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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설교와 목회자

[책리뷰] 찰스 L. 캠벨, 요한 H. 실리에 - 하나님의 어릿광대

by 카리안zz 2020.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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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C에서 일하시는 페친분이 강력 추천하시기에 한 번 봐야해 했을 뿐이었다. 추천사를 읽기 전까지. 강영안 교수님의 추천사를 한 번 읽자마자 당장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천천히 묵묵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느낀 점

 

 악을 폭로해야 한다. 어떻게? 논리적으로? 아주 분석적으로 할까? 아니면 강력한 힘으로 그것을 누를까? 이 책은 제안한다. 바보가 되어서 악을 폭로하고 분쇄시켜라고. 역설을 이야기한다. 이쪽 저쪽 경계의 선 사람이 되어 악을 폭로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했던 행동이었다. 그는 트랙스터와 어릿광대보다더 바보같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니. 이 얼마나 비웃음 살 일인가. 그가 했던 행동 하나 하나가 악의 시스템에 저항했고 비웃었다.

 자! 그럼 설교자는 어떻게해야겠는가? 설교자도 역시 악을 폭로해야 한다. 예수의 방법으로. 나는 설교자다. 할 수 있을까...ㅎㅎ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과연 악을 절절하고 웃프게 폭로하는 설교가 대한민국에 있을까 생각했다. 그쯔음 영화 한편을 봤다. 쿼바디스! 이런 설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있었다. 그 웃픈 모습이 영화에서 재현되었다. 악은 스스로 폭로했다. 

 악이 폭로되고 무너질 때 우리는 그 뒤 어떻게 해야할까. 저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희망을 발견해 가야한단다. 그리고 우분투를 제안한다. 

 설교자로서 나는 어디가고 있을까. 아! 쿼바디스! 악한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도록 주님 당신을 계속 따르리다!

 

 

. 메모

 

 다음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라.대한민국에는 남한과 북한 사이 경계의 언덕 높은 곳에 지어진 통일 전망대라고 불리는 놀라운 장소가 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당신은 국경 넘어 북한을 바라볼 수 있다. 비무장지대(DMZ), 철책 그리고 철조망이 보인다. 그리고 물론 눈 닿는 곳마다 군대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훈련소, 군복, 그리고 기관총들,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장소임이 틀림없다. (p. 280)

- 직접 가보았기에 울컥한다.

 

웃음과 유머는, "지금 존재하는 것" 그리고 "되어야 하는 것 혹은 될 수도 있는 것" 사이의 모순들에 의해서 생기는 "비탄"이라 불리는 또 다른 현실에 연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p. 289)

- 웃프다?

 

이러한 생동감 있는 예언적 패러디는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다. 2007년 5월 26일, 테네시 주의 녹스빌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KKK 단원들의 행진을 패러디했다... (p. 422-3)

-좋은 예

 

. 책 속 中

 

 

 이방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당나귀 하나님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은 완전히 멸시받을 것으로, 전적으로 수치스럽고 터무니 없으며, 허무맹랑한 웃음거리로 보였을 것이다. 요약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과 당나귀 사이의 연관성이 미련한 십자가라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p. 45)

 

가장 작은 풀 한포기 안에 있는 생명의 에너지이시며 한 톨의 먼지 속 어딘가에 있을 원자의 농축된 최소 단위들을 함께 결합시키는 역동적 능력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동시에 무능하고, 조롱받으며, 십자가에 달린 당나귀로서의 하나님을 상상해 보라. (p. 47)

 

설교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 이 그림에서 돈키호테가 경계성적 설교자상을 구현한다고 하면 무리일까? 혼돈과 질서 그리고 파괴와 형성의 교차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를 가리키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그는 아마도 설교자가 아닐까? 피파편에서 형상으로 또 형상에서 파편으로 가는 그 연결선상에 있는 설교하는 바보,... 즉, 설교하는 바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설교자의 모습이 아닐까? (p. 64)

 

바울이 보는 설교자의 모습은 보다 이상하고 불편한 그것, 바로 바보의 모습이다. (p. 67)

 

