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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공부흔적

존 하워드 요더 - 근원적 혁명 1장 요약

by 카리안zz 2020.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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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원적 혁명 요약

 

 복음이란 헬라사람들의 의미로는 개인적 차원의 용어가 아니다. 그들에게서 복음은 전쟁의 승리 소식, 왕에게 아들이 태어나 한 세대 동안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즉, 복음은 질서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질서를 듣고 따를 것인가? 예수의 시대에서 한번 찾아보자.

 

 

예수 시대에 예수가 택할 수 있었던 네가지 길.

 

1. 현실주의 노선: 이 노선을 따르는 자들은 정의와 변혁을 위해 노력했으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로마 점령의 사회 체제를 수용하고 노골적으로 승인하였으며, 그 체제하에서 살아았고 이익을 챙겼다. 이 노선의 결국 기득권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헤롯당, 사두개인)

 

 

2. 정의로운 혁명적 폭력노선: 로마인은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을 맞선다는 표현인 성전을 다름 아닌 무력 행사로 이해했고, 이에 이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무력으로 맞섰다.(열심당)

 

 

3. 광야: 상당한 규모의 집단은 구약 성서 본문을 충실하게 필사하는 일과 일부 세계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채 랍비의 규율에 문자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았다.(에세네파)

 

 

4. 적합한 종교: 바리새파는 도심에 살았지만, 광야의 분파들처럼 순전하고도 분리적인 삶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분리주의 규율을 지킴으로써 도심에서 자신들의 순수성을 유지했다. 자신들이 관여할 영역과 아닌 영역을 구분하였다.(바리새인)

 

 

 그렇다면 이러한 네 가지 길을 거부한 예수는 어떤 길을 갔는가?

 아브라함을 먼저 떠올려보자. 아브라함이 불가해한 약속을 따르고자 일어섰을 때, 그를 통해 열방이 복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반응으로 아브라함은 전혀 다른 삶, 문명화되고 종교적인 민족과 다른 삶, 도시민이든 유목민이든 그들 가운데서 순례의 길을 떠나 다른 삶을 살기로 하나님과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과는 너무 괴리감이 컸다. 바로 이렇기에 근원적인 혁명이 필요하다.

 

 예수는 이 약속을 성취하러 오셨고 전혀 다른 사회를 창조하셨다. 첫째, 자발적인 사회였다. 둘째, 구성원이 뒤섞여 있는 사회였다. 셋째, 예수께서 불러 모으셨으며,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의 일반적인 명칭이 바로 ‘교회’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교회’란 이름을 사용할 때 우리는 예배를 위한 모임이나 예배를 위해 모이는 사람의 집단, 그렇지 않으면 서로 거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사용하신 아람어 용어는, 신약의 저자들이 헬라어로 사용했던 용어와 마찬가지로, 공동체 일을 다루는 대중적인 모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 물어야 할 때다.

 

느낀점

 

21세기, 1세기 예수가 말한 교회를 재현한다는 것은 정말 근원적 혁명이다.

오! 이 괴리감.

 

 

교회에서 조모임을 한다. 나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안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한소리 듣는다. "넌 너무 세속적이야."

성경이야기를 하잔다. 오늘 너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을 들으란다.

"오! 하나님, 총신 신대원에 시험을 쳤습니다. 붙여 주실 것을 믿숩니다!"

또는 "오늘 하나님이 이 본문을 통해 해주신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러저러한 상황에 있었는데 이 말씀이...불라불라...위로가 됩니다."

 

 

오! 이 괴리감.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말해 볼란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이란 수사보다는 '비정규직'을

'길 잃은 영혼'의 전도보다는 억압된 정의를

'입의 소음'보다는 행동의 말을

우리모두 왼쪽으로 한발 가는 건 어떨까?

 

 

자! 이제 근원적 혁명은 시작되었다.

 

 

(질문으로 사실 '이 근원적 혁명이 지금 가능할 것인가?' 를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요더가 쓴 괴리감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묻고 제가 한번 답해보았습니다.

 

 

그리고 현실주의 노선의 한계를 벗기가 힘듭니다. 어디까지가 예수의 길이고 현실주의 노선일까요. 아직은 정리가 잘 안됩니다. 아마 저 자체도 근원적인 혁명을 소화하지 못한거 같습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군사독재에 침묵했다라고 말하던데 그 이유도 여기 있었을까요. 솔직히 저 역시 저 시대였다면 그렇게 했을 것 같습니다.

아직 1-2장만 읽어 보지 못했지만 이 '현실'에 문제에 좀 더 날카롭게 다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래봤자 40년전 미국의 현실이겠지만 그 자체로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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