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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설교와 목회자

[책리뷰] 정용섭 - 설교란 무엇인가

by 카리안zz 2020.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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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비평으로 유명한 정용섭의 책이다.

그때까진 그냥 막연히 가장 존경하던 분의 설교를

까니깐 그게 싫었다. 그 싫음이 고대로 정용섭에게 이어졌다.

지금은 아니지만

편입을 하기로 결심하고

ㅇ 대학과 ㄷ 대학을 고민했는데 

ㅇ대학은 정용섭 목사가 있었다. 머 그것 때문에 안 간건 아니지만

어쨌든 거부감은 있었다. 

 

그러나 정용섭에 대해 알아가니 대가는 대가더라. 

그 대가의 책, 설교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Ⅰ. 느낀 점 

 

 끊임없이 저자는 텍스트의 세계로 빠지라고 강조한다. 

한국 교회의 문제를 샅샅이 살피며 설교에 대해 이야기해 나간다. 

한국 교회 강단의 문제는 익히 알고 있지만

예화 과잉, 감상주의, 도덕주의, 기복주의, 지나친 정치적 색깔 보이기, 역사 허무주의, 성속 이원론, 가부장주의, 성서 문자주의, 반지성주의 등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러나 정용섭은 끊임없이 텍스트의 세계로 온전히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설교자들이 우선 "성서의 놀라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성서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 텍스트 안에, 그 성서 언어 안에 무엇이 존재한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계시다. 그런데 그 계시는 이 세상의 역사와 긴밀히 결속되어 있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면 설교자는 늘 성서의 변죽만 울리고, 값싼 은총론에 떨어지거나 도덕군자연하고, 결국 그런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성서는 도구화되고 말 것이다. (p. 102-3)

 

다시 강조하지만 설교는 귀납법적 설교, 스토리텔링 등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 아니라 그 내용이 근본이다. 설교의 내용이어야 할 하나님을 알면, 즉 그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청중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식을 찾아서 전하게 될 것이다. (p. 124)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점에서 공감되고 얻은 점도 많았다.

그리고 나름 이 부분은 조금 아니라는 부분을 보기도 했다. 

느낌은 들었지만 나의 성서학의 지식으로는 그걸 반박할 내용은 없었다. 

찜찜함을 남겨두고 나중에 주석을 찾아보거나 해야지 마음 먹었다. 

그 내용은 바로 여호수아에 관한 내용이었다.(p. 106-8)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 너무 어떤 전제를 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 

생명 존중의 관점으로 성서를 읽으니 여호수아의 학살 같은 경우는

성서 기자의 의도보다는 그것을 지워버리고 본인의 의사를 투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부분을 김회권이 정확하고도 근거 있게 지적하는 것이다.(p. 273) 

아! 이런 부분에서 내공의 차이를 느낀다.

 

그래도 공감하는 부분이 참 많았기에 좋은 책이였다!

 

 

. 메모

 

 

 

 예컨데 같이 산다 갈라선다 하는 부부가 주일 아침에 생태학적인 설교를 듣는다면 어떻게 귀를 기울이겠는가 말이다. 청중과 설교자의 주파수가 다르다 보면 내용이 아무리 충실해도 무의미한 설교가 될 수밖에 없다.( p.84)

-고민이다, 고민. 

 

그런데 왜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이 직접 소리를 내서 말씀하신 것처럼 묘사한 것일까? 그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성서 기자들은 시인과 같다. 그들은 절대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 경험이다. 성서 기자들의 그 경험을 따라가는 것이 성서를 읽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p.144-5)

-글쎄? 요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도 이런 절대적인 체험이라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나는 성서의 기자들이 직접 소리를 내서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정말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입과 성대 없이도 말할 수 있지 않으실까. 이 역시 나의 믿음이다. 나는 보수적이다!허허

 

<겨울연가>의 배용준을 죽고 못 살듯이 따라다니며 '은혜를 받는' 일본 중년 여성들 역시 비슷하다.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현상만 놓고 성령이 주도하는 설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p. 177)

-공감. 같은 차원인데 그리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앙의 강화냐, 신앙의 심화냐 (p.178)

-우와!

