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주 선생님의 글을 읽었다. 평소 팟캐스트 '에고 에이미'를 들어서 그런지 김근주 선생님의 책을 언젠가 읽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구약의 숲이라는 구약의 개론서 책을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하나님 나라로 읽는 구약 이야기이기에 관심은 기대감은 더더욱 깊어졌다.
이 책, 느헤미야의 구약 개론서 교재를 다 읽었다.
Ⅰ. 느낀 점
김근주의 이 책은 구약 성경을 개론서 답게 간단하게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정리만 한 것이 아니라 챕터들이 한 편의 설교를 하는 느낌도 자주 들었다. 성경교사로서 그의 뜨거움이 한 것 느껴지는 책이다.
책의 시작은 성경을 읽을 때 주의점부터 시작한다. 특히나 구약 창세기를 해석할 때 올바른 툴이 있어야함을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창조과학에 대해서 김근주는 이렇게 친절히 설명해준다.
구약 말씀의 신학적 성격과 문학적 양식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구약 본문을 문자적으로 읽게 되면, 얼토당토않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구약의 본문은 '해석'될 필요가 있다.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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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46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과학적 주장의 타당성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무관하듯이, 과학의 타당성 여부에 기독교 신앙의 존립이 달려 있지 않다.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은 "어떻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창조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성경은 "누가"그리고 "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범주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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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과 과학이 주장하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사실에 근거한 그릇된 해석, 그것이 문제다. 과학을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가령 사회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어떤 이들은 경쟁과 적자생존을 절서로 여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당연시하며 기도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꿈꾼다. 이를 볼 때 우리의 싸움은 진화론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화론에 근거한 잘못된 해석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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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시기를 살던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문자가 확고하게 가리키는 천동설이 무너지면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리라 여겼지만, 이후로도 성경은 여전히 지동성과 공존한채 생생하게 그 권위가 살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교회를 지킨 것은 천동설로 대표되는 당시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었다. (p. 59)
앞서 구약의 뒷골목에서도 나왔듯이 그들의 성경 해석은 전제 자체가 오류이다. 우리는 성경 읽기에 해석이 필요함을 느끼고 자의적인 방법으로 성경 읽기를 이제 그만 둘 때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경을 읽기전 곁에 두면서 읽어가면 참 좋을 듯하다. 추천한다. 실력있는 저자의 간결한 정리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글빨까지 가진 이 저자의 책을 강추한다!
Ⅱ. 메모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면 이미 그것은 이루어진 것이며, 작지만 그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면, 이미 그들은 그 땅을 정복한 것이라고 보는 신앙적인 안목이 여호수아서의 이면에 전제되어 있다. 믿음이야말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히 11:1) 아직 정복할 땅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것은 지파별로 믿음을 가지고 차근차근 정복해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므로 땅이 아직 많이 남았음에도, 전쟁이 끝나고 안식이 찾아왔다는 진술은 지극히 담대한 믿음의 선포라고 할 수 있다. (p. 168)
-아! 그렇구나
Ⅲ. 책 속 中
그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살아있는 제물로 드릴 것을 권면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몸"이라는 단어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정신으로 혹은 영혼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p. 16)
2절에서 바울이 권하는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그리고 변화를 받는 것이다. 여기에 쓰인 동사들은 모두 '형태' 혹은 '모양'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이 세대, 이 세상의 형태를 따라갈 것이냐 아니면 그 혀태, 그 모양을 변화시킬 것이냐의 문제가 2절 말씀에 놓여 있다. 이 세대를 인정한 채 열심히 착하게 살자가 아니라, 아예 형태 자체를 바꾸는 것이 이 구절이 말하는 '변화'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사는 세상이 아닌, 기존의 틀이 아닌, 새로운 세계를 하나님께서 내려오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땅에 살면서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고 소망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형태와 틀이 아닌, 형태 자체가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 이 세상의 틀을 따라 살지 말고, 주님의 본을 따라 살라 (p. 16-7)
성경의 모든 기록의 목적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인물은 신앙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기술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자신들이 이해한 하나님을 전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그들의 글을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같은 믿음을 전하려 했다. 그런 점에서 본질적으로 성경의 글은 신앙고백이고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증언이다. (p. 22)
대속과 무르기에서 보듯, 하나님은 죄로부터 또한 잃어버린 우리 기업과 몸의 얽매임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시고, 새로운 회복의 삶으로 이끄신다. 하나님의 "구속"은 죄로 말미암아 팔린 이들 혹은 경제적 곤경 때문에 종으로 팔린 이들을 값을 치르고 되사셔서 자유인으로 만드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되사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구약성경에서 제사의 동물로 표현되고, 신양에서는 완성된 형태인 그리스도로 나타난다. (p. 24)
구전을 모으로 그것을 하나의 글로 남긴 이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작용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한낱 고대의 전설로 치부될 수 있는 이야기들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성과 그 구속사적 의미들이 부각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행하신 사건으로 기록되고 보존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감은 성경의 직접적인 저자들뿐 아니라, 여러 자료를 모으고 구성한 이드인 편집자들에게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 27)
그런데 시를 읽을 때에도 법전이나 역사책을 읽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읽는다면 그것은 애써서 시의 양식으로 표현한 의도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책들이 사람들에 의해 여러 양식으로 쓰인 글 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믿고 무조건 지키자고 덤벼들기보다는 차근차근 그 양식을 따지고 그 의미를 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p. 30)
성경의 글을 살펴볼 때,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2천 년 전 사람들의 표현양식일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환경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삶에 대해 느끼고 발견한 것을 표현하는 양식이 공통된 부분이 많다는 점은 성경의 시대로부터 수 천 년 세월의 간격을 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p. 32)
그러나 초대 교회가 즐겨 읽던 책들이었으며, 구약과 신약사이의 시대를 알려 주고, 그 사이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신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외경의 가치는 무시할 수 없다. (p.38)
그러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라기보다는 출애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가 온 인류의 존재를 설명하는 사건이라면, 출애굽은 하나님의 통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형성을 알리는 사건이다.(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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