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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김세윤 -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by 카리안zz 2020.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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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소개하는 글을 볼 때면 붙는 수식어가 있다. '세계적인' 신학자 김세윤! 톰 라이트, 제임스 던과 같은 새관점 학파들과 논쟁할 정도로 그는 확실히 세계적인 신학자이다. 얼마전 그의 인터뷰를 봤다. 한국에 있었던 그 시간이 학자인 그에겐 잃어버린 12년이라고 한다. 만약 그가 12년간 공부에 더 집중했더라면...허허

 어찌 되었든 한국인으로 복음주의권에서 이토록 저명한 학자가 있다는 뿌듯함에 김세윤 교수님의 책을 구입해 한권 읽었다. 그 책이 바로 <신약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 느낀 점

 

 역시 우리에겐 뛰어난 성경교사가 필요하다. 성경에 쓰인 표현들을 자세하게 왜 쓰여졌는지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는 세세히 알려준다. 성경의 문맥과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줄 적합한 사람들은 성경신학자들이라는 생각이 더 굳건해졌다(4. 책 속 중 참조). 이 책은 느낀 점을 나열하기 보다는 챕터씩 요약을 해서 정리해야 할 책이다. 엄밀한 학술 서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찬 지식들이 많기에 요약하며 정리가 필요하다. 아마 성경 공부를 한다면 이 책도 리스트에 꼭 넣어야겠다. 

 또, 한국의 학자가 쓴 책이기에 우리의 성경보는 약점을 누구보다 잘 캐치해서 올바른 길로 이끈다. 성경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표현하듯이 김세윤 박사님은 근본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많이 당하셨는데 ㅠㅠ 근본주의자들을 타겟으로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p. 57, 67-101, 127-8을 읽어보셔용! 챕터 3에서는 제가 "김세윤 교수님의 돌직구"라고 기록했네용ㅎㅎ)  

 

 

. 메모

 

파괴력이 제일 큰 우상숭배는 무엇입니까? 바로 재물을 섬기는 맘몬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이 형제를 원수가 되게도 하고, 사회 계층들 간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나라들끼리 전쟁도 하게 하지 않습니까? 또 그것이 인간성을 황폐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마태복음 6:24에 예수께서 "누구도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p. 51-2)

-신참자와 연결(이렇게 메모되어있는데 아마 돈으로 생긴 갈등이 극단적으로 일어난 이야기를 펼친 책이 바로 신참자라서 그런갑다.)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접속사 "왜냐하면"을 빠뜨려서 뜻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우리 개역성경에 이렇게 접속사를 빠뜨려 논리적 흐름을 잘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함) (p. 77)

-ㅠㅠ. 헬라어 강독하면서 많이 느낌

 

5) 가부장적 제사장 개념의 오류 (p. 80)

-김세윤 박사님의 계속된 돌직구ㅠㅠ 당한게 많으시니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ㅇ벗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까 함부로 경솔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의 문제는 성경 말씀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어 율법주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p. 86)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과의 평화를 위해서 성전세를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p. 130)

-어이쿠ㅠㅠ 예수님! 왜 타협을 하십니까ㅠㅠ(근본주의 버전)

 

그러나 1950년대부터 학자들이 브레데의 '비밀 명령이론'을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마가복음에 실제로 나오는 비밀 명령들을 더 자세히 분석해보니까,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항상 자신의 정체성을 비밀에 부치라고 함구령을 내린 것이 아니고, 도리어 자신의 정체성을 널리선포하라고 하기도 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5장에 예수께서 거라서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나서 그에게 동네에 가서 자신이 어떻게 치유했나를 널리 퍼뜨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밀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p. 136)

-그전까진 몰랐나? 이걸 이념적 읽기(?)랄까. 머랄까?ㅎㅎ

 

. 책 속 中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신앙을 이성과 동떨어진 것으로 신비화해서 지성인 성도들을 무력화시켜 목회하기 쉽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왜곡되고, 사실은 발생하지 말아야 할 신학적 문제드를 가지고 고민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이단 사설에 휩쓸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꾸 신앙을 미신화하고 복음을 세속화하여 온갖 부작용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을 피하려면 성경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p. 14)

 

예수께서 자신을 다니엘 7:13-14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니엘의 환상 중에 하나님의 어좌 앞에서 천사들이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괴롭히는 이방 왕조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그런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으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임받습니다. (p. 16)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더러운 자들과 교류하면 내가 더럽혀진다"는 종교의 일반적인 원칙에 의해서 "예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시니까 예수가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을 뒤집어서 "죄인들이 예수와 먹고 마심으로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합니다. (p. 29)

 

그런데 '의'란 근본적으로 관계론적인 개념이어서, '무죄 선언됨'은 동시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 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인된 사람은 죄용서(무죄 선언)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 그 속에 서있게 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피흘림으로, 즉 '속죄제사'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p. 32)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사탄의 사주(통치)를 받아 하나님께 대항하고 자기주장하며 살아온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고 그들을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시키는 사건, 그들을 하나님의 아비/왕/목자/신랑 노릇 해주심을 덕 입는 하나님의 새 자녀들/백성/양떼/신부가 되게 하는 사건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p. 33)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부활시키신 것을 보고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죄인들을 위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라고 하며 우리를 하나님 백성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 구원을 덕 입게 하는 사건이라고 가르친 예수가 옳다고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p. 36)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셨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오신 종말의 구원자이시다, 곧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상속받은 아들이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주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p. 38)

 

예수가 실제로 하신 일, 즉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 스스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바쳐 우리 죄를 씻어버리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심(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받게 함) (p. 38)

 

