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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문] 5분 설교 - 고린도전서 10장 24절, 고전 10:24[어떻게 살 것인가 I 희생 I 공공선 I 칼뱅 I 개혁주의 I 남을 위해 I 예수님처럼]

by 카리안zz 2023.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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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읽기: 고린도전서 10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도 하는 질문이고 그리스도인들도 하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성경에게 한다면 성경은 무어라 대답을 할까요? 성경은 다양한 대답을 할 수 있지만 반드시 이런 대답이 그중에 있을 겁니다. 그 대답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말고 남의 유익을 위해 살아라는 것입니다. 제가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찾은 구절들이 있는데 몇 구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2-4)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히브리서 13:16)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3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로마서 151-3)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사도행전 2035)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토록 남을 위한 삶을 강조합니다. 왜 이렇게 성경은 남을 위한 삶을 강조하는 걸까요? 그건 바로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우리는 바로 남을 위해 사셨던 그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름받은 자들이 모입니다. 성경은 그 부름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가 바로 주님이 부르신 자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것은 다시금 분명해 집니다.

 

우리 신앙의 뿌리인 칼뱅과 개혁파들은 이를 더욱 단단히 하였습니다. 칼뱅은 그토록 자기 부정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때의 자기부정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을 부정할 때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자기 자신만의 사랑을 죽일 때 남이 보이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가 보이게 되었습니다. 칼뱅의 이 사상은 후에 루소에게 영향을 줍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속에 칼뱅의 흔적을 사람들은 발견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이 인권에 대한 권리를 말하기 전 이미 칼뱅에게서 그 개념들이 발전되었습니다.

 

칼뱅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받은 선물에 대해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은사가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없는 뛰어난 재능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재능으로 큰 권력과 부일수도 있습니다. 이미 주어진 부요함일 수도 있습니다. 이 받은 선물을 영원의 관점으로 돌려버립니다. 당신이 받은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따라 나중에 받을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그것은 이웃과 나누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들에게는 책임이 더더욱 중요해 집니다.

 

독일의 총리였던 메르켈은 독일 기독교 민주당 소속입니다. 정당 자체가 기독교 정당이니 소속 의원들은 기독교인들이겠지요. 이 기독교 정치인들이 모임을 가지며, 기독교 정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의에서 나온 것이 바로 책임이었습니다. 기독교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이라는 결론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비그리스도인이라도 책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결정 하나 하나에 많은 사람들의 처지가 결정되니까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나중에 말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것은 죽은 이후 영원의 삶과 연관이 됩니다. 비단 정치인만 그럴까요? 우리 모두 삶의 터전에서 부여받은 선물로 살아갑니다. 그때 그 받은 선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나님께 낱낱이 고하게 될 날은 분명히 옵니다. 과연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말을 들을까요?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말을 들을까요?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말을 들을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그 정신이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엉망이 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정신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흔적들입니다.

 

1세기 바울은 종횡무진 선교를 다녔습니다. 당시 바울이 하려던 큰 일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가난한 자들에게 보낼 연보를 모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상당히 큰 금액이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가족들의 참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은 아마도 그 큰 일이 실패했다고 추정을 합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고 힘쓴 그 일이 실패를 한 것같습니다.

1500년대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랑스 난민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습니다. 10년 넘게 이어진 종교개혁으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로 사람들이 떠났던 것입니다. 제네바라는 도시의 인구가 2배나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고, 운영할 도시 비용이 모자랐고, 위생의 문제 등 안 좋은 일들이 마구 일어나 외국인 혐오가 터져버렸습니다. 급기야 난민들을 쫓아내려는 움직임이 보입니다. 칼뱅은 이때 프랑스기금을 모읍니다. 처음은 부유층의 유산으로 시작했지만 이 프랑스기금이 급격히 성장하는데에는 프랑스의 수많은 개혁교회 신자들이 보내온 연보때문이었습니다. 이후 개혁교회 공동체 국제 네트워크가 프랑스기금의 핵심 모체가 되었습니다. 도시의 안정, 곧 화해에 이르렀습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해 사십시오.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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