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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공부흔적

[강의] 생각의 위기[MZ세대, 생각의 외주화, 공감, 욕망, 알고리즘, 주목경제, 혐오, 이대남 현상, 페미니즘, 사회, 공정, 불평등, 불안]

by 카리안zz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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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위기

 

 

 얼마 전 수련회 때였습니다. 저에겐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5분이면 해결될 문제로 아이들이 2시간 정도를 허비하는 거였습니다. 다음 날 일정 문제로 헤매었습니다. 분명 수련회 준비를 근 2달 정도 준비한 모습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분명 전날 다음 날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라고 말을 했음에도 일어난 일이기에 충격은 더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저는 이 일을 통해 생각이라는 문제와 타인(내 밖의 세계)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분명, 조금이라도 다음 날 일정에 대해서 생각을 했더라면 쉽게 해결되었을 문제였고, 서로가 소통을 잘하는 사이였더라면 2시간 동안 헤매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공감하려는 욕망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결혼은 늦어지며 가정을 꾸리는 연령대가 늦어지면서 이런 모습들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혼밥이라는 것도 흔해지고 있습니다. 혼자 밥을 먹는 모습을 우리는 이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혼자 영화 보는 것도 이제는 흔한 일입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혼자서 무엇을 하는 것이 더욱 익숙해졌습니다. 방 안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를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영상을 보고 어떤 감상을 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은 참 공감이 됩니다. 저도 유행이 지난 뒤 드라마를 보곤 하는데 그땐 다 보고 나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되게 궁금하더라구요. 과연, 다른 사람들도 내가 느낀 걸 느꼈을까 하면서 글이나 댓글을 찾아보기도 했었습니다. 공감하려는 욕망이 1인 가구시대, 혼자서 영상을 보는 시대에 더욱 갈급해 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비평은 사라지게 됩니다. 나는 내가 공감한 모습을 타인에게도 보기 원하는데 누군가 그 감상에 대해 반박한다면 반발심,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렇기에 누군가 비평을 하면 그것을 재반박하는 것을 원합니다. 반박에 대한 내 생각이 있는데 이런 내 생각보다 좀더 세련되고, 시원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걸 원합니다.

 

알고리즘

여기에서 알고리즘이 등장합니다. 유튜브를 보시면 알겠지만 추천영상들이 라인업됩니다. 내가 보는 영상에 맞춰서 그 비슷한 영상들을 자동적으로 추천합니다. 그러니 내가 공감하는 영상들만, 내 의견과 비슷한 영상들만 계속 노출됩니다. 정치적 견해에서도 내가 지지하는 의견들만 계속 노출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필터 버블이라고 합니다. 이제 여기에서 내 생각에 동의하거나 공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을 바로 에코 챔버라고 합니다. 내 의견이 다수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확증편향의 현대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나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비판의식이 사라집니다. 이것을 사고의 외주화라고 합니다. 내가 공감하는 집단에 내 생각을 맡겨버립니다. 내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포기하고 끝내 잃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침묵의 나선 효과와 연쇄 하강 효과

 

 

침묵의 나선 효과란 원래 미스미디어가 지배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전파시키는 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걸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사회적으로 우세하고 지배적인 여론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고립에 대한 공포로 침묵을 지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를 침묵의 나선 효과에서 보여줍니다.

그런데 지배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여론이 사실은 지배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알고리즘과 침묵의 나선효과가 만난다면 더더욱 자신의 의견이 대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연쇄 하강 효과라는 것도 있습니다. 앞선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악 다운로드 관련 실험에서 보였듯이 사람들이 자신이 듣고 싶은 노래를 듣기보다는 남들이 많이 다운로드 받는 음악을 듣고 싶은 경향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판단을 내릴 때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여기에서도 발견합니다.

