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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한스 부어스마 - 신학자가 성서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IVP I 신학 I 조직신학 I 성서학 I 성경신학 I 성경 I 성서]

by 카리안zz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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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이다. 신학자가 성서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라니?! , 그러고보니 본문에선 성서학자, 책 내용에선 성경신학자라고 되어 있는데 흔히 보수적인 곳에선 성경신학, 아닌 곳에선 성서학이라 부른다(, 성서학 = 성경학으로 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성경학이 있으니).

 

그런데 다수는 성서학자도 신학자가 아닌가?라고 의문을 표할 것이다. 계몽주의 이후 성경 역시도 하나의 책으로서 연구를 하게 된다. 당연히 역사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하게 될 테고. 그래서 대두된 것이 역사비평이다. 대표적으로 역사적예수 연구가 여기에 해당한다. 복음서에서 묘사된 예수가 아니라, 신앙으로 덧붙여진 예수가 아니라 2000년 전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를 재구성해보자는 연구였다. 여튼, 신학에는 이런 역사비평의 작업이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고 본다. 이슬람은 이런 역사비평 연구는 어려울 테니. , 어느 날 인친께서 성경이 거짓을 말한다는 어떤 책 리뷰를 봤다. 신학을 조금만 인문학적으로 공부해도 그런 과장의 말들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곳보다 치열하게 역사비평하는 곳 역시 신학이니. 물론, 전광훈과 몇몇 대형교회 목사님으로 대변되는 기독교이기에 그런 책들이 설득력 있게 보일 것이다. 이건 한국교회 내부 안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성서학자 중에는 자신을 역사학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를 엄청난 자료들을 섭렵해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니깐. 신약학자가 아닌 역사학자라고 불리고 싶은 마음도 알 것 같다. 그래서 교회를 위한 신학이가 하는 논쟁이 있다. 이 다다음 웨인 믹스와 리처드 헤이스의 글을 리뷰해 볼 예정이다.

 

이 책에서 신학자라고 되어 있지만 조직신학자로 보면 되겠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성서학)의 갈등은 신학을 접한 초중반에 되게 느껴졌었다. 나는 성경신학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생겼다고 자부하는데 교리적인 설명으로 성경을 보는 게 영 마땅하지 않았다(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교리를 공부해보려고 하지만 영 머뜩하지 않다). 교리적 틀로 성경을 보니 뭔가 성경구절이 그 근거구절을 대는 방식으로 쓰이는 것 같았다. 문맥, 역사, 배경 등 이런 요소들을 살펴보질 않으니 말이다. 갈등은 이렇게 작동한다.

 

조직신학은 여태 전통적으로 구성된 것인데 성서학(성경신학)의 연구는 때로 그런 연구들을 무너트릴 때가 있다. 당장에 새관점 논쟁이 대표적이겠다. 그래서 조직신학자들은 성서학(성경신학)이 불편하다. ‘그런 개념이 정말 신약성경 당시에 있었냐?’라는 질문과 그런 개념은 후대의 생각이 침투된 시대착오적 해석이란 말은 얼마나 모독으로 느껴지겠나. 신학 전통을 전부 무너트리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두 책에 가장 궁금한 점이 성서학자에게 전통을 어떻게 바라봐야하는가였고, 조직신학자에겐 성경 당시의 새롭게 발견된 문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였다. 새롭게 발견된 문헌들로 인해 성서학은 엄청나게 발전했으니.

 

아쉽게도 이 책에선 그런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조직신학과 성서학의 관계보다는 한스 부어스마의 신학과 성경신학으로 보인다. 그게 참 아쉽다. 그는 역사비평의 전제를 비판하며 근원을 흔든다. 그것은 유명론이며 자연스레 기계론적, 유물론적 관점으로 변하는 입장이 역사비평이라고(90-1). 적절한 비판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는 성서학자들이 본문의 유일하고 정확한 의미를 제공하기 위해 엘리트, 학자의 길드”(180)의존한다 비판한다. 하지만 라이트의 말처럼 요즘 성서학자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하다. 누가 자신의 결과물이 객관적이라 말하나. 최대한 자료들을 섭렵해 내놓은 성실한 결과물이라 말하지.

 

부어스마는 성경의 몇 가지 핵심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량의 플라톤이 필요”(113)하다는데 이것 역시 엘리트주의 아닌가? 플라톤을 모르고는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나? 신학은 그렇다치고 성경을? 구약저자들이 플라톤을 알았을까?

 

여러 의문점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배운 내용도 만만찮다. 특히나 교부들의 이야기가 그렇다. 누군가에겐 성경 역시도 하나의 전례전 도구라는 그의 말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하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그의 말들은 무시할 수 없다. 어쩌면 그의 신학은 성서학과의 대화보단 현대사회와의 대화에서 빛을 발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책, <천상에 참여하다>에 그런 내용이 있을까? 있다면 읽어보고 싶어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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