사회 구조, 시스템, 신화와 이데올로기들은 너무나도 자주 우리를 사로잡아 그들에게 대항할 어떤 대안도 생각해내지 못하게 한다. 이 부서지고 파괴된 세상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가리킬 때에, 마치 돈키호테가 된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p. 67)

 

그 십자가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사랑으로 지배와 폭력과 죽음의 권세에 도전했던 예수의 방식을 상기시키는 훼방이었다. (p. 69)

 

십자가의 처형은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가지 않으려는 자들이 무례하게도 계급사회에 흠집을 내려할 때 그런 자들의 행동을 흉내 내며 경멸하고 희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형은 이런 자들의 행위에 대한 희극과 비극이 복잡하게 얽힌 기괴한 패러디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p. 76)

 

힘과 지혜에 대한 세상의 통념에 도전하고 그 통념을 패러디하는 어리석은 사랑의 길, 심지어 그 길이 고통과 죽음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기를 거부하는 길인 것이다. 십자가를 설교하기 위해서는 이 미련함 속으로 깊게 들어가 바보의 역할을 해내야만 한다. (p. 85)

 

우리는 바울을 연극 안의 바보처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예고도 없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와 그의 발칙한 말들과 익살맞은 행동들도 극 전체를 헤집어 놓는 바보 말이다. 연극 속의 바보처럼 바울은 관습을 거스르는 행동들을 보인다. 십자가를 선포함으로써 그는 힘과 지혜에 대한 세상의 이해를 바꾸어 놓는다. (p. 87)

 

그 형태들은 부서지고 재형성을 바라보며 소리친다. 파편들은 부서짐을 나타낸다. 이렇게 완성을 요구하고 갈망할 때, 희망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런저런 경계성의 긴장들은 개인적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공동체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라는 또 다른 렌즈가 필요하다. (p. 124)

 

이 책의 범위 내에서 광대한 우분투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분투는 삶의 방식으로, 보편적 진리로, 인간 존엄의 표현으로, 열린 사회라는 개념의 토대로, 아프리카 휴머니즘으로, 신뢰, 도움, 존경, 나눔, 돌봄, 공동체 그리고 이타주의로 설명되어 왔다. 요약하면, 우분투는 인간애와 인간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타인들을 통하여 인간이 된다는 신념에 근간을 둔다. 즉 "나는 당신들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잘 알려진 아프리카의 경구는 타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존경과 불쌍히 여기는 깊은 동정심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우분투는 사실적 서술이자, 행위의 규범 혹은 사회 윤리이다. (p. 126)

 

십자가는 생명으로서의 능력 혹은 생명을 위한 능력을 의미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십자가는 죽음에 저항함으로 생명을 주고, 연약함을 통해서 다스리고, 겉으로 보기에 미천해 보이는 것을 통해서 통치한다. 이 연약함의 능력은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모든 힘들에 철저하게 반대한다. 이 연약함의 능력은 고통을 가하기 위해서 그들의 힘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과 실체들에게 맞선다. (p. 139)

 

그 거울로 교회는 다른 이들의 지독한 고통의 얼굴을 응시해야만 하고 거울에 부추어진 교회 자신의 부서짐, 즉 온전히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만 한다. 교회는 고백해야만 한다. 교회의 파편화는 교회 자신의 폐쇄된 엄숙함으로부터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그 폐쇄된 엄숙함은 십자군, 유대인 대학살, 노예제도,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 같은 잔학 행위와 공범의 관계이며, 따라서 그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는 통찰의 파편들과 지식의 조각들을 제공할 뿐이다. 교회는 십자가로 산산 조각난 하늘의 모습 그 이상을 결코 제동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파편들 가운데 우리는 성령께서 형성과 재형성을 위해 운행하고 있음을 믿으며 또한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파편화된 몸을 반영한다는 것을 믿고 바란다. (p. 148-9)

 

이런 신학에서는 어떤 것도 흘러가지 않는다. 모든 것은 굳어있다. 복음의 좋은 소식에 대한 기쁨은 폐쇄된 엄숙함으로 뒤바뀐다. 

