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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설교와 목회자

[책리뷰] 김영봉 - 설교자의 일주일

by 카리안zz 202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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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아직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를 읽어보진 못했다. 설교자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하지만 아직 읽지는 못했다. 대신 <설교자의 일주일>을 먼저 읽었다. 나는 김영봉 목사님의 문장을 좋아한다. 나를 사로잡았던 문장은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였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였고 장례 설교 내용이었지만 왠지 사역지를 떠나는 내 심정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문장을 보고 몇 번 훌쩍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가도 예수의 사랑은 남기는 사역자가 되어야지, 내 흔적이 아니라 예수의 흔적을 남겨야지 몇 번이나 다짐하게 만든 문장이었다. 그 외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라는 문장도 참 좋았다. 그 문장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로 고쳐 본 적도 있다. 이런 문장들 때문에 나는 김영봉 목사님의 책, <설교자들의 일주일>을 먼저 읽었지 싶다. 나도 설교자이기도 했고. 

 

 책의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중심으로 순서가 진행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이론을 기준으로 삼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설과 기독교의 설교가 설득의 노력이라는 점에(p. 10-11) 목차를 이렇게 구성했다. 

 

무엇이 설교가 아닌가?

 

 설교는 강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식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 32). 이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어찌보면 강의가 쉽다. 왜냐하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 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교는 단지 그것에 그치면 안 된다. 그것만 있으면 반쪽짜리랄까? 김영봉 목사님의 지적처럼 설교의 목적은 지식과 정보의 전달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는 연설이 아니다. 왜냐하면 연설자는 그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나누지만 설교자는 설교자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때문이다(p. 33). 

 설교는 훈화가 아니다. 훈화, 좋은 말 듣는 그 이상의 요소가 있다(p. 33-34). 

 설교는 해설, 해명, 에세이가 아니다. 에세이처럼 저자의 생각을 나누는 것에 그친다면 설교라 할 수 없다(p. 34)

 설교는 잔소리, 잡담이 아니다. 회중을 두렵게 대하는 경외심이 사라지면 설교에 문제가 생긴다. 잔소리를 회중에 대한 존중심이 사라졌을 때 나온다(p. 34-35).  

 설교는 선동, 선전이 아니다.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교인들을 몰아가는 수단으로 갈 수 있다(p. 35). 

 

그렇다면 무엇을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설교인가?

 

 설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고전 15:3-5에 따르면 복음의 핵심은 "나사렛 예수는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이다. 또,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나라를 보게 해주셨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표지요 접촉점이요 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교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설교한다(p. 37-39).

 

 설교는 선포다. 원어 '케뤼소'는 '전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이며 명사형은 '케뤼그마'이다. '케뤼소'는 전쟁이 났을 때 전령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하고 외치며 다니는 행동 혹은 전쟁이 끝났을때 승리의 소식을 알리며 다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주 화급한 소식, 그것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과 사를 가르는 절체절명의 메시지가 '케뤼그마'이고 그것을 전하는 행동이 바로 '케뤼소'이다. 이 소식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할 여유가 없다. 믿고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p. 40). 

 또, '증언하다'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직접 체험한 것을 말한다. 설교자는 단에 설 때마다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큰 무게를 느껴야 한다. 순교자라는 단어가 이 '증언하다'에서 나왔듯이 복음은 죽음보다 더 공포스러운 운명을 벗겨내는 것이며 생명보다 더 놀라운 선물을 알게 하는 일이다(p. 41).  

 한 가지 더 '가르치다' 역시 선포의 영역에 있다. 이는 선포의 과정에 초점을 두는데 설교는 회중을 깨우치고 꼭 알아야 할 중욯란 것을 알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언어에 앞서 설교자의 삶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 언어는 설교자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p. 41-43).

