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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송용원 - 칼뱅과 공동선[IVP I 프로테스탄트 사회 윤리의 신학적 토대 I 하나님 형상 I 성화 I 율법 I 교회 I 인류]

by 카리안zz 2023.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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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이란 무엇일까
?

 

공동선은 개인과 사회 사이에 있는 선이며 결코 개인을 배제하거나 전체만 우선시하지 않는다. 또한 공동선은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선으로, 모두에게 바람직하고 누구라도 접근해서 얻을 수 있는 쉽고 단순하고 자연적인 개념이기에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베푸시는 햇빛과 비와 공기 같은 일반은총과 관련이 깊다. 즉, 공동선은 모두에 이익이 되는 일반적 조건을 가리킨다.(18)

 

공동선과 공익은 구분이 된다. 공동선은 개개인에 대한 강조가 있고 공익은 전체에 더 강조를 둔다. 여튼, 위의 정의를 보면 공동선이라는 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개개인과 전체를 조화롭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인들은 왜 공동선을 지향해야 될까? 이 책은 거기에 대한 대답을 칼뱅에게서 찾는다. 칼뱅은 가장 기초되는 근거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한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두워지고 흐릿해진다 할지라도 그 형상 전부가 지워지지는 않게 하셨다. 칼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는 남은 하나님 형상을 밤하늘에 깜박이는 별빛 같다고 했다. 이 별빛은 빛이지만 어둠에 휩싸인 희미한 빛이다. 그럼에도 그 밤이 칠흑같이 캄캄하지는 않다. 적어도 빛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빛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는 않도록 하는 정도의 빛은 밤하늘에 떠 있다. 그 정도의 ‘하나님 형상’은 모든 인간에게서 볼 수 있다. 별빛 비유는 인간이 공동선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아름답게 설명한다.(53)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성화로 넘어간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 부정이다. 여기에서 자기부정이란 바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칼뱅은 이 자기부정을 하나의 표지로 보았다.

 

자기부정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가 거룩하게 연합한다는 시작을 알리는 처음 표지다. 그것은 결정적 단일 사건에 머무르지 않으며, ‘육 죽이기’와 ‘영 살리기’를 계속 반복하는 과정이다.(85)

 

여기서부터 부서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이고, 내가 주인 삼아 통치하는 것을 부정하니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것이다. 이제 나타나는 모습은 자기부정, 희생이다. 공동체의 유익이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동선에 대한 정의가 조금 걸렸다. 자기 유익도 포함하는 개념일 텐데 자기 부정은 자기의 유익도 포기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공익이 더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영적인 유익을 말하면 말이 되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여기였다.

 

즉, 칼뱅에 따르면 현세의 삶의 공익은 반드시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해야 한다. 공동선은 영원한 삶에 있는 영적 가치 위에 세워진다. 이 가치는 은총의 선물을 이웃과 나누는 행복 가운데 빛난다. 칼뱅은 그리스도의 품에 있는 신자들이 하늘에서 누리는 영원한 행복은 같을지라도, 행복을 누리는 영광의 정도는 이 세상에서 받은 성령의 선물과 다를 것이라고 보았다. 하늘에서 받는 보상의 기준은 이 땅에서 교회와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받은 선물을 얼마나 올바르게 썼는지에 달려 있다.(106)

 

나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에서 상처의 흔적이 있다는 것에 주목을 했다. 십자가에서의 상처가 흔적에 남아있다. 부활한 몸에 남은 그 상처의 흔적은 영원에 닿아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남을 낫게 여기라 말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말했다. 그렇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무엇보다도 남을 위한 희생이었다. 남을 위해 희생한 삶이 영원과 닿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희생적 삶이 영원과 닿는 것 아닐까. 칼뱅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를 설명하는 듯하다. 여하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서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지 않은가. 우리는 그러한 몸이다. 칼뱅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교회와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얼마나 올바르게 썼는지가 영원에 닿아 있다고 한다.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따르라는 것에서 성령의 선물까지 시선이 넓어 진다. 삼위 하나님의 사귐이 바로 이러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세상을 위한 사역이였다(93). 삼위 하나님은 구원 사역 속에서 서로를 내어주신 사랑을 보이신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 내어주심의 사랑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동선을 이루는 삶을 이룰 수밖에 없다.

 

쉽게 읽힌 책은 아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제법 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의 전통을 가진 우리에게 왜 공동선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는 충분히 배운 듯 싶다. 그것을 칼뱅에게서 배운다. 마지막에 나오는 프랑스기금이 특히 눈에 띈다.

 

물론, 칼뱅 시대 이교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김민석 박사의 논문을 보니 기독교 세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칼뱅은 구분을 했다지만 오늘날에 얼마까지 다리놓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독일같이 기독교민주당이 정치를 이끈다면 모를까 우리나라는 전광훈이라는 사람이 기독교정당을 만드는 시도를 했기에 독일과 같은 세상이 오려면 몇 백년은 뒤어야 겠다. 물론, 영영 오지 않을 수도. 그만큼 낯선 이 극동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과 공동선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 정치와 같은 큼지막한 이야기는 그렇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이 책에서 오늘날 현실적용이 자세히 없는 게 아쉽다. 오늘날처럼 자기 중심적이여야 한다는 시대에, 너 자신만의 이익을 가장 중요시하라는 이 시대에, 공동선을 말한다는 것이 의미가 깊다. 복음을 전한다는 건 이제 세상의 찌꺼기가 되는 시대인가 싶기도 하다. 찾는 이 없을 테니.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시며 그분의 일들을 이루어 나가시고 계신다. 현실과 세상이 더욱 우리에게 혹독하고 어려워 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주님, 그럼에도 공동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힘과 견딜 수 있는 힘, 지켜나갈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부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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