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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문

[책리뷰] 송호근 -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by 카리안zz 2020.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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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김영봉 목사님 페이스북에서 였다.

50대 베이비부머(1955~1963년)들을 인생을 담았다기에 언젠가 새벽 기도 설교를 위해 찜해둔 책이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각 선교회별 총회를 하는데 사역자들이 들어가서 설교를 한 편해야 한단다. 

내가 설교하러 갈 요한 선교회는 45-50대 그러니깐 베이비부머들과는 바로 밑인 나이다. 

그래도 그리 세상 살이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이 책을 며칠 안에 다 읽어버렸다. 

 

Ⅰ. 느낀 

 

초중반에 들어가는 시도가 아주 좋다. 대리기사를 하시는 50대 아버지의 삶을 

초점으로 송호근 교수가 하고픈 이야기들을 넓혀 나간다. 

미혼의 미스 박이 짐 싸는 것을 거들었다. 25년 올인했던 직장에서 마지막 짐을 싸는 일은 여름날 홑이불 걷기보다 쉬웠다. 미스 박이 건네준 가방에는 견적서, 시방서, 마지막 결재서류, 그리고 줄자와 먹줄통, 조선의 장인들이 애지중지하던 전통 건축 기구가 들어 있었다. 회사를 나섰다.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햇빛이 눈부셨고, 바람에 나부낀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의 처진한 표정도 스쳤다. 기대에 찼던 부모님의 따스한 표정도 흩어졌다. 여태 땅에 묻혀 살았던 맏형의 거무스레한 얼굴도 스쳤다. 얼룩이는 송아지를 낳았고, 송아지는 다시 얼룩이가 됐고, 얼룩이는 다시 송아지를 낳아 외양간을 채웠던 세월이 스물다섯 번 흘렀던 것이다. 

 

-p. 19

설교에도 인용을 했지만 우리 아버지들은 3가지 짐을 진다고 했다. 

입시(학원비) 지옥, 경제(등록금) 지옥, 결혼 지옥. 

이거 다 뒤처리를 우리네 아버지들이 하신다. 

이렇게 

1장은 저자 본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2장은 같은 또래의 사람들 이야기를 하면서 책을 써나간다. 

3장은 저자의 전공이 빛을 본다. 사회학 교수라서 그런지 대단히 분석적이다. 

1,2장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였지만 3장부터는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 같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펑클의 노래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중 가사 한 구절에서

50대 베이비부머들의 삶을 본다. 

그 가사는 이렇다.

"당신이 이 험한 세상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어줄게요."

저자는 말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1960년대까지 펼쳐진 세상'과 '1980년대 이후의 세계'는 양적, 질적으로 너무나 다르다. 1960년대와 1980년대의 시대적 차이는 여타의 차이보다 크다. 예를 들어,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시대와 환경의 차이를 그다지 못 느낄 정도로 유사한 반면, 1980년대 이후는 도시의 발달 정도, 의식주 환경, 시민들의 의식 성향과 가치관 등에서 새로운 진화 과정에 놓여 있었다. 이미 현대로 들어선 이후의 사회였다. 단순화한다면, 1960년대까지는 근대였고, 1980년대 이후는 현대였다. 1970년대는 근대와 현대 간에 느닷없이 형성된 절벽이었다. 이 절벽을 잇는 가교를 베이비부머들이 '내 몸을 누이는 방식'으로 설치했으며 스스로도 '그렇게 다리가 되어' 1970년대를 넘었단느 말이다. 

-p. 198 

50대 베이비부머들은 소리를 내어서 울지 않는단다. 

우는게 사치라서 그럴까?

우는게 불필요해서 그럴까?

우는게 나약해 보여서 그럴까?

울 시간이 없어서 그럴까?

아니면 

우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까? 

 

나의 아버지도 베이비부머다. 

그 세대의 어느 사람들처럼 아버지도 고생이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난 아버지가 한 번도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모르겠다. 홀로 있을 땐 많이 우셨는지도. 

 

바라건대 

하나님 앞에서는 울었으면 좋겠다. 

그럼 왜 우는지 한번이라도 물어볼거 아닌가? 

우십시오. 시원하게 우십시오. 

그 울음 곁에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할 것입니다. 

 

 

Ⅱ. 메모

 

 교육 열망은 한국인이 세계 제일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왜 그럴까? 선진국 학자들은 자주 그 이유를 묻는다. 답은 간단하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지식인이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사대부, 고관대작, 양반층이 모두 지식인이었다! (p.45)

-계급 상승의 욕망이 아닐까?

