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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톰 라이트 - 예수의 도전

by 카리안zz 2020.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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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낀 점

 작년 1월에 읽었던 책일 이제야 간단하게라도 적어 본다. 얼마 전에 다 읽은 책들이 <만들어진 예수>와 <역사적 예수 논쟁>이었는데 지금 다시 <예수의 도전>을 본다면 새롭겠다. 잠깐 메모와 책 속 중을 쓰는데도 새롭게 보이는 점들이 많다. 

 이 책 역시 느낀 점보다는 정리가 필요한 책이긴 한데... 언제 과제나 역사적 예수 논쟁 정리할 때가 있으면 한 번 다시 읽어서 정리해봐야겠다. 근데 이제는 이 책 보다는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를 정리할꺼 같지만!ㅎㅎ 쨋던 톰 라이트의 문제제기는 시원하다! 작년 서론만 읽고 쓴 글로 느낀 점을 맺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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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다 쩐다.
톰 라이트의 '예수의 도전'은 여태 읽었던 그의 어떤 책보다 울림이 크다.
번역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론만 읽었을 뿐인데 줄친데가 많다.ㅠㅠ

"많은 그리스도인이 겉으로만 인간처럼 보이는 예수를 영접했고, 겉으로만 인간 저자들이 쓴 것처럼 보이는 성경을 읽었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는 상관이 없는 구원, 완전히 이원론적인 구원을 찾았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적인 기독교에 대항해 싸운 어제의 전쟁에서 이기려고 헌신했다가, 그와 전혀 다를 내일의 전쟁에 참전하지 못한다면 재앙이 닥칠 것이다."(p. 29)

여기서 어제의 전쟁이 바로 계몽주의의 공격이다. 
계몽주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에 정통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즉, 예수를 일종의 신적 영웅으로서 세계를 성큼성큼 활보하셨고, 인간의 의문에 아랑곳하지 않으셨고, 소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적이 없으시고, 스스로를 현 체제의 바깥에서 온 존재로 인식하셨고, 사람들에게 약한 세상을 피해 전혀 다른 영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법을 알려 주시는, 진정한 인간이 아닌 반신반인의 존재로 보는 믿음과 행동의 패턴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p. 28)

그렇다.
내가 불편했던 지점이 이 지점이었다.
라이트가 명확하게 말해준다.
예수를 진정한 인간이라고 보지 않는 그 불편한 지점 말이다.
결국 이 지점은 
"이는 사람들이 은밀한 지식(gnosis)을 얻음으로, 잃어버린 은밀한 정체성을 재발견해서 현 세상을 벗어나 전혀 다른 영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린다는, 다양한 면을 지닌 사고 및 영성 체계를 일컫는다."(p.29)

아 그렇다. 정말 그러하다.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왜 중요한지 나는 은연 중에 느꼈던 것일까. 
역사적 예수 탐구에 나는 왜 이리도 끌렸는지
바로 오늘 라이트의 글에서 알게 된다. 
내가 느꼈던 이 갈증을 이리도 명쾌히 설명해주다니.

한국은 서구의 맥락에 서 있지 않은데 왜 이리 공감이 되는지 모르겠다. 
아니 은연중 그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라이트는 강하게 말한다. 
"역사적 연구는 결코 사복음서를 갖다 버리고 우리가 꾸민 다른 이야기로 대체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복음서 이야기에 대한 기존 해석은 심각한 도전과 의혹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텍스트를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해석하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이 안건은 은사주의 운동은 물론이고 프로테스탄티즘, 가톨릭, 복음주의, 자유주의 등 모두와 관련이 있으므로 모든 교단이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텍스트를 새로운 방식으로 읽기 위해서는 당연히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p. 33)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나는 예수를 탐구하는 일에 참여하면 할수록, 개인으로서 또 성직자로서 더 많은 도전을 받는다. 내가 발견하는 내용이 전통적인 정통 교리를 깎아내리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자료에서 발견하는 더 풍성한 정통 교리가 나 자신과 모든 회중에게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p. 40)
"탐구자가 된다는 것은 곧 제자가 되는 것과 같다. 이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로 이끄시는 대로 어디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좋으면서도 나쁜 소식은,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가 역사를 올바로 이해했음을 보여 주게 된다는 것이다."(p. 40)

마치 황정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드루와 드루와" 하는 것 같다. 흑흑 ㅠㅠ 이 자신감!

