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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교회

[책리뷰] 스탠리 하우어워스 - 교회됨

by 카리안zz 2020.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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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내가 이 책을 스탠리 하우어워스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그냥 제목만 보고 샀지 싶다. 지금도 교회론이나 교회에 대한 책들을 많이 사두고 있는데 이 책이 그 시작이 아닐까 싶다. 근데 이 책을 다 읽었지만 너무 어려워 소화하지 못했던 기억에 교회에 대한 책은 잠시 내버려 두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읽으면서 "덕과 성품"이라던가 "내러티브"라던가 그러한 말이 자주 눈에 들어와서 그게 중요한 거구나 싶긴 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몸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이 책이 종종 생각났다. 아비투스. 이 책이 그걸 말한 건 아닐까 싶었다. 세상에 대항하여 만들어내는 몸일까나. 어쩌면 제임스 스미스와 조우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 아닐까 싶다. 

 

 하우어워스가 대단한 신학자라는 것은 이후에 알게 되었다. 그의 자서전격인 <한나의 아이>가 나오면서 대략적인 그의 삶을 알게 되었고 그가 타임즈에서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했을 만큼의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기포드 강연까지 했다는 걸 볼 때 확실히 실력적으로도 무시 못하는 사람 같다. 

 

 작년에 교역자 필독서로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을 읽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니깐 하우어워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겠다. 아마도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비아에서 나온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추천한다. 대략적으로 훑어본 책이지만 하우어워스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려면 이 책을 먼저 봐야할 것 같다. 어쨌던 이 책을 읽을 땐 무언가 뜨거움이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을 읽을 땐 무언가 가슴에 뜨거움이 꿈틀거렸다. 아마 지금 교회됨을 읽었어야 될 듯하다. 

 

 아래에 책 맛보기에서 이 책의 약간의 내용들이 담겨 있다. 나름 줄 친 부분들인데 하우어워스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책 맛보기를 옮기는 중에 대략적으로 훑어보았다. 다시 보니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시 살아 난다. 이 책의 백미는 세 번째 파트이다. 가정, 성, 낙태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진단과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했다. 이 책은 1981년에 출간된 책이다. 거의 40년 전의 책이다. 하지만 중간 중간에 자유주의, 자본주의 이야기나 뒷부분 가정, 성, 낙태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2020년 대한민국에서 주요 화두로 떠오르는 시점이다. 진보적인 분들은 하우어워스의 의견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신앙의 좌표에선 하우어워스의 의견을 경청하게 된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을 사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파트 3은 꼭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메모

 

없음

 

 

 

 

 

 


 

 

 

 

책 맛보기

교회는 과연 기독교적 확신이라는 핵심 내러티브에 충실하기 위해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17)

'교회의 정치'라는 말에 대해 독자 여러분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한국교회가 사용하는 '교회정치'라는 말은 이 책의 용어와는 그 뜻이 같지 않다. '정치신학'과 같은 뜻으로 혼동해서도 안 된다. 굳이 표현하자면, 잠정적으로, 복음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 혹은 삶의 방식이라는 뜻에 가장 가깝다고 하겠다. (17)-역주

교회의 책무는 신실한 성품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라는 정치체제에 교회가 독창적으로 기여할 특징이라 하겠다. (18)

교회란 하나님 이야기에 충실한 존재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인 셈이다. (21)

기독교사회윤리란 다름아닌 "그리스도인 됨"(being Christian)을 뜻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83)

이렇게 보면, 대부분의 "정통"기독론에는 한계가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회문제를 묘사하고 대처할 기술을 얻는 것이라는 점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84)

영원히 살아계신 주는 신앙 안에서 알려지며, 신앙인의 마음 속에 현존하는 분이라는 확신으로부터 추론된 것이 아니다. 마치 예수의 성품을 신앙인의 마음 혹은 신학으로부터 추론할 수 없듯이 말이다. (91)

따라서 예수의 정체성은 다른 구세주 이야기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따르기를 배울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95)

판넨베르크가 말한 것처럼, 예수의 보편적 적실성은 인간성에 대한 소망과 깊은 동경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이는 특별한 필요와 욕구와 동경을 몸소 보여주신 바로 그분에게 훈육된 특별한 공동체에 의해서만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보편성은 예수의 십자가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 이 세상에서의 신실한 삶의 필수조건으로 삼는 자들에 의해서만 구현된다.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의 사회윤리였던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예수의 윤리를 이어갈 것이다. (97)

그의 죽으심을 통해 예수는 그가 수행해야 할 사명을 완수하셨다. 이러한 뜻에서,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우회로도 아니고 장애물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도 아니다. 십자가는 임재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106)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 기초하여 형성된 공동체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다. (106-107)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통치능력을 예수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신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배운다. (107)

그러므로 모든 사회가 분노와 두려움을 공유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기독교 공동체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다름을 볼 때 하나님 나라의 용서하시는 특성의 표시로 인식하게 하는 이야기를 그 기초로 삼는다. (109)

이야기를 신실하게 말해준다는 것은 역사적 탐색(비롯 그것이 진리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으로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주는 부담감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보증된다. 우리는 초대기독교인들 못지않게, 하나님의 통치가 있기에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진리의 계승자이다. 우리 각자가 복음에 충실한 존재가 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들 삶의 본질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 진리를 이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예수의 제자가 된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서로를 도울 수 있다면, 초대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연약함에 도전을 받았을 때처럼, 서로를 돕는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 지를 보라." (113)

성경본문들 및 전체로서의 성경의 형성은 공동체가 과거를 기억하고 재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해준다. (115)

결과적으로 성경윤리가 과거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기억의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망각하기 쉽다. 기억의 공동체가 없다면, 그 어떤 학술적 설명 및 해석학적 기교들로도 성경의 도덕적 적실성을 주장할 수 없다. (116)

