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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문] 5분 설교 - 누가복음 7장 22절, 눅 7:22[예수님은 누구신가? I 구약을 알면 성경이 더 잘 보인다 I 구약 I 구약의 반향 I 구약과 신약 I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I 슬램덩크 더 퍼스트 예..

by 카리안zz 2023.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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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읽기: 누가복음 7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들었던 걸까요? 앞부분인 719, 2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실 이가 당신이냐는 질문을 합니다. 과연, 이 질문은 어떤 뜻으로 세례 요한은 했던 걸까요?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마치 예수님도 제자들도 20세기의 사람들이자 자칫 대한민국 사람으로 이해하고 읽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그런 말들을 합니다. 주석같은 책들을 참조하지 말고 그냥 자신의 힘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라고 말입니다. 저도 신학을 공부한지 얼마 뒤지 않았을 때 뜨겁게 성경 주석들을 탐구해가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저에게 주석들을 보지 말고 본인의 힘으로 성경을 읽어나가라고 하더라구요. 일견 완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부정확한 말이었습니다.

 

이런 성경읽기를 하는 분들이 놓친 부분은 바로 우리에게 역시 선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놓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고, 21세기 속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틀이 있고, 그 틀로 우리는 책을, 세상을 본다는 인식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마치 기본적인 전제이기에 쉽게 인지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때 길잡이로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주석이기도 합니다. 물론, 막연히 추종해서도 안 됩니다. 이렇게 복잡미묘한 걸 바로 신학교에서 배우고 그걸 배운 목회자들이 성도님들께 전달을 드리지요. 물론,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유통의 구조가 부분, 부분 잘 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대답과 세례 요한의 질문에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 아주 좋은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세례 요한은 오실 이가 예수님인지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했습니다. 이 오실 이에 대한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대화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구약의 이야기에 있습니다. 시편 11826절이 이 대화의 배경입니다. 시편 11826절은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오실 그이라는 헬라어 단어와 시편 11826절의 오는 자의 헬라어 단어가 동일한 단어로 쓰였습니다. 이 시편 찬양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국가적 절기인 초막절과 유월절에 불렸던 찬양입니다. 이 두 절기는 모두 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던 날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에서 두 절기는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과 새로운 왕의 출현에 대한 소망이 당연하게 따라옵니다. 이런 왕에 대한 소망은 누가복음 1938절에도 나타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시편 11826절의 말씀이 여기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누가복음은 719절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물론, 이 퀴리오스라는 표현을 일반적인 주인을 표현할 때 쓰이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헬라어 구약성경에서는 여호와를 퀴리오스, 주님의 이름으로 사용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맥락에서 누가복음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주의 이름으로 오실 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의 이 질문은 그냥 해본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맥락을 알면 성경이 달리 보입니다. 꼭 성경이 아니라도 우리는 그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슬램덩크라는 애니메이션이 개봉했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드물게 20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습니다. 제 또래인 30-40대 남자들이 지금 열광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을 처음보면 재미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초까지 원작으로 된 이 작품을 다 본 분들은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강백호의 대사가 왼손은 거둘뿐이 대사의 의미를 원작을 안 보고 처음 본 분들은 그 의미를 못 느낄 겁니다. 원작의 배경을 많이 보고 들은 사람들이라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올 겁니다. 그리고 원어를 알면 이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변역해서 강백호입니다. 아주 유명한 이름이지요. 일본어 원어로 이름은 사쿠라기 하나미치입니다. 뜻은 벛꽃이 화려하게 꽃피우고 퇴장한다는 뜻이죠. 슬램덩크라는 그 작품 자체가 주인공의 이름처럼 벛꽃이 화려하게 꽃피우고 그 짧은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의미가 확장되어 그 시절 30, 40대의 벛꽃처럼 화려하게 꽃피웠던 짧은 추억들을 담고 있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처럼 원어와 배경을 알면 작품이 더 깊게 보이듯이 성경 역시도 원어와 배경을 알면 훨씬 더 깊게 보입니다. 정치적 의도가 짙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답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어떤 배경을 담고 있을까요? 이사야 355-6절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사야의 이 묘사는 유배생활에서 돌아오고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대한 묘사를 하는 본문입니다. 이사야는 이 마지막 시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고 모든 것을 치유하시는 모습을 전했습니다. ,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는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셨던 이사야 61장 역시 떠오르게 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께서 이사야 35장과 61장을 떠오르게 대답하신 것은 해석할 수 있는 성경의 틀을 제공해주신 겁니다. 군사적인 정복 이미지를 피해서 치유와 회복할 것이라는 것에 집중됩니다. 23절 나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는 자들 복이 있도다라는 선언은 군사적 활동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기대한 자들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대답이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을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오실 그이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시편 118편이 가리키고 있는 오실 그 왕, 할렐 시편이 불릴 때마다 고대되었던 바로 그 종말론적 구원자이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던 그분이시다. 그러나 다가오는 그분의 나라는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힘의 관점이 아니라, 신적 자비와 회복에 관한 이사야의 이미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대답과 행동은 우리에게 세상 속에서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행동하셨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강대 강으로 흐르는 이 한반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방향이 결정됩니다. 남한과 북한, 둘 모두가 국지전이 일어난다면 서로가 결집하며 두 권력자들의 지지도가 오르는 상황이기에 폭력의 위험성이 극도로 높은 시기입니다. 너무나 사탄이 좋아할 만한 상황입니다. 또한, 니편 내편, 서로가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여느 때보다 높습니다. 이 시기 우리의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며 예수님이 행동을 보이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교회들이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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