 

일종의 심리적 대중 치료라 할 이런 열광주의를 기독교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난 월드컵 때 수많은 붉은 안마들이 경기장과 대도시 광장에 모여 환호성을 지르고 열광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과 별 차이가 없다. (p. 193)

-맞아! 이 차이. 감동의 은혜라면 영화에서도 문학에서도받는다. 이 차이!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 책 속 中

 

그렇다. 설교자 앞에 놓인 성서는 지금 존재하는 세계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특히 아직 드러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야말로 오늘의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생명의 능력이다. 설교자들은 이렇게 엄청난 세계를 청중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p.21)

 

우리는 나름 진지하게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코미디처럼 보인다면 선교적 차원에서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는 당연히 물질 만능주의, 성공 지향주의 같은 이 시대의 세속적인 가치관에 맞서야 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흔히 나타나는 기본적인 세계관의 오류에 있다. 영육 이원론, 성속 이원론, 레드 콤플렉스,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 역사 허무주의 등등이 선교 행위와 말씀 선포에 노출되는 경우가 한두 번이겠는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이후에도 천동설에 집찹하거나 다윈 이후에도 진화론을 무조건 배척한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다. (p. 101)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역사적 산물이다. 성서 형성에 관계된 개인이나 민족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안에서 살았고, 그 세상에 직면했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대답을 찾았다. 말하자면 성서에는 역사와 세계가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역사와 세계를 읽을 줄 모르면 성서는 죽은 문서가 될 수도 있다. (p. 102)

 

첫째, 청중이 목사의 설교에서 영적인 자극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교 자체에 관심도 없다. 청중은 설교보다는 주말 드라마에서 훨씬 재미를 느끼고 있으며, 예배를 드리면서도 성가대의 찬양이나 광고에 관심이 더 많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연인들이 부모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하는 운명과 같다. 이건 강단의 위기다. (p. 115)

 

그 위기의 본질은 설득 기술 차원에서 설교에 접근한다는 사실에 있다. (p. 116)

 

좁은 의미로 문학, 역사, 철학을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모든 인식론적 노력을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 해석학에서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수도원 영성과 신학적 사유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p. 141)

 

성서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을 신뢰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이런 긴장에서 손쉽게 벗어나려 요령을 피우지 않고, 오히려 그 긴장을 가슴에 안은 채 종말의 불빛을 바라보고 뚜벅뚜벅 길을 갈 것이다. 이 도상에서 인문학적 통찰은 길벗이 되어 줄 것이다. (p. 142)

 

예배 참석, 철야 기도회, 헌금, 봉사, 성서 공부와 성서 쓰기 등등 신앙 생활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행위가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 종교 행위를 익숙하고 세련되게 하는 능력을 신앙이라 생각하고 더 나아가 그런 능력 자체에서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다는 사실은 교회에서 벌어지는 종교 행위가 신앙의 강화 차원에서 작용한다는 증거다. 장로 선출 문제, 평신도의 위계질서, 헌금 제도 등등 거의 모든 교회 조직과 프로그램이 신앙 강화의 수단으로 제공된다. 어떤 교회는 제직들을 특별 새벽 기도회에 나오도록 독려하려고 출석부를 만든다는데, 이런 기발한 발상은 종교 생활의 외적인 강화만 강조할 때 나온다. (p. 179)

 

구원론적인 설교가 무엇인지 한두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설교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도대체 살린다는 게 무엇인가. '산다, 살아 있다'는 게 무엇인가? 삶 또는 생명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구원론적인 설교와 연관되는데, 결국 구원론적인 설교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직결된다. 성서와 신학에서 생명은 영의 문제다. (p. 208)

 

그렇다. 단순한 윤리. 도덕교범, 인생철학에 관한 설교가 아니라 내 존재를 화염으로 불사를, 인간의 모든 프로그램과 설계도를 뛰어넘는, 궁극적으로 언어까지 뛰어넘는 하나님의 카봇을 전하는 설교를 듣고 싶다. 그런 설교 앞에서 내 영혼은 충격을 받을 것이며, 겸손하게 무릎 꿇고 진정으로 영광의 찬양을 올리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은, 더 나아가 예배와 설교는 근본적으로 송영이다.

...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 행위인 생명의 신비가 오늘날 구체적인 노동 현장과 가정생활, 정치, 경제 및 국제 정세를 비롯해서 청중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훨씬 많은 과정을 통해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최대한 정확하게 이해하고,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인 신학을 공부해야 하며, 오늘의 삶을 해석하는 인문학 공부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은밀한 중에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기도는 이 모든 것의 토대다. (p. 218-9)

 

교회가 나서기보다는 그들을 돕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 좋다. 물리학은 그들 전문가들이 맡아서 할 일이지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다. 목사는 모든 일에 나서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일조차 버거운 과업이며, 지난 2000년 동안 교회가 치열하게 투쟁하고 참여해 온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과 그것의 심층적 의미를 오늘 교회 안에 살려 내는 일만 해도 숨 가쁘다. (p. 230)

 

거의 모든 설교에서 나는 질문을 한다. 위 설교도 질문으로 이어졌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송영을 불렀는가? 그 송영이 말하는 존귀와 영광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설교자는 청중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p.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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