거기에 담긴 신학적 의의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독교윤리에서 성경은 단순히 본문 수집본이 아니라 공동체에 규범을 주는 경전이다. (120)

불행하게도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은 본문 그 자체보다 본문의 전개과정에 대한 현대적 이론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 (120)

어쩌면 다른 사고방식을 제안하는 것일 수 있다. 계시와 성경의 관계는 계시와 그 응답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고대의 관계가 아니라, 현존하는 전통과의 관계이다. 계시의 기록이 완료된 단계 즉 현존하는 성경에 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새로운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뜻이 통하게 해주는 준거 틀이다. (122)

전통은 해석을 통해 변경될 수 있다. 해석 없는 전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석이란 현재의 공동체가 전통과의 연속성을 유지하고는 데 필요한 지속적인 조정작업이다... 연속성은 끊임없는 발전을 이루는 만큼 유지될 수 있으며 발전 혹은 변화(단순한 대체가 아닌)는 연속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전통은 연속성과 변화를 의미하며 두 가지 모두 함께 가야만 하는 것들이며 서로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 (128)

해석은 새로운 내러티브가 미래와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이루어낼 때마다 언제라도 조정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바(Barr)가 말한 것처럼, 성경해석이란 새로운 것(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의미)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한 전통의 재해석인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129)

성경을 권위로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가장 충실한 통로로서의 전통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성경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가 특정한 본문에서 시작하여 바(Barr)가 말하는 성경적 전통을 지닌 "생생하고 현장감 있는 논의와 논쟁"에로 나아가는 것이라 하겠다.
...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라는 전통을 통해 공동체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한다는 데 있다. (132)

기억을 통해 살아가는 공동체의 산물이자 그 공동체에 기여한다. 성경의 내러티브는 "성품을 형성시킬 뿐 아니라", 그 이야기에 적합하게 공동체의 질서를 세워가도록 이끌어 준다. (139)

그리스도인의 으뜸가는 책무는 세상을 좀 더 선하고 좀 더 정의로운 곳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며 이것이 왜 그들의 정치적 책무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151-152)

사회정책이란 효과적이고도 공정한 것이여야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시민의 덕을 지닌 존재로 육성하는 것이어야 함을 간과해 왔다. 우리는 정책의 효율성에만 집중함으로써 모든 인간관계가 교환모델로 설명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길들여졌다. (163)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여호와의 주되심에 대한 확신을 우리의 존재근거로, 특별히 공동체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러한 확신이 있어야만 정치를 위한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덕과 신뢰의 인간을 육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174)

기독교적 확신의 신실성은 세상의 분열된 모습을 인식하고, 낯선 자에게 기꺼이 호의를 베풀 인격을 형성시킨다는 데 있다. (185)

증인이 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어떤 삶을 살게 했는지를 성찰하도록" 초청한다. (205)

교회는 모두의 진정한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통해 통일성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통일성은 다원적 사회를 사는 교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다양성에 대한 판단이 때로 폭력으로 비화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세상적 관점과는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206)

교회의 책무는 효용성으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책무는 신실한 삶의 통해 하나님께 우리 삶의 진리이심을 인식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207)

민족과 국가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편리하게 다가와 있는 우상숭배가 아닐까 싶다. (215)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덕스러워질 수 있는 능력은 공동체에 달려있다는 점 즉 신실한 내러티브를 가진 공동체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226)

내 요점은 인격적의 상징이자 실행기고나이던 다른 기관들이 쇠퇴함에 따라, 가정은 너무 많은 도덕적 부담을 더안게 되었고 그 결과 가정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319)

그러나 사랑이 결혼과 가정의 필수조건이라는 현대인의 낭만주의적 관점은 심각한 오류이다. 오히려, 결혼과 가정이야말로 사랑의 의미 이해에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다. 결혼은 모두에게 충족감을 준다는 것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더 큰 공동체에 안에서 결혼이 지닌 도덕적 사회적 목적들을 구현함으로써 유지된다. (321)

이러한 뜻에서, 결혼은 (가정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실재로서의 교회에 세워진 핵심 제도에 속한다. 결혼은 역사의 섭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구현될 것임을 믿는 신실함의 표식이다. 결국,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신뢰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경험하고 그 첫 열매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배타적 증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꼐서 그 백성들을 배타적으로 신뢰하신다는 것이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362)

순결의 문제는 단순한 성적 관심사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출산을 목적으로 하는 성행위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과연 공동체가 말하는 성숙의 가치를 과연 우리들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며 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순결은 특정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감당할 신실함의 덕과 연관된다. 이러한 뜻에서, 순결은 독신에서만 아니라 결혼에서도 중요하다. (368-9)

내 생각에는 낙태에 대한 이해에서 부모됨의 이해야말로 결정적이다. 좀 더 강하게 말하자면, 낙태에 대한 태도는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달려 있다. 이는 결국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에 관한 깊은 이해에 연관ㄴ된다. (397)

 

 

 


 

 

 

목차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서문

들어가며

1. 복음을 재발견하라

1) 내러티브에 주목하라

2) 예수 내러티브가 사회윤리이다

3) 성경의 내러티브 윤리를 읽어내라

4) 교회로 교회되게 하라

2. 복음을 성품화하라

5) 교회, 성품의 공동체가 되라

6) 덕의 윤리를 회복하라

7) 예수 내러티브를 성품화하라

3. 복음의 공동체가 되라

8) 가정에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9) 가정의 도덕적 가치를 회복하라

10) 성의 공동체적 가치에 유의하라

11) 낙태, 종교적 이슈이어야 한다

12) 낙태, 공동체적 관심사이어야 한다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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