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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소설

[책리뷰] 정지아 -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I 빨치산 I 빨갱이의 딸 I 사회주의 I 역사의 비극]

by 카리안zz 2023.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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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이 죽은 뒤 조문을 오는 사람들을 통해 수많은 사연이 들려온다
. 그 사연에는 현사의 비극이 담겨 있다. 일부러 자극적으로 쓰지도 않기에, 덤덤하게 쓰기에 뭔가가 더 그렇다. 책 속의 그녀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빨치산에서 저항을 했던 빨갱이다. 요즘은 좀 덜한 거 같지만 빨갱이가 가지는 그 의미에는 무수한 역사가 담겨 있다. 저자는 아버지에 관한 것은 거의 다 사실이란다. 주변 지인들의 사연들은 허구가 많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말은 아닐터이다. 담담하게 담겨 있는 비극은 이런 것들이다.

 

박선생의 형은 아버지의 빨치산 동료로 지리산에서 죽었다. 누나 둘도 지리산서 죽어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학도병에 끌려갔던 박선생은 하필 수도사단 소속으로 51년 겨울 지리산에 파견됐다. 운명의 장난인지 전남도당 소속이었던 아버지도 남부군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 “신우형, 복례누이, 복희누이, 상욱아. 총을 쏠 때마다 손이 떨려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네. 총구를 하늘로 겨눠도 재수 없으면 떨어지는 내 총알에 누군가 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누구도 내 총에 죽는 일만 없기를 날바다 기도한다네. 부디 살아서 돌아오시게. 살아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세” 불행히도 아버지만 살아 박선생을 다시 만났다.(48-9)

 

오빠는 빨갱이 작은아버지를 둔 덕분에 육사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 걸려 입학하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가 오빠 앞길을 막은 게 큰 어머니는 세상 떠날 때까지 천추의 한이었다. 오빠는 마음은 어땠을지 모르나 겉으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77)

 

연기가 휩싸인 마을 정자 옆, 할아버지의 주검 곁에서 오줌을 지린 채 혼절한 작은아버지를 발견한 것은 큰 언니였다. “그때게..... 막냉이삼춘이 손만 번쩍 안 들었으먼 할배가 안 죽었을랑가.....” ... 아홉 살 작은아버지는 잘난 형 자랑을 했을 뿐이다. 그 자랑이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작은아버지는 평생 빨갱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랑이었던 아홉 살 시절의 형을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술에 취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작은아버지의 인생이, 오직 아버지에게만 향했던 그의 분노가, 처음으로 애처로웠다.(128-9)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킹 살마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다.(169)

 

이러한 사정들. 각자의 사정들. 작중의 화자처럼 빨갱이의 딸이라는 연좌제로 대학 입시에 낙방한 사람도, 형은 빨치산에서 죽고 동생은 베트남 전쟁에서 다리를 잃는 사람도 분명 다 존재하리라. 현대사의 비극이다. 우리네 아픈 현대사의 비극적 한 장면 말이다. 빨치산 4년의 경력이 평생 낙인이된 이의 사정을 우리는 본다. 그래서 그럴까. 아버지는 습관적으로 사람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결국, 그 딸은 평생 아버지에게 박대한 아버지의 동생의 사정을 본다.

 

아무도 보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그날 작은 아버지 홀로 견뎠어야 할 공포와 죄책감을, 보지 않은 누군들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역시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만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독한 소주에 취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 수 없었던 그러한 사정이.(130-1)

 

이웃이었던 이들이 서로 총을 겨누게 된 4.3사건의 비극만큼이나. 사건의 피해자들도 몇십 년 진실을 감췄단다. 빨갱이로 몰려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북한에서 남한 땅에 내려온 이들에게도 사정은 있었으리라. 가족, 재산, 직장 등 모든 것을 잃었던 그런 사정이. 작가가 말한 것처럼 그래도 어떻게 빨갱이를 미화하는 걸 쓰냐며, 빨갱이들이 세상에 끼친 해악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그럴 때면 기독교가 끼친 해악들을 들먹이며 어떻게 기독교를 믿을 수 있냐는 말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 또한 사정이 있으리라.

 

중후반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화자는 내비친다. 아버지가 감옥에 가기 전 아빠와 딸로서의 기억. 나 역시 아버지와의 기억이 소환되기도 했다. 여섯 살이었던가 다섯 살이었던가 최선을 다해 뛰는데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 아버지의 기억이, 수시 날짜를 잘못 알고 부산으로 헛걸음 했지만 아무 말씀 없으셨던 아버지. 그날 푸른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 아직도 잊혀지지 않나보다. 그래서 변호인을 볼 때 그 바다가 나와서, 국제 시장에서 그 바다가 나왔을 때 나는 단박에 알아 보았나 보다.

 

현대사의 비극이 담겨 있는 이 책에 왜 이렇게 많이 팔렸을까? 저자와 아버지와의 사이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되어서 그런거 같다. 모두 각자의 사정에서 비극이 있었을 테니. 분명, 그 비극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있을터이다. 각자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배가 없다는 것이 나는 시방도 안 믿어져라.” 아이가 주먹으로 슥 소리 없는 눈물을 훔쳤다.(239)

 

평생 봐왔던 사람이 사라진 것도, 평생 본 적 없던 조카가 생겨난 것도 참 믿기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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