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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문

[책리뷰] 사사키 아타루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by 카리안zz 2020.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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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느낀점

 

일본에서 핫한 인문학자 사사키 아타루!(라고 사람들이 말하길래 나도...잘아는 사람 아님...요)

여러 지면에 이 책에 대한 리뷰가 많길래 눈여겨 보다가

50%할인을 하길래 바로 샀다. 

 

저자는 읽기를 강조한다. 혁명의 시작은 폭력이 아니라 문학이라 강조한다. 

그에대해 루터, 무함마드, 중세해석자 혁명을 열거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문학이 끝났다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철퇴를 가한다! 

아마 지금 일본의 풍토가 그러한가 보다. 

 

이 책은 일기 형식의 글이다. 

"아아, 이번에도 또 길어지고 말았네요. 여름이 되면 힘이 난다고 해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긴 것 같네요. 이 부분은 저로서도 매우 자세히 설명하기에 꽤 힘든 이야기였으니 관대하게 봐주기 바랍니다. 아직도 여전히 이야기가 부족합니다만,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겠습니다. 다음번이 벌써 마지막 밤이니 좀 듣기 쉽다고 할까, 역시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습니다."(p.247)

그래서 내 전공과도 맞물려있어 딴지라도 걸라하면 

굳이 이런 글에 너무 민감한거 아닌가. 라고 생각되더라.  

마음이 사그라들고 좀더 가깝게 다가온다. 좋은 접근 방법인거 같다. 

 

 

이 매력적인 문체에 러시아 문학이 황금기라 여겨졌을때,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 등이 활동했을 그즈음!

몇명에 사람이 글을 읽을 수 있었는가 저자는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단 10퍼센트 이하였다고. 

그런지 지금 21세기 일본에 현실에서 문학이 죽었다고 단언하는 이들에 대해 

저자는 몇 번이고 계속적으로 철퇴를 가한다. 

아! 야전과 영원도 읽고 싶어라. 

번역되기가 기다려지는 책이다. 

 

(그런데 왜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야 할까? ㅠㅠ. 자르면 책 넘기기가 불편한데...허허허ㅋㅋㅋ)

 

Ⅱ. 메모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라항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p.44)

 

- 글쎄. 나는 같은 분야의 여러 권을 읽는게 좋더라. 그래야 이 단어에 그 개념에 익숙해져서 그 글이 보이기 시작하니깐.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니깐 풍성해(물론 헷갈릴 수도 있지만)진다. 그런데 자랑은 하지 말아야지ㅎㅎ

 

"그러나 식자율이 5퍼센트였으므로 많은 이가 읽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루터는 설교의 달인이었고, 그 설교도 민중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루터에 의해 설교는 가장 중요한 의식, 즉 성사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는 역사가도 있을 정도로 루터파 수도사들은 열심히 민중 안으로 들어가 설교를 했습니다."(p.93)

 

-설교가 중요했던 이유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에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않았겠다. 설교가 중요해진 영향으로 계몽주의를 말하기도 한데 어쨋던 이러한 이유를 절대 무시할 수 없겠다. 

 

"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광포한 아버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신의 아들도 아닙니다. 그런 법의 예외고 규칙을 면제받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는 스스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를 죽이는 것에 의해 법이 출현한다는 이치는 무함마드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p.160)

 

-기독교는 법을 확립하기 위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러한 문맥에서 르네 지라르를 한번 소환하고 싶은데 아는게 없네. 빨리 정일권 목사님 책을 사서 읽어야 겠다.

 

"어쨋든 사람은 자신이 새롭다고 믿고 싶어하는 존재고, 자신의 시대를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입니다.(중략). 다만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근대라고 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은지 또다시, 젊은 우리의 시대는 포스트모던이다, 새롭다, 하는 식으로 말하는 건 정말이지 창피해 죽겠습니다."(p.192)

 

-헉! 이 과잉성! 신앙화된 종교다! 그러니깐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믿어야 하는데 이념이랄까? 다른 것에서 넘치는 파토스를 느끼니 상당히 문제가 된다. 직관과 구조주의랄까. 이건 분명 옳지않은 인식인데 직관이라고 오해하기 쉽고 이건 분명 보편적인 견해인데 구조적으로 생성된 생각이고ㅎㅎ 이런 부분을 잘 매듭지은 글 없을라나?

