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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문] 5분 설교 - 디모데후서 3장 16절, 딤후 3:16, 딤후 3:16[성경 I 종교개혁 I 오직 성경 I 오직 믿음 I 오직 은혜 I 청년 I 분노]

by 카리안zz 2022.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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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읽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 16절)

 

 

15171031일을 기점으로 유럽이라는 세상에 변화의 소용돌이가 쳤습니다. 이 소용돌이와도 같았던 개혁의 세 구호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직접 성경에서 권위를 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의 기류도 있었습니다. ‘에드 폰테스로 유명한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이 인문주의 운동은 성경과 교부들의 문헌을 직접 원문으로 읽는 힘이 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은 불가타라는 라틴어 성경을 기준으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원어 성경인 그리스어 성경으로 보니 불가타의 번역오류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교회의 관습과 신념들 다수가 불가타 역본 본문에 기초했기에 이는 대단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기존의 관습과 신념을 지키려는 보수파들은 매우 당황하며 놀랐고, 기존의 관습과 신념을 없애고 싶었던 개혁파들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대표적인 불가타의 번역오류가 이런 것입니다. 마태복음 417절 말씀이 불가타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고해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이 고해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것으로 바르게 알고 있습니다. 기존에 고해하여라는 고해성사라는 교회의 의식을 강조하는 것이 되지만 회개하라는 번역은 개인의 내적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기존 교회 의식의 필요성과 타당성에 중대한 이의를 제기한 셈이었지요.

가톨릭파와 종교개혁파들의 싸움은 이렇게 원류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더 성경적이며 교부들의 가르침에 맞는가 하는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종교개혁자 칼뱅도 이런 논쟁 속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스위스 베른이라는 큰 도시에서 종교개혁자들과 가톨릭 성직자들 간의 토론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파의 대표는 기욤 파렐과 피에르 비레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름 있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아니었지만 파렐과 비레는 이름값에 비해 토론에서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토론이 있고 4일의 시간이 지나고 결국 칼뱅이 나섰습니다. 토론의 흐름은 그때 바뀌었습니다. 지역 가톨릭 대표들이 종교개혁자들이 교부들을 교리 문제에 권위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교부들을 멸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칼뱅은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반박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보다 교부들을 더 존경할 뿐만 아니라 교부들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그 자리에서 키프리아누스가 쓴 편지, 크리소스토무스의 글을 자세히 인용해 버립니다. 이는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서 교부들의 저술들을 정확한 출처까지 짚어 가면서 술술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상대 측 주장의 신빙성을 그 자리에서 박살 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칼뱅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칼뱅의 등장과 그의 사상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장로교 교인인 우리는 그 흐름 위에 서 있습니다. 칼뱅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기독교 강요>라는 책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기독교 입문서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입문서로 시작했지만 후에는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견줄만한 책이 되었지만요. 칼뱅이 이 책을 쓴 목적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려는 신학생들이 아무 지장 없이 말씀에 쉽게 접근하고 계속 연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고 훈련하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깐 칼뱅은 성경 안내서를 세상에 남겼습니다. 뛰어난 성경 주해가였던 칼뱅이 목회자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에 남긴 선물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이야말로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가 정말 중요한 세상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성경에 대한 강조는 종교개혁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역시도 성경에 대해서 말합니다. 기독교가 처음 시작하던 시기에도 성경을 교육하는 것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구약 성경의 말씀을 모르고 어떻게 기독교의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로마서 역시도 아담과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구약의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에겐 필수적이었습니다. 복음을 이해하려면 더더욱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이교도 출신의 신자들이 성경 본문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경 교육의 기회들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성경 교육이 없으면 구약 성경에 대한 인용은 이교도 출신 신자들에게는 아무 뜻 없는 소리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한 희망과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초기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과 복음서의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성경 말씀에 관심을 갖고, 그 내용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할 또 다른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아마도 성경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마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된 초기부터 개인으로 또는 공동으로 성경을 읽고 토론하는 활동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성경 봉독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컷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추론의 신빙성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우리는 이를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들은 무슨 메시지를 가르치고 있을까요? 지난 주 휴가 차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가 떠오릅니다. “선한 마음을 가지면 복받는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성경본문은 시편이었지만 시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 기독교 작가가 은퇴를 시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더 이상 성경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서 였습니다. 위로와 힐링을 바라며, 듣고 싶은 예수님의 말씀이라지만 그 자리에 오은영 박사님을 바꿔 넣어도 말이 되는 그런 이야기들을 기독교 청중들이 듣고 싶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관한 이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작품 후기에 쓴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메시지도 장사치의 말들이 되어야 할까요? 어느 날 독서 중 공감하지 못하기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온다는 내용을 읽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제법 심각해 보였지만 저는 그 부분에 이런 메모를 했습니다. ‘코로나 시대 이후 어떻게 될까? 공감을 팔아야 할까? 공감 잘하는 아이가 연봉이 더 높거나 명문대에 간다고 팔면 이 위기가 극복될까?’ 그렇게 메모를 했고 한켠으론 교회도 사람이 없어지는데 교회오면 공감하는 아이가 되니 연봉이 높아지고 명문대로 입학할 수 있을 거란 메시지를 전해야 할까?란 우스운 메모와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우습게 그 메모를 쓴 뒤 몇 달 후 노골적으로 시장의 메시지가 적힌 책을 만났습니다. 무려 EBS 공영 방송에서 나온 책이었기에 더욱 충격은 컷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종교개혁 시기에 성경에 대한 가르침은 늘 있어 왔습니다. 아니, 종교개혁의 시기에는 성경의 가르침이 세상과 종교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2022년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교회에게도 해당될까요? 우리는 종교개혁주간을 맞이해서 다시 한 번 그때를 떠올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의 메시지가 비록 사람들이 찾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이 시대지만. 세상이 하는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혹하는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성경을 외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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