 

 설교는 당위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예레미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불타는 심령을 주셨고 그의 입술에 말씀을 주셨다. 유대 백성에게 살 길을 보여주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유대 백성 자신들에겐 괴롭히는 소식이었다. 바울이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전 9:16)는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알 수 있다. 첫째,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다고 믿었다. 둘째, 속에서 불타고 있는 복음에 대해 침묵한다면 그 불이 꺼지거나 그 불로 인해 속이 타 버릴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p. 43-45).

 설교는 순종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다만 방식이 달라졌다. 그분은 성령을 통해 계속 활동하신다. 하지만 그분에게는 육신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일하심으로 성육신의 신비를 이어간다. 사람의 마음을 만지고 그 마음을 열게 하는 힘은 오직 성령께로부터 온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그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입술과 몸을 성령의 도구로 드리는 것이다(p. 45-47).

 설교는 또한 사랑이다. 죽어 있는 영혼들에 대한 긍휼함에서 나오는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10:10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목숨만으로는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을 얻어야 한다. '잃어버린 영혼'과 '찾은 영혼'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설교의 내적인 힘이다(p. 47-48). 

 

왜 설교를 잘 해야 하는가

 

 설교자들이 설교를 잘 해야 하는 이유는 설교자들이 맡은 것은 비밀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습득하고 암기하면 끝이다. 하지만 비밀 혹은 신비는 그렇게 간단히 끝날 문제가 아니다(p. 62). 여기에 연관된 단어가 '코피오 아고나조메노스'이다. 이는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는 뜻을 가진다. 자신에게 맡겨진 비밀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바라게 하기 위해 코피가 날 정도로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58-59). 

 설교를 잘해야 하는 이유는 언어와 논리로 모두 담을 수 없는 것을 설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밀 혹은 신비는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더 알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데 이 때문에 설교를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 언어와 논리로 다 담을 수 없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도구가 없기 때문에 언어를 연마하고 논리를 훈련한다(p. 63-64). 

 

 

나가면서

 

 가장 중심되는 부분을 요약해서 옮겨 봤다. 아마 이 책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설교자가 일주일을 어떻게 준비해면 좋을지 조언을 보려는 분들이 많지 싶다. 거기에 대한 부분도 후반부에 가면 알차게 적혀 있다. (4장 로고스_설교와 본문 사이)를 읽어보시라 추천드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앞서 우리가 매주 행하는 '설교'는 과연 무엇일까? '왜 설교를 잘 해야할까'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어서 이 부분을 요약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설교자로 세워졌다. 앞으로 끝날까지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부족함이 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계속해서 설교를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끝날까지 그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메모

 

외적 성장은 생명력 있는 목회의 결과로 일어날 수 있는 결과입니다. 하지만 외적 성장은 말 그대로 결과 혹은 결실입니다. 억지로 만들어 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조건이 갖추어지면 열리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성장을 기대하고 노력하되 그것에 매이고 집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44-145)

- 어렵다!

 

 

 

한 가지 유형만 고집하지 말고 다른 유형의 설교도 때로 시도해 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282-283)

- 다양한 구종을 배우자!


 

책 맛보기

 

한국 교회의 설교는 상당히 훈화적입니다. 교인들을 길들이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식으로 정답을 주고, 윤리적 가르침을 제공하는 설교가 대세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33)


설교를 잘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함도 아니고 인정받기 위함도 아닙니다. 나에게 맡겨진 비밀을 지속적으로 알아 가려는 것, 듣는 이들로 하여금 비밀을 비밀로 느끼게 만들어 주려는 것,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 비밀을 더 알고 싶도록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아, 목사님, 믿는 게 그런 거라면 한번 믿어 보고 싶습니다"라는 응답이 나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에 대한 매력을 교인들의 마음에 전염시키고, 듣는 이들이 그 비밀을 품게 만들며, 그 비밀로 인해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설교라면, 잘하는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목회를 하면서 어디에서 보람을 찾습니까? 많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서 보람을 찾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그러한 성장의 맛을 충분히 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 규모보다 두 배 혹은 세 배로 커지면 만족스러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분이라면 그렇지 않다는 답을 얻을 것입니다. 외형적인 것으로 만족되지 않는 더 깊은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목회자로서 본질적으로 만족과 보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전해 받은 복음의 비밀을 더 깊이 알아 가는 것, 그리고 그 비밀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맛보게 하고 그 비밀 안에 들어오게 하고 그 비밀로 삶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64-65)


