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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이승우 -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복있는사람 I 신앙과 문학과 삶에 관한 사색 I 문학 I 신앙 I 삶 I 사색]

by 카리안zz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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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작가를 어떻게 알게 된 지는 모르겠다. 기독교인이면서 소설 역시도 깊이 있게 쓰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기독교 관련된 저작을 쓰기도 했다는 걸 알고 그 작품이 바로 복있는사람에서 나온 <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라는 책이었다. 처음에는 포이에마에서 나온 이동원 작가의 <완벽한 인생>같은 작품인줄 알았다. 그러고보니 한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으로 김승옥, 황현산, (한 명은 기억이 안 난다ㅠ)이라는 걸 들은 뒤 그들의 작품을 한 권씩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의 문체를 읽으면 자연스레 내 문체 역시도 아름다워질까봐서;;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이야 유명하니 바로 읽었고, 황현산 작가의 책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소설인지 알고 산 <밤이 선생이다>가 칼럼 모음집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세상을 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소설을 읽으며 문체맛(?)이랄까 그런 건 맛보지 못했다. 그뒤 더 도전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질 못했다.

 

이번 책 역시도 그런 실수가 있긴 했다. 소설가 이승우와 출판사 복있는사람이니 그냥 질렀다. 사고 보니 신앙과 문학과 삶에 관한 사색이라는 부제를 발견했다. 아뿔사. 소설이 아니구나! 3부작으로 40개의 신앙 에세이였다. 하나의 에세이를 읽고, 두 번째 에세이를 읽고 그런 식으로 차근히 읽어나가니 좋았다.

 

지난 주부터 투잡을 뛰게 되었다. 내 개인적인 사정이 아니라 타인의 사정 때문이지만 간만에, 아니 12년 만에 고된 노동일이었다. 8시 출근 6시 퇴근. 퇴근 길이 막히면 집에 들어오면 7시다. 몸을 주로 쓰는 일을 하기에 온 몸에 알이 배겼고 밥 먹고 씻고 도저히 책을 진득히 읽을 시간이 나질 않더라. 그때 눈에 들어온게 바로 이 책이었다.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진득히 앉아서 머리에 힘주어야 하는 책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소설을 보듯이 하는 책도 아니었다. 몸이 고되지만 에세이 한 편은 읽을 힘은 났고, 짧지만 나에게 파장은 컷다. 일터에서 집에 왔을 때 이런 책이 참 좋구나!

 

나는 2부부터 내용이 많이 와닿았다. 때론 내가 하려는 설교들과 했던 설교들을 이승우 작가의 시선에서 맛보는 새로움이 있기도 했다. 가령 에리직톤의 욕망’, ‘소비하는 인간’, ‘큰 이름의 그늘에 열매가 없네’, ‘침묵 속의 길등이 그랬다. 그는 성경의 말씀과 문학을 소재로 그 둘을 잘 묶어 나갔다. 특히 고진하 시인의 <푸른 콩잎>과 예수님을 연결시킨 것은 참 와닿았다.

 

월터 브루그만의 책들이 내 설교에 영향을 주었다.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우렁찬 느낌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거칠다. 그건 사실 브루그만의 책 때문이 아니라 나의 어설픔 때문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설교에서 100억 보상을 받은 땅주인이 코로나로 아버지 월세 밀린 것으로 화를 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돈에 미친 사람들에게 돈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싶었다. 그냥 내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계시록은 그런 말씀이던가. 다음 주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아뿔싸 했다. 세상의 죄악된 모습에 아픔을 부등켜 안고 선포하는 계시록을 나는 보지 못한 것이다.

 

이승우 작가의 이 책이 세상의 아픔을 부둥켜 안은 말들이었다. 에리식톤의 모습처럼 끝없는 욕망의 모습에(117), 누구도 알지 못하고 나만 알고 있는 탐욕의 부패에(127), 인간다운 삶을 이끌어 갈 기준을 상실해버린 시대에(144), 효율적으로 일하고 돈 잘 버는 것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줄 세우는 사회에(152), ‘소비하는 인간의 소비욕을 경쟁적으로 부추기는 시대에(168) 그리고 결정적으로

 

“타락한 세상을 향해 구원을 선포하고, 잃어버린 길을 찾아 인도해야 할 종교마저 새상의 이런 기류를 따라가는 현상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경쟁적으로 교회 건물 평수를 늘리려 하고, 이런저런 명목과 요령으로 헌금을 거두어 들이려 안달하는 종교 집단에서 우리는 아무런 구원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전도를 향한 열심조차 신도수를 늘리려는 수단으로 순수하지 않게 보일 때가 있다. 외판원 다루듯 교인들을 자극하고, 지극히 세속적이고 유치한 방법을 동원해 신자들을 확보하려는 경쟁에서, 영혼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아니라 물량주의적인 세 과시라는 음침한 동기를 발견하는 나의 눈이 비뚤어진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총동원 주일을 만들어 한 번 출석하기만 하면 값비싼 선물을 안겨 주는 일부 교회들의 행태가, 선거철이면 필사적으로 수건이며 돈 봉투 따위를 돌려 대는 정치인들의 이기적인 속셈과 무엇이 다른지 잘 구별되지 않을 때가 있다.

... 우리는 정작 열매에만 관심이 없고, 잎이나 꽃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175-6)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지막 에세이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나왔다.

 

“...(요 17:16)라는 말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껴안고, 세상과 친하게 지내고, 세상에 굴복하는 것도 경계한다. 포기해서도 안 되고 껴안아서도 안 되는 이 미묘한 긴장이,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태도일 것이다.”(272)

 

나는 이 책이 설교로 들렸다. 바라는 것의 실상이 다르다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세계는 다르다는 것. 그것이 작가는 부활신앙이라고 말한다. 부활은 영원과 닿아있다. 내 계좌의 돈이 영원과 닿아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에리식톤의 모습으로 미친 듯이 돈을 모을 텐데. 물론,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가져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거야 말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유요,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이유이지 않을까. 물론 그게 어디 돈뿐겠나.

 

플란팅가의 죄에 대한 책보다 죄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 책의 시선을 더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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