 이러한 철의 신학은 종종 폭력을 불러온다. 실로 이런 신학들은 폭력을 통해서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끌어내는 방법, 즉 적들을 다루는 방법을 따라서 종종 구속적 폭력의 신화 안에서 움직인다. 그 폭력적 움직임의 결과는 그들의 목적들을 거룩하게 하는 구조들과 행동들이다. 그러나 그런 구조들과 행동들은 본직적으로 비안간화의 진행으로 이어진다. 안전을 실제적으로 위협하는 경계성에 대한 두려움은 종종 "구속적 폭력"이란 이름으로 직간접적으로 가혹한 조처들을 정당화한다. (p. 159)

 

바보들은 종종 우리가 모르는 사아에 돌 위에 새겨진 관습들, 신화들 그리고 논리들을 "녹인다". (p. 162)

 

경계성의 공간은 경계들이 서로 교차하고 계급구조가 뒤집히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조롱거리가 되는 권세들은, 그들이 왕이든 대주교이든 혹은 마귀이든, 십지어 풍자된 전쟁이든지 상관없이 싸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어쨌든 거기에 부상은 없다. (p. 177)

 

한마디로 카니발은 철저히 경계성적 공간이다.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형태,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가능하게 된다. (p. 178)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트릭스터들과 어릿광대들처럼 예수는 철저하게 경계성적인 인물이다. 그는 경계를 넘나들고, 의도가 담긴 모호한 표현으로 가르치고 설교하며, 사람들을 구 시대와 새 시대의 문턱 즉 세상을 꿰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고 그 통치 안에서 살라고 불러낸다. (p. 233)

 

식사의 교제, 그 가장 친말한 의식에 관한 금기를 깨며 또다시 논란의 소지가 되도록 불결하다고 여겨지는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이 이야가는 인습적인 규율을 반복해서 깨버림으로 세상을 철저하게 우롱하는 이야기이다. (p. 240)

 

어릿광대들과 트릭스터들과 거룩한 바보들의 이야기들은 예수의 이야기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p. 244)

 

성육신에서 부활까지, 우리가 설교하는 예수는 동요케 하고 규범을 뒤엎는 인물이다. 그의 사역은, 그의 성육신, 십자가, 그리고 부활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인습과 합리성을 무너트린다. 그리고 문지방과 같은 경계성의 공간을 창조한다. 그 공간 안에서 성령은 사람들을 형성하고 재형성하기 위해 일하신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p. 252)

 

바보들에게 있어 웃음이란, 경계성을 만들어내고 유지하기 위하여 완고한 관습, 신화, 그리고 세상의 논리들이 가지고 있는 폐쇄된 엄숙함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바보들에 의해 구현된 이 웃음과 경계성 사이의 연결 관계는 웃음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p. 285)

 

즉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다스린다"는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부조화를 선포하는 것이다. 당나귀 등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자는 조롱당하는 대관식의 주인공이 되고 십자가라는 모욕적인 왕좌를 견디어 낸다. 그리고 이 조롱을 통해, 예수의 양손과 옆구리의 상처로 충만한 부활절의 환희가 태어난다. 

 그때부터, 이 세상은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극장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울리지 않는 모습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로 웃기 위하여 함께 모인 것이다. 우리에게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탄이 아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결코 웃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고, 결코 기쁨의 눈물을 멈추지 않으셨다. (p. 329)

 

거룩한 능력과 지혜와는 양립할 수 없는 어리석음과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사도 바울을 보면서 많은 청중들이 신성 모독을 느꼈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로턴의 그리스도 초상화가 신성 모독적이었다고 느꼈음이 분명하다. 로턴의 초상화가 신성 모독적이라고 느꼈던 사람들은 신약성경의 예수 이미지와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이런 현대적 해석 사이의 관계를 식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p. 385)

 

 

Ⅳ. 목차

 

제1장 돈키호테와 십자가 

제2장 설교, 그 본연의 미련함

제3장 파편과 형태 사이의 신학

제4장 세상의 견고함 녹이기

제5장 세상 우롱하기: 예수의 미련함

제6장 웃음과 비탄

제7장 설교하는 바보들

제8장 어리석음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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