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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문

[책리뷰] 최인철, 홍성수, 김민정, 이은주, 최호근, 이희수, 한건수, 박승찬, 전진성 - 헤이트(Hate)[T&C재단 I 마로니에북스 I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I 혐오 I 미움]

by 카리안zz 202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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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혐오를 하는 걸까? 거기에 대한 전문가 9인의 진단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책은 T&C재단 김희영 대표의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김희영 대표가 겪은 일이 바탕이 되었다. 자신을 둘러싼 악성 루머들이 퍼졌고 법적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 악성 루머를 양성하는 이들을 막상 확인했을 땐 뜻밖의 모습이었단다. 평범한 가정주부들이었고, 선동한 인물은 사회적으로 매우 안정된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과의 뜻을 표한 모든 이들에 대한 법적 조치를 중단하고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분들 역시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고 선동당한 피해자로서, 타인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 입장에서 나는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였고, 본인들은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중이었을 것이다.(24-5)

 

이 책에선 전문가 9인이 혐오에 대한 진단을 한다. 첫 강의부터 공감의 과잉이 혐오를 낳는다고 자신의 집단에 대한 공감이 과잉되어버리면 타집단에 대한 편견을 가지며 혐오로 나아가게 된다.

 

즉 공감을 느껴야만 타인을 도울 수 있다고 강조하게 된다면 공감을 유발하지 않는 다른 집단 사람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낀다는 건 굉장히 어려워진다는 거죠. 그래서 공감이 우리 집단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작동할 수 있지만 다른 집단 사람들에게는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공감만 강조하게 되면 타집단 사람들에 대한 이타적 행위가 나타날 가능성을 오히려 떨어뜨리게 됩니다.(44)

 

공감 자체게 선하게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첫 강의부터 뼈를 때린다. 다른 강의들에서도 많이 배웠다. 특히나 3, 4강이 나에겐 그랬다. 인터넷과 온라인 상에서 혐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문들가들의 강의는 준비하고 있었던 교사교육 강의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익명성, 비인간화, 셀프효과, 감정 전이, 만성적 활성, 둔감화, 침묵의 나선, 집단 극화, 필터버블, 확증편향 등 여러 내 강의에 좋은 소스가 되었다. 생각하지 못하는 위기 곧, 사유의 외주화가 SNS와 온라인 세계에 익숙한 세대들에게 더욱 강화될 것 같다. 덤으로 혐오와 함께.

 

5~9강은 혐오의 역사를 돌아본다. 홀로코스트, 이슬람포비아, 아프리카 인종주의 갈등, 그리스도교 박해, 십자군 전쟁, 페스트, 마녀사냥에서 혐오를 살펴보았다. 특히나 나치의 등장 배경이 패망과 경제 불황이라는 것을 배웠다.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의 서평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 그리고 책을 다시 한번 정독했더니 사실은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의 깊은 공포와 두려움이 그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1929년의 대공황을 지나며 독일 국민의 3분의 1이 실업자가 됐는데 이런 상황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책임질 사람이 안 보여요. 그러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을 지목했고, 그 유대인들이 결국 희생양이 된 거죠. 팩트는 중요하지 않았죠. 분노하고 공포에 질렸던 사람들한테 중요했던 건 누가 욕을 먹어야 되느냐, 누가 대가를 치러야 되느냐 하는 문제였을 뿐이죠.(127-8)

 

사람들은 나치의 광기만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패망과 경제 불황이라는 엄청난 재난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누군가 거짓, 루머, 그럴듯한 통계들을 갖다 붙이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 분노, 증오를 악의 씨앗처럼 키웠습니다.(128)

 

사회가 불안할 때 혐오는 극에 달한다. 마녀사냥이 중세 때 일어났다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한다. 그러나 13세기 이단 심판 제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잔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 초기는 달랐다.

 

마녀사냥은 중세가 아닌 근대 초기에 일어났으며, 마녀 재판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중세가 끝난 다음인 1550년부터 1650년 사이였다는 점, 아이러니하게도 과학혁명이 시작되고 계몽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던 이성의 시대 때 가장 비이성적인 일들이 벌어졌다는 점 등을 담고 있습니다. 암흑기였던 중세에 비해 근대 사회는 훨신 더 이성적이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과연 그렇게 합리적이기만 했는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 중세 말기에 모든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소문만으로 사람들을 마녀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235)

 

새로운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데 어떤 사회일지 전혀 모르겠고 두려워지기 시작하자,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두려움을 분출하여 고통을 주고 혐오를 드러내어 박해하는 것을 시작하게 됩니다.(235)

 

벤틀리 하트에서 주장된 이야기가 이 책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주장되었다. 사회의 불안과 혼란이 혐오를 불러온다.

 

암울한 이야기들만 오고가는 가운데 넬슨 만델라와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이야기가 반갑게 보였다. 회복적 정의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같은 순간이었다. 신학에 기초를 둔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세 가지 핵심 단계를 거친다.

 

첫째, 고백입니다. 과거 백인 정권의 앞잡이로서 흑인들을 탄압했던 비밀 정보원이나 인권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범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형사 처벌을 면제해 준 것이죠. 처벌보다는 역사적 진실 규명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고백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이게 두 번째 단계였습니다. 세 번째는 배상입니다. 감옥에 가지 않았지만 가해자는 최대한 자신의 힘으로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고백과 용서와 배상으로 진행된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회복적 정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파국으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백인들은 다수의 흑인들이 집권하면 본인들은 그동안의 식민 지배와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한 복수의 대상이 될 거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그 오랜 인종차별 정책 끝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투자한 것이고 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회복적 정의에 둔 것입니다.(196)

 

책에선 왜 혐오해선 안 될까라는 당위는 없었다. 왜 혐오해선 안 될까?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면 사람이 혐오하겠다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우리는 신이 그걸 나쁘다고 했기에 나쁜 짓을 하지마라고 하겠지만 신을 믿지 않는 자라면 어떠한 제지에도 싫은데?’라고 말하면 이성적으로 어찌할 수 없지 않을까? 그래서 칸트가 신은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일까?

 

마지막 교수님들끼리의 토론도 내용을 정리도 할겸 괜찮았다. 내년 경제침체가 올 것이라 대부분 예상한다. 사회는 더욱 불안하고 정치는 더욱 엉망이 될 것같다. 필시 혐오는 다시 배양될 듯하다. 시민사회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는 경종을 울리는 시간이 될 것만 같다. 이미 그 시그널은 보였다. 부디 혐오에 휩쓸리지 않기를 나부터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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