우리말에는 "시인하게 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주 약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예배 때 "주여" 하고 부르짖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부르짖는 행위는 그의 도움을 청하고 그의 순종을 서약하는 행위입니다. 예수가 '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니까 온 우주와 우주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에게 무릎 꿇고 예배하며 "예수가 주이시다"라고 부르짖게 했다는 아주 아름다운 시입니다. (p. 42)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중계명의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p. 51)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했고, 그 선포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이 창조하고 모은 하나님의 백성 위에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치고, 그들이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통치)를 받으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지금 벌써 구체적으로 현실화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나라에서 '속량'된 사람들, 곧 하나님의 나라로 이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인 성령을 통해서 현재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깨우쳐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힘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인'된 우리가,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 우리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힘입어 사랑의 이중 계명에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로 받으면 우리는 '의'를 행하는 '의인'으로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고, 우리의 '의'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회에 정의와 평화와 자유, 즉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p. 53-4)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에 대한 서술, 즉 복음 선포에 근거해서, 선포된 복음에 힘입어 의인된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사람들, 하나님 통치 아래 놓인 사람들이 이제는 실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윤리적 요구입니다. (p. 65)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1장을 대면서 실제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 "여자가 교회의 공예배에서 설교를 하되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라"는 것은 터득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남자는 머리/권위자, 여자는 순종해야 할 자"라고 하는 '창조 질서'를 가르치려 한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서신서들을 읽을 때 본문의 의도를 잘 살펴야 합니다. (p. 72-3)

 

여러분이 데살로니가나 고린도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사회학적 여건을 상상해 보십시오. "동방의 예루살렘에서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는데, 우리가 그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는 바울의 전도단이 고린도나 데살로니가에 가서, 장터나 광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을 강연하고는 돈을 걷었다고 한다면, 고린도인들이나 데살로니가인들의 눈에는 바울의 전도단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유랑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파의 한 부류쯤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복음은 당시 헬라 철학의 일종으로 오해 되었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를 위해서 복음을 과격히 차별화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복음 선포 방식을 스토아 또는 냉소주의 철학자들의 방법과 차별화해야 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값없이, 무료로 선포함으로써 복음의 은혜성을 시위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천막 공장에 들어가서 가죽을 다루고 천막을 짓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무료로 선포한 것입니다. (p. 88-9)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 선포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계를 얻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불순종한 것입니까? 문자적으로는 불순종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의 문자를 거스름으로써 그것의 정신을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의 문자가 아니라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라는 그 말씀의 정신을 실현한 것입니다. (p. 89)

 

그런데 근본주의적 신앙 양태(율법주의적, 문자주의적 경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박탈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일수록 더 자유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가르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이중계명! 그 외에는 자유입니다! 성경에 쓰인 대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의해 우리의 신학적 선입견이 고쳐져야지, 우리의 신학적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내 신학적 선입견에 맞추도록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p. 101)

 

또, 눅 2:1-14과 행 28:30-31의 수미쌍관을 통하여 메시아(그리스도) 예수를 가이사 아우그스도와 대조시킵니다... 이렇게 가이사의 로마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대조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가 정치적 해방자라기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해방(죄와 불의의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메시아임을 보여 줍니다... 즉, 로마의 가이사를 대치하는 이스라엘의 '가이사'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해방과 평화를 가져오는 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나라(통치)의 대행자임을 보여 줍니다. (p. 196)

 

단지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로마의 체제에서 스스로의 신앙적 정체성을 지켜야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박해를 바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p. 215)

 

그리고 상징들, 그림들을 해석할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은 구약 체계에서 나오고, 근동의 신화에서 나오기도 하고, 헬라 신화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배경을 알아야 하고, 당시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하며, 특히 요한계시록 내의 구조적인 특징들을 자 이해해야 합니다. (p. 232)

 

하나님께서 뒤틀리고 썩어진 만물을 종말에 바로잡을 수 있다는 소망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근본적인 신앙에서 나옵니다. (p. 238)

 

요한계시록에서 이 혼돈의 물들은 짐시이 일어나는 바다입니다(13:1).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짐승이 제거되며(19:20),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 망하며(20:10, 14), 그리고 바다가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21:1). 곧 파괴적인 악의 근원과 창조를 혼돈으로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마침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새 창조에서는,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를 어떠한 파괴적 악의 세력으로부터도 침범당하지 않게 영원히 안전하게 만드십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노아의 언약에 신실하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피조물에 대한 신실하심에 있어서 자신의 피조물들을 파멸의 물로부터 보호하시겠다는 노아 언약의 성취를 넘어 첫 창조보다 더 완벽한 새 창조를 이룬 것 입니다. (p. 241)

 

예수가 하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예수의 인성과 관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증거하셨고 또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도 이 증거를 계속 한다는 것입니다. (p. 247)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른 하나님의 백성(순교자들)의 최종적인 승리, 첫 창조보다 나은 새 창조의 완벽함. 이 두 가지가 요한이 천년 왕국의 그림을 통해 보여 주고자 했던 신학적 메시지입니다. (p. 259)

 

Ⅳ. 목차

 

머리말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복음의 핵심

 2. 사도적 복음 선포 양식들

 3. 바울의 예수 전승 사용과 그 교훈들: 고린도전서 7장-10장의 예

 4.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구조

 

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하나님의 복음, 네 개의 복음서들

 2. 마가복음

 3. 마태복음

 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5. 사도행전의 하나님 나라

 

3강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역사적 배경

 2. 책의 성경

 3. 구조상의 특징들

 4. 요한계시록이 선포하는 복음 

 5. 천년 왕국의 메시지

 6. 요한계시록에서의 하나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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