묵의 시간을 깨고 1930년(23살) 12월 드디어 시를 씁니다. <팔복>이라는 시입니다. 젊은 식민지 청년 윤동주는 해방이란 아마득한 꿈과 말과 이름을 뺏기고 신사참배를 하며 비루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여덟 가지 복된 삶의 유형을 나열할 필요도 없이 '슬픔'이란 단어 하나야말로 모든 결핍을 묶어낼 수 있는 기호였습니다. 조선인은 '슬퍼하는 자'였을 뿐이었죠. 

적극적인 행동에 나설 수 없었던 윤동주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연희전문학교 사학년이던 1941(24살) 9월 31일에 쓴 <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길을 가는 것은 저쪽에 존재해 있고, 아직도 남아 있는 가능성의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의 목표의식은 확연합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찾는 길에 나서는 겁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는 다짐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윤동주의 대표 시 <서시>를 보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여기에서 주목해 봐야 할 구절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구절은 앞서 팔복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침묵의 기간을 깨고 그 일 년 뒤 1941(24살) 이 시가 써졌습니다. 윤동주에게 "모든 죽어가는 것"이야말로 팔복에서 쓴 슬픔입니다. 죽어가는 존재, 병들어 가거나 굶주려 죽어가거나 징용되어 죽어가거나, 모든 슬픈 존재들입니다. 어쩌면 독실한 신자였기에 그는 요한계시록 3장 2절 말씀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이렇게 그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삶이며 신앙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마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길을 가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자, 이제 그에게 주어진 길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그의 가장 핵심이 되는 작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십자가에 햇살이 걸리는 풍경은 윤동자가 어릴 때 매일 보았던 장면입니다. 지금도 명동 마을에 가면 교회당 지붕에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2연은 첨탑이 너무 높아 올라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물리적인 걱정이 아니라 십자가에 올라갔던 이가 걸엇던 길을 따르기보다는 외면하고 싶은 심정이죠. 도저히 그 삶을 따를 수 없는 한계를 느낍니다. 3연에 종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신사참배와 전쟁을 강요하는 1940년대의 상황에서 교회는 아무런 희망의 종소리, 예언자의 종소리를 울리지 못한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가자 먼저 가톨릭 교회가 그 뒤로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회, 마지막으로 장로교회까지 신사참배를 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예수님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4연에서 가장 특이한 것이 '처럼'이라는 조사가 한 행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런 시는 없습니다. 예수님'처럼'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렇게 행을 썼던 것이지요. 결국 평생에 그가 고민하고 가야할 길은 바로 십자가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허락을 구한다는 표현에서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고 싶었던 나약한 화자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 허락은 안이하고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맞추겠다는 다짐입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얼마 안 있어 1943년(26살)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됩니다. 그리고 사상범을 다루었던 일본의 특별고등검찰, 소위 그 무시무시하다는 '특고'에 체포되어 심문받았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린다는 특고의 심문에 윤동주가 빌었다든지 구차하거나 심약한 모습을 보인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유약하게만 보이던 윤동주가 이렇게 의연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판결문을 신뢰하자면 윤동주는 보다 구체적인 실천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24살) 11월 20일에 <서시>를 썼던 스물넷의 윤동주는 사 년 후인 1945년 2월 16일 스물여덟이라는 푸른 나이로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집니다. 시에서 보여주었던 다짐처럼 결연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윤동주는 매일 정체 모를 주사를 맞았고, 결국은 뜻 모를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땅에서 괴롭게 죽었으나 그의 시들은 살아남아 어둠 속의 별이 되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기에 그의 삶에서 기독교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정중앙교회 주일학교 유년부 교사였고, 그가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 지어준 <조개껍질>은 이제 교과서에 실려 모든 아이들이 배우는 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성경공부도 했으며 그 성경 공부 모임에 마음에 드는 자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신앙생활과 크게 멀지 않기에 왠지 교회의 가까운 형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신사참배에 저항했고 일본의 미션스쿨에 입학을 하지만 기독교란 이름으로 일본 천황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곧 바로 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끝까지 닮으려고 했고 그 길을 가려고 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동주가 살았던 시대는 종말을 기다렸던 시대 같습니다. 마지막을 기다렸던, 마지막을 너무나 갈망했던 시대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생각합니다. 인간의 빛은 영원할 것처럼 보입니다. 도시의 네온사인이 그렇습니다. 마치 마지막이 없고 영원할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은 종말을 깨워야 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길을 간다는 것이 그 마지막을 깨우는 외침이지 않을까요? 동주가 만난 예수님을 오늘 우리가 만날 때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어떤 길일까요? 다 주어진 길이 다르겠지만 동주처럼 예수님의 길을 걷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강의문 안에 메모와 책 맛보기가 다 있기에 생략하겠다. 목차도 그의 시를 기준으로 하기에 분량이 많아 생략하겠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