아! 서론은 이렇게 읽힌다. 
"역사적 예수 무섭지 않아요.^^"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된다. 두근 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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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많은 그리스도인이 겉으로만 인간처럼 보이는 예수를 영접했고, 겉으로만 인간 저자들이 쓴 것처럼 보이는 성경을 읽었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는 상관이 없는 구원, 거의 완전히 이원론적인 구원을 찾았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적인 기독교에 대항해 싸운 어제의 전쟁에서 이기려고 헌신했다가, 그와 전혀 다를 내일의 전쟁에 참전하지 못한다면 재앙이 닥칠 것이다. (p. 29)

- 루이스의 책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 p. 54

 

예수의 동시대인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도덕 기준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실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예수께서도 마찬가지셨다. 그들과 예수께 행실이란 하나님의 주도권과 언약에서 마땅히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p. 61)

- 새관점!

 

예레미야는 성전의 개혁을 옹호하지 않고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다. 여기에서 '강도'로 번역된 그리스어 '레스테스'는 요세푸스가 자주 사용했던 것으로, '도적'이나 '반역자'를 의미했다. 요세푸스는 '도적의 굴'이란 표현을 두 차례나 사용하는데, 그것은 절박한 혁명가들이 은신처로 사용했던 진짜 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p. 93)

- 성경의 내적 근거와도 일치하는가? 그러니깐 예레미야의 맥락도 그런 의미인가?

. 책 속 中

 

 

다시 말하지만, 예수에 대한 역사적 탐구는 기독교 제자도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 시대에 속한 우리가 과연 얼마나 예수에 관해 알 만한 것을 모두 알고 이해할 만한 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지, 예수가 누구셨고 무슨 말을 하셨고 무슨 행동을 하셨고 그것들이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는 언제나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굳게 지켜 왔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탐구하는 일의 일부로서, 아니 날카로운 일면으로서 예수를 계속 탐구해야 하는 데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 (p.16)

 

계몽주의는 역사와 신앙이 상반되므로 어느 하나에 호소하면 다른 하나에게서 멀어진다고 말한다. 그 결과 역사학자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늘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고, 신자들은 역사학계에서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그 본연의 모습을 찾으면 이런 이분법이 사라진다. (p.16)

 

18세기 계몽주의가 역사적 기독교에 던진 도전은 '잘못된 방식으로 필요한 질문을 제기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진영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전자는 역사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계몽주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후자는 계몽주의의 질문 제기 방식이 잘못된 것을 알고는 역사적 질문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p.20-1)

 

예수는 일종의 신적 영웅으로서 세계를 성큼성큼 활보하셨고, 인간의 의문에 아랑곳하지 않으셨고, 소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적이 없으시고, 스스로를 현 체제의 바깥에서 온 존재로 인식하셨고, 사람들에게 악한 세상을 피해 전혀 다른 영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법을 알려 주시는, 진정한 인간이 아닌 반신반인의 존재로 보는 믿음과 행동의 패턴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p.28)

 

우리가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이 이야기를 세상에 구현해야 할 공동체의 일부로서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나는 예수를 탐구하는 일에 참여하면 할수록, 개인으로서 또 성직자로서 더 많은 도전을 받는다. 내가 발견하는 내용이 전통적인 교리를 깎아내리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자료에서 발견하는 더 풍성한 정통 교리가 나 자신과 모든 회중에게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탐구자가 된다는 것은 곧 제자가 되는 것과 같다. 이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이끄시는 대로 어디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좋으면서도 나쁜 소식은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가 역사를 올바로 이해했음을 보여 주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예수 탐구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 탐구를 계기로 우리 시대에 교회가 예수와 하나님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될 것이다. (p.39-40)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갈망했다는 것은, 죽은 뒤에 천국에 자기 자리를 확보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는 뜻이 아니다. 마태복음에 자주 나오는 '천국'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 나라'로 표현되는데, 이 어구는 하나님의 백성이 죽은 뒤에 갈 '천국'이란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국의 통치, 곧 하나님의 통치가 현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의 동시대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있는 그분의 세계에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문제는 과연 "어떻게, 언제, 누구를 통해 실현될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p.47)

 

