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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설교와 목회자

[책리뷰] 월터 브루그만 - 예언자적 상상력

by 카리안zz 2020.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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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점

 

월터 브루그만의 책을 두 권만 읽어보았지만 아마도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으면 좋을 듯 싶다.

뒤에 번역된 <텍스트를 설교하게 하라>를 읽었을 때 <예언자적 상상력>이 많이 생각났다.

'아, 브루그만이니 역시 이렇게 말하는 군' 싶었다. 

 

요즘 근간의 내 설교는 브루그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저자는 미국의 소비주의를 우상의 전형으로 그려내는데

나는 이 틀을 빌려서 자본주의(김덕영의 에리식톤 콤플렉스같은), 기술, 학력 같은 것에 투영한다. 

 

5년 전 읽은 이 책을 리뷰를 하기 위해 다시 펼쳤는데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문장들이 많다. 

교역자 도서로 읽어야 하는데 다시 한 번 읽어도 좋을 듯하다.

당시 소화해내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제 어느 정도는 소화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여튼, 이 책 덕분인지 영향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이 시대의 우상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건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쓰는 설교는 지금 우리 시대

그러니깐 정확히 2020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우상이 무엇인가를 찾아야한다. 

톰 라이트와 팀 켈러는 자신들 시대의 우상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보며

그것을 한국의 목회자들은 그대로 받아드려서 대한민국의 우상으로 보려고 한다.

물론, 그러한 모습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탐욕의 자본주의, 피라미드와 같은 서열들이 우리 시대의 우상을 더 잘 보여준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sky 캐슬> 그 우상을 폭로한 것이다. 

 

이 책 덕분에 난 부지런히 사회와 관련된 책들을 구입하였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물론, 요즘 콘텍스트에 대해서 너무 집중한 것 같아

콘텍스트에 텍스트를 주입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 같지만.

그 둘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목회자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평생!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읽어내야 하기 때문에. 

잘 하자. 

메모

여기서 흘리는 눈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시 예루살렘을 위해 흘리는 눈문이다. (174)

-남자는 평생 3번 울어야 한다는데 예수님은 왜 이리 많이 울었는가?(한국적 상황으로 예수님 시대 읽기 예시로 들 수 있겠음)

 

책 맛보기

예언자란 전승의 자녀로 부름받은 이로서, 자기 고유의 인식 이론과 언어 체계를 갖추고서 전승을 진지하게 다루는 사람이며, 또 전승의 기억에 매우 정통해서 문화와 교회의 접촉점과 상충점을 날카롭게 식별하고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예언자적 목회를 정확하게 이런 식으로 밝혀주는 모델을 성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50)

보수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오해는 자동차에 붙인 수많은 스티커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데, 예언자는 점쟁이, 곧 흔히 예수의 권위를 빌려서 미래의 일(대부분 불길하다)을 알려 주는 자라는 것이다. 예언 활동의 이러한 측면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겠으나, 그것은 기계적이고 따라서 지지할 수 없는 일종의 환원주의에 속한다. 어떤 면에서 예언자들은 미래를 알리는 자이기는 하나, 그들이 관심을 두는 미래란 현재로 치고 들어오는 미래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 탐색을 포기한 자유주의자들은 그 일을 모두 보수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는 현재에만 몰두했다. 따라서 예언의 의분으로 축소되고, 내가 속한 진영에서는 대개 예언을 사회 행동으로 이해한다. (51)

그러나 모세가 한 일은 이집트 제국의 의식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제국을 사회 관습과 신화적 주장의 양면에서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59)

제국 경제의 목적은 백성을 배부르게 만들어 그들이 눈뜨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제국 정치는 거부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제국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이 되어,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아시는 그 참상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든다. 폐쇄된 세계, 곧 혁명이나 변화, 역사, 약속, 희망이 없는 땅에 갇혀 있는 왕인 파라오는 숱한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을 대표하는 모델이 된다. 모든 왕이, 심지어는 모든 면에서 탁월했던 솔로몬까지도 이렇게 고착되고 폐쇄되어 버린 세상을 부러워한다. (94)

내가 보기에, 왕의 무감각과 부정을 깨뜨리는 예언자에게 적합한 어법은 애통의 언어다. 이 애통의 언어는 공동체로 하여금, 자기들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장례식, 곧 그들 자신의 장례식을 애도하게 만드는 수사법이다. (109)

예수는 냉정하고 위엄 있는 주님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는, 격정을 지닌 분이다. 예수가 눈물 흘리며 마음 깊이 느끼고 괴로워한다는 사실은 지배 문화와 놀라운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힘 있는 자의 태도가 아니며, 확고하게 사회를 통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도 아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 나오는 예수는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권력을 해체하고 있으며, 그곳에 존재하는 고통과 슬픔, 곧 지배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그 고통과 애통에 자기 자신을 내어맡김으로써 죽음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있다. (172)

목차

해설의 글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1장 모세의 대안 공동체

2장 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

3장 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

4장 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

5장 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

6장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

7장 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

 

실천 후기

약어보기

추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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