 

대선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 대선후보들은 앞 다투어 정년 연장을 약속햇지만, 그걸 곧이듣는 베이비부머 태직자들은 드물었다. 사회학자인 나도 '글쎄'였다. 베이비부머 일자리를 늘리면 청년 일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자리 창출을 대선후보 누구나 일순위로 공약했고, 복지와 무상 혜택에 투입할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 증액을 동시에 약속했다. 청년들에게 괜찮은 일자리를 생산하는 대기업과 재벌은 성토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베이비부머와 자식들은 일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는 형국이다. 베이비부머가 우선 양보하는 것이 순리지만, 자식들 취업을 위해 베이비부머가 우선 취업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 둘에 고등학생 하나를 둔 K 씨는 더욱 그랬다. (p.160-1)

-딜레마

 

1980년 초여름, 사회학과 은사님들 앞에서 대학원생들이 성토대회를 열었다. 광주사태로 상처를 입은 젊은 영혼들은 하소연할 대상이 없었다. 나는 은사님들을 상대로 장문의 성토문을 읽어나갔다. '교수님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나, 문학인들이 시대의 전선에서 싸울 동안 사회학자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계셨나, 지식인의 반역이란 교수님들을 두고 하는 말 아닌가' (p.231)

-주어는 다르지만 나는 목사님들을 넣어서 말한다. "목사님들은 도대체 그때 머하고 계셨습니까. 억압받고 고통 당하고 있을 때 당신들은 멀 하고 있었어요?" 물론 속으로 말이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세상이 훨씬 나아진 덕에 비판 예봉이 꺾인 학생들이 학문 정신을 살려 나에게 던지는 성토문을 낭독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교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청춘 시대의 의지가 우리 세대를 이렇게 현실 벽에 가뒀는가, 아니면 당신의 안위를 위해 반역과 타협의 교묘한 오솔길을 용케도 잘 걸어오셨는가', 뭐 그런 질책 말이다. (p.231)

-너무 이르지만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요즘 내 질문이 부메랑처럼 다가와 내 마음을 때린다. "넌 어쩔꺼니?" 나도 못하니깐 닥치고 순응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나약함을 알고 갈수밖에... 

Ⅲ. 책 속 中

 

양반이 향촌을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봉제사는 충군효친의 규율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격식과 요란한 상차림이 강제됐다. 조상 숭배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이자 봉제사는 곧 가문의 위세 경쟁으로 변했다. (p.59)

 

재워주고 먹여준 공장 생활의 한 달 급료는 공동이 7만 원, 공순이는 6만 원이었는데, 공돌이들은 씀씀이가 헤퍼 근처 식당과 주점에 외상을 지기 일쑤였음에 반해, 공순이들은 아줌마 외판원들이 조달하는 화장품을 구입했을 뿐 월 2~3만 원씩 고향집으로 송금했다. 아마 그 돈은 고향에서 청운의 꿈을 꾸던 동생 학비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하춘화와 나훈아, 남진의 노래가 포장마차와 주점에서 자주 흘러 나왔다. 송창식과 윤형주, 양희은의 노래가 각광을 받았던 캠퍼스와는 대조적이었다. (p.98-9)

 

20년 넘게 애 엄마와 함께한 교회 사람들은 그럭저럭 새로 연 건강원의 단골이 되어주었다.....그만큼 남은 고객관리가 중요했기에, 예배다 봉사다 해서 일주일이면 나흘씩 교회에 나가는 애 엄마한테 큰소리를 내고 싶을 때도 참았다. (p.116-7)

 

아들 친구들 중엔 월급 백 몇 십만 원으로 편모 편부에 동생들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애들이 제법 됐다. 어린 아들이 벌어온 돈으로 어떻게 먹고산대, 정신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했지만, 사글셋방 전전하며 가장 노릇 하는 아들 친구들이 불쌍해서 그 애들을 지베 데려온 날이면 밥 한 그릇이나마 따뜻하게 먹이곤 했다. 그런 애들 볼 때마다 가난한 동네 고갯마루에 2억도 채 안 되나마 세 식구 맘 편히 지낼 수 있는 내 집이 있다는 게 새삼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p.127)

 

퇴직한 사람들을 더 만났다. 한창 일해야 하는 나이의 기술, 지식, 경륜이 쌓일 대로 쌓인 고참 직장인, 이제 성숙의 단계로 접어들어 젊은 시절의 치기를 안주 삼아 술 한잔 느긋하게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을, 그러나 세상이 지시하는 대로 직장에서 밀려나 아직 마치지 못한 부양 의무를 마저 이행해야 한다고 속울음 우는 이들을 말이다. 그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더러 아내가 아프기도 했고, 대학생 자식들이 사회 연착륙을 위해 열심히 출전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 타이른다. 아직은 아니다, 10년은 더 버텨야 한다! 베이비부머의 공동 슬로건이 시시때때로 울려퍼진다. 나는 의기투합한다. 아니 성원을 보낸다. (p.130)

 

어찌 보면 당신의 안식처였던 가족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닐 수도 있다. 가족도 유기체이므로 변화한다. 당신이 돌보던 예전의 가족이 아니다. 이미 성인이 된 자식들은 인생 설계와 연애와 사랑에 몰두해서 퇴직한 부모가 어떤 심리 상태인지를 가늠할 겨를이 없다. 눈치를 챘다 할지라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p.214)

 

이들이 일군 사회적 자산들, 고도성장의 열매를 '사유화'하느라고 (우리 세대 자신을 포함해) 미래 세대를 위한 '공적 자산'을 별도로 축적하지도 못했다는 그 세대적 직무 유기는 젊은 세대로부터 엄중한 성토문을 통보받아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빈약한 복지 제도가 그렇고, 젊은 세대의 사회적 진입 비용을 한없이 올려놓은 것이 그렇다. 베이비부머들이 구축하고 자신이 스스로 갇힌 저 지독한 양극화 구조는 한국 사회 전체에 그대로 증폭되고 젊은 세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음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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