이 비유(눅 15장)는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일어나는 일에 대한, 당시 상황에 딱 맞는 예리한 메시지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께서 버림받은 자들을 받아들이시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행위를 통해 일어나는 일에 관한 것이다. (p.55)

 

이 두 가지 비유와 그 밖의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다고 은밀하게 선언하셨다.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이었다. (p.56)

 

이런 식사는 예수께서 품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무엇인지 뚜렸하게 보여 주었다. 즉, 다른 왕국의 의제들을 전복시키는 행동이었다. (p.60)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상황을 창조했고, 예수께서는 청중에게 이 새로운 상황이 요구하는 새로운 백성, 곧 이 새 세계의 시민이 되라고 도전하셨다. (p.61)

 

예수를 따라 정치적인 위험 지대로, 어쩌면 죽음 속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이었고 이런 헌신을 통해 이스라엘으 ㅣ하나님이 현재의 환난을 거쳐 새 날의 아침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 (p.64)

 

나는 예수께서 제2성전기(주전 6세기 - 주후 1세기)의 유대교 세계관에서 표준 상징으로 자리잡았던 것들을 암시적`명시적으로 공격하셨다고 본다. (p.76)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말론이었고,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다... 기존의 방식대로 전통을 해석하는 것은 멸망에 이른느 길이므로 전혀 다른 해석을 수용하라는 도전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겉으로는 패배의 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승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하셨다. 바로 이 도전이 상징적인 행동을 등에 업고 나타남으로 예수와 바리새인 사이에 열띤 논쟁을 불러왔고, 결국은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낳았다. (p.80)

 

그분이 하나님 나라의 의제를 내세워, 조상의 규약으로 인한 과대망상적은 자기방어를 내려놓고 세상의 빛과 이 땅의 소금이 되라는 소명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셨기 떄문이다. 따라서 예수와 당시 유대인들 간의 충돌, 특히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은 서로 다른 종말론적 믿음과 기대로 인한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라는 측면에서 봐야 한다. (p.81)

 

그분은 성전 예배나 제사를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고서 죄를 용서하셨는데, 이런 행위는 마치 오늘날 한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여권이나 운전면허증을 발부하는 것과 같다. 그분은 공식 체계를 무시하고 암암리에 새로운 체계를 세우겠다고 주장하신 셈이다. (p.92)

 

예수께서 유대교의 상징들을 반대하신 것은 그 자체가 나쁘거나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셔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나타날 때가 왔다고 믿으셨고, 그와 더불어 그동안 민족의 상징들을 차지하고서 그 배후에 온갖 불의를 숨기던 의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새로운 의제가 드러났다고 생각하셨다. (p.95)

 

예수께서 이 새로운 가족을 구상하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치유와 축복을 선사하는 등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장면을 연출했다. 권력을 위험하게 생각했던 세상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p.98)

 

예수께서 베푸신 식탁 교제가 음식법을 대체했다면, 용서하라는 요구는 새로운 가족, 즉 하나님의 새 백성이 지닌 특징과 관련이 있었다. 즉, 예수께서 상징적인 토라를 재정의하신 것이다... 그 기도(주기도문)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유대교 내의 다른 운동들과 차별화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용서받은 백성이자 하나님의 참아들과 딸이라는 신분을 부여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p.99)

 

십자가에 달린 자칭 메시아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분의 진정한 메시아로 여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진정한 메시아라는 믿음은 아주 초창기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바울 시대에 이미 '크리스토스'란 단어가 다양한 형식으로 예수라는 이름에 따라붙었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위험한 짓인 줄 알면서도 왕족의 색채를 지닌 이 단어를 계속 사용했다. 왜 그랬을까?

 단순하게 "부활 때문이다"라고 답할 수는 없다. 제2성전기의 유대교 세계를 생각해 보면, 예수의 죽음 이전에 그분이 메시아라는 생각을 품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부활하셨다 해도 메시아라는 믿음을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컨대, 마카비후서 7장에 나오는... 따라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첫째,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의 호칭이 말하듯 자칭 메시아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둘째, 십자가는 그분이 메시아란 주장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메시아이슴을 확증해 주었다. (p.108-9)

 

Ⅳ. 목차

 

서문

 

1. 예수 연구의 도전

2. 하나님 나라의 도전

3. 여러 상징의 도전

4.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5. 예수와 하나님

6. 부활절의 도전

7.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엠마오로 가는 발걸음

8. 세상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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