무엇보다, 복음의 '비밀'을 축복의 '비결'로 둔갑시켜 놓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66)


존재가 아니라 소유를,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땅의 나라를, 영원이 아니라 찰나를 지향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 설교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설교의 가벼움이 오늘날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68) 


성경 해석은 좋은데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리면 안 됩니다. (84)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에토스와 10년 혹은 20년 후의 여러분의 에토스가 같지 않습니다. 분명 달라지게 되어 있는데, 문제는 어떤 식으로 달라지느냐에 있습니다. 매일 지속적인 영성 생활을 통해 '거룩한 에토스'를 형성해 나가지 않으면 여러분의 에토스는 더욱 나빠집니다. (85)


개신교 목회자는 구도자 혹은 수도자의 이미지보다는 사업가, 영업사원, 예능사회자 혹은 달변가 같은 이미지가 더 강합니다. 개신교 목회자의 이미지에는 성품이나 인격보다는 기능이나 능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106)


우리의 '필요'뿐 아니라 '욕망'까지도 하나님께 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성과주의의 기도 곧 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를 얻는 과정으로 기도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기도의 분량과 그 사람의 존재 사이에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108)


관조적 생활은 피상적이고 분주하고 번잡한 생활, 나를 선전하고 팔려는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들에 집중하면서 한 번에 하나씩 정성을 다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114)


현실을 보면 목회자들에게 성경은 그리 중요한 책이 아닙니다. 목회적 필요를 위한 성경공부와 성경 읽기는 많이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한 영적 탐구로서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는 게으릅니다. 디모데후서 3:16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 내면을 변화시키고 형성하는 능력입니다. (115)


설교 준비를 위해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가장 먼저 자신을 말씀의 칼날 혹은 말씀의 거울 앞에 세우고 있습니까? 설교 준비와 성경공부 준비를 위해 성경을 대하는 시간 외에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시기 바랍니다. (115)


어느 여인이 남편 장례식장에서 너무 많이 울어서 화장이 다 망가졌습니다. 그것을 본 친정엄마가 "얘, 그만 좀 울어라. 화장이 다 망가지고 있잖니?"라고 책망하자, 그 딸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엄마, 지금 내 얼굴이 안 망가지면 나중에 내 마음이 망가질 것야." (121)


목회자에게 들리는 말들은 대부분 진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만일 목회자가 들리는 말에 의존하여 목회를 한다면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이든 긍정적인 말이든 들리는 말에는 큰 비중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들려주는 사람들을 너무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에 들리지 않는 말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38)


마음의 상처가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얼마나 치유되었는가에 있습니다. (182)


목회자의 마음은 낮은 곳으로, 어두운 곳으로, 냄새나는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같은 시간에 두 곳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 목회자가 더 어두운 곳으로, 더 고통받는 자리로, 더 가난한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목회자는 역차별의 문화를 교회 안에 정착시킬 수 있습니다. (220)


하지만 그렇게 6개월쯤 지나자, 서서히 회의감이 제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교인 수는 늘었지만 교인들의 삶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가까이에서 저의 설교를 칭찬하시던 분들에게서 자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에 실망할 때마다 '그렇다면 저분이 내 설교를 칭찬하는 뜻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마침내 '내가 저분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그 대가로 생활비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무거운 회의감에 빠졌습니다. (412)


교인들은 내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가족입니다. 그분들이 변화하는 것은 제가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다만 저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저의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양식을 제공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지금까지 사역을 통해 그 진실을 거듭 확인해 왔습니다.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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