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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이한수 - 바울 사도가 쓴 러브레터

by 카리안zz 2020.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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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년 수업 레포트 교재였다.

총신에서는 바울신학의 거두로 불리는 분이라서

좋은 참고가 될 거 같아 도서관에서 빌리지 않고

구입을 했다. 

하워드 마샬의 제자라는 그 명성을 기대하며 읽었다. 

 

. 느낀 점

 

이한수 교수 책과 같이 읽은 책이 

톰 라이트의 에브리원 고린도전서 주석과 

권연경의 로마서 산책이다. 

함께 같이 읽어서 인지 글체가 눈에 보였다. 

이한수의 글체는 먼가 평이하다. 아무런 매력이 없다. 

독특함도 없으며 위트도 없으며 약간은 지루하다. 

그러나 권연경의 글체는 살아 있다. 본인의 생각이 맛깔나게 보인다. 

톰은 어떤가. 번역된 서적이라서 비교가 그리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글 전개는 앞서 내가 쓴 리뷰에 특징이 드러난다. 

(내 리뷰 '로마서 산책'에서 한 번 비교해보라. 톰의 글도 있다. 같이 그들의 문체를 보라)

 

나의 문제는 누구누구의 제자라고 하면

너무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 

던의 제자, 마샬의 제자, 김세윤의 제자,

밀리오리의 제자, 몰트만의 제자 등등 

분명 세계적인 신학자의 제자라면 

훌륭한 점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 명성은 잠시 내려놓고 연구의 성과를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겠다. 

 

무튼,

그러나 나름 좋았던 점도 있었는데 

그래도 국내 저자가 써서 그런지 읽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문체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인걸까?ㅎㅎ 

각 서적들을 나름 잘 정리가 되어있어서 좋았다. 

어쨋던 저자 역시도 그러한 점을 목적으로 썼다고 한다.(p. 707-10)

 

아, 저자는 쉽게 쓰려고 해서 그런지 학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어느 학자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p. 244 등) 

비전공자들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없겠지만 

전공자 입장에서는 누구의 의견인지 알 수 없는게 조금 아쉽다. 

이건 머 어쩔 수 없는 나의 아쉬움이다.허허 

 

 

. 메모

 

하나님의 의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다.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경험되어진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결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의를 필요로 한다(롬 3:22-23). 22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란 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란 표현을 중복시키고 있다. 후자의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이 믿음"이란 문구를 의역한 것이다. 이 소유격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주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성"을 뜻하는 말로 해석한다. 두 해석 다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성실성에 기초하며 믿는 모든 자들에게 경험된다. (p. 270)

-잉?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새관점 의견이 아니었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한수 교수는 새관점을 그리 비판적으로 보는 편이 아닌가?ㅎㅎ 

 

 

. 책 속 中

 

 

교회 내에서 심각한 윤리적 부패 행위가 존재하는데도 이를 묵인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을 근본적으로 망각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을 근본적으로 망각하는 것이며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정체성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교회는 신실한 권징으로서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p. 163)

 

그들은 (신약의 성례처럼) 다 같은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식을 먹었으며 그들은 다 모세의 인도 아래 세례도 받은 사람들이다(고전 1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다 멸망을 받았다. 바울이 무엇을 교훈하려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의식이 아무리 거룩하고 중요해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신뢰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궁극적인 운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p. 173)

 

초대교회의 만찬은 현대 교회가 행하는 그런 상징적인 식사가 아니라 실제 식사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집에서 만찬을 기념할 음식을 가져다가 공동으로 식사를 하였는데, 부한 자들이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먼저 갖다 먹고 가난한 자들은 가져온 것이 없어서 굶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사실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서 그의 구속적인 죽음을 기념하며(고린도전서 11:24, 25), 주의잔과 떡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교제의 식사였다. (p. 178)

 

바울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지적으로 승인하는 이지적인 믿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서 논증되는 살아있는 신앙이었다. 바울의 믿음을 너무 행위와 대치시켜 주지적인 신앙으로 만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칭의의 선물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칭의의 기초가 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머릿속의 공허한 믿음이 아니요 전폭적인 헌신과 순종의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나타나지 않는다면 의심스러운 믿음일 수밖에 없다. (p. 178)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간의 전형적 긴장이 발견된다. 성경 저자들은 이들 두 언어 중에서 한 쪽 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긴장의 한쪽 요소만을 강조하면 그릇된 신관에 빠지게 된다. 신적 주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면 하나님은 폭군적인 존재가 되고, 인간의 자율만 강조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에 제한된 우유부단한 존재가 된다. (p.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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