 

"도스토옙스키 등은 10퍼센트 이하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소설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자명한 게 아닙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인들이 99.9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 이 자신감을 보라! 

 

"하지만 가령 우리들 호모사피엔스가 400만 년 산다고 하면, 우리가 탄생한 지 20만 년이 되었으니 앞으로 380만 년 정도는 남 아 있습니다. 400만 년에 20만 년이니까 20분의 1이네요, 여든 살 노인이라고 보면 네 살에 불과합니다. 네 살치고는 상당히 잘하고 있습니다"(p.291)

 

-앞에서 계속 역사와 시간을 의인화 했는데 너무 계속하니깐 별로다. 한 번은 괜찮은 거 같은데. 

 

 

 

Ⅲ. 책 속 中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명령을 모으는 일입니다. 언제나 긴장한 채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누군가의 부하에게, 또는 미디어의 익명성 아래에 감추어진 그 누구도 아닌 누군가의 부하로서 희희낙락하며 영락해가는 것입니다. 멋지네요.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요. 자신이 틀리지 않다고 믿을 수 있을 테니까요. (p.23)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p.24)

 

꼴사납게도 정보에 토실토실 살이 찌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비평가가 될 것인가, 초라하게 자기 진영에 틀어박혀 비쩍 말라가는 전문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각 자리에 어울리게 그 두개의 가면을 재빨리 교체하며 살아갈 것인가.(p.25)

 

읽어도 전혀 모르겠다,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지루해서 왠지 싫은 기분이 든다고 하는 것, 다들 뭔가 자신의 능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화를 내거나 책을 내팽개치거나 하는 것입니다. "번역이 나빠"라고 한다거나 "좀 더 쉽게 쓰란 말이야"라며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좀 더 공부해야겠는걸", "좀 더 쉬운 책은 없을까"라든가, 초급이 있어야 중급이 있고 중급이 있어야 상급이 있다는 듯한 지의 서열 문제로 생각합니다.(p.41-2) 

 

한마디로 하지요.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p.75)

 

예컨대 1506년 수트라스부르크 주교가 된 빌헬름 폰 혼슈타인은 28년의 재임 기간 중 놀랍게도 고해나 설교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15세기 후반 마인츠 대주교였던 디터 폰 이젠부르크가 미사를 집전한 것은 평생 한 번뿐이었습니다. 도대체, 돈을 위해 주교가 된 남자가 자기 교구의 부정이나 범죄를 밝혀 낼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처음부터 위로부터의 강합적 명령으로 인한 부수입에, 그 안일함에 푹 빠져있었습니다.(p.77)

 

책일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p.85)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p.114)

 

다시 말해 어떤 여자와 어떤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일단 태어난 이상 항상 공적이라고 선언하는 역할입니다. 이 아이는 이미 법적인격을 부여받은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이 아이의 존재는 이미 법에 의해 보증되어 있으며, 아무리 그 아이를 낳은 어머니라도 아버지라도 결코 '처분'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아이의 존재를 '등록'함으로써 '보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선 원칙적으로 국가, 교회, 종교라 불리는 것의 중대한 역할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다는 것입니다.(p.201)

 

중세 해석자 혁명은 '혁명의 본체'를 드러낸 혁명입니다. 다시 말해 법학자의 택스트 고쳐 쓰기의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척 담담하고 전혀 극적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혁명의 위대함이니까요.(p.212)

 

그것은(중세 해석자 혁명) 근대라 불리는 시대를 절대적으로 도래하게 한 혁명이었습니다. 국가, 주권, 법, 정치뿐만 아니라 온갖 측명에서 우리의 세계를 '초기 설정'한 혁명이었습니다.(p.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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