이러한 하강 효과를 인터넷 상의 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상대적으로 쉽게 믿어버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먼저 전파되고 결국 다른 사람들까지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틀린 정보를 믿을 리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소문을 수용하게 됩니다. 결국 어느 수준으로 넘어서는 순간 거짓 소문이 사실로 둔갑하게 됩니다.

알고리즘과 필터 버블, 에코 챔버를 통해 우리는 침묵의 나선 효과와 연쇄 하강 효과가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 사고의 외주화의 뇌 과학(신경 과학)의 설명

 

 

문해력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문해력은 후천적 성취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읽지 않는다면 그 기능은 퇴화합니다. 문해력이 높아지려면 뇌 회로가 새롭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마치 근육처럼 안 쓰다가 새롭게 쓰려면 다시 운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독해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독서의 기능 중에 깊이 읽기 과정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성인이라도 뇌 회로 형성이 안 되어 있으면 몇 년이 걸립니다.

깊이 읽기란 많이 읽어서 내 안에 배경 지식이 많아지고, 그 배경 지식으로 비판의식이 가능하며, 타인과 타인의 세계를 소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세계로 여행을 가는 것까지 말합니다. 타자의 세계를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독서를 하면서 감정을 느낄 때 뇌의 활성도를 보면 실제로 느낄 때의 활성분포와 유사하기도 합니다.

영상매체로는 깊은 읽기로 가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동영상과 오디오북을 들을 때 우리 뇌의 전전두엽, 그러니깐 고차원적인 인지 활동 영역이 크게 활성화되지 않습니다. 인터넷 정보에서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 능력이 대단히 낮아집니다. 곧 이것은 외부의 지식에 의존하게 된다는 걸 말합니다. 앞서 말한 사고의 외주화가 뇌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다. 더구나 독서능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다른 세상, 그러니깐 타인과의 교류하는 능력이 상실됨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정보로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만 공감하여 과잉 공감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필시 혐오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3. 주목 경제

 

여기서 우리는 주목 경제라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자주 쓰는 용어로 트롤링과 어그로가 있습니다. 관심을 끌기 위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 말합니다. 5:5 게임을 하는데 내 편인 한 명이 상대를 공격하지 않고 내 게임을 방해할 때 트롤이라고 보통 말합니다. 어그로는 관종(관심종자), 그러니깐 관심을 끌기 위해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돈이 된다는 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관종의 모습을 쉽게 발견됩니다. 최근에만 해도 태풍이 오는데 유튜브 라이브를 켜며 바다로 가서 생중계하는 유튜버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말벌을 씹어먹는 걸로 생중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온갖 시선을 끄려고 할까요? 그건 바로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지만 그게 돈이 됩니다. 제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운영합니다. 보통 구글 애드센스를 달기 위해서 블로그를 많이 합니다. 구글 애드센스란 구글에서 광고를 제공해서 클릭을 하면 돈이 벌리는 걸 말합니다. 그러니깐 제가 쓴 글에 구글에서 제공하는 광고가 붙고 누군가 그 광고를 클릭하면 수익이 됩니다. 제가 예능 관련 글을 한 번 써서 조회수가 엄청 몰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그 글 하나로 10만원 가까이 벌었습니다. 작년에는 글 두 개를 썼는데 사람들이 클릭을 많이해서 조회수가 좀 되었습니다. 글 두 개로 10만원 벌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클릭으로 돈을 버니 왜 사람들이 관종이 되어서 클릭을 유도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좀 정석적인 방법으로 글을 썼기에 되게 조회수를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복불복입니다. 그러나 양심을 버리고 글귀하나 관심이 되는 걸 쓰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돈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관심을 끄는 방법에 선이 없어집니다. 오히려 주목을 더 많이 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비윤리적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윤리는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돈이 되는 것이 옳은 것이고 돈이 안 되는 것은 옳지 않은 것까지 생각할 위험이 생깁니다. 주목경제에서는 윤리가 무너집니다.

 

4. 공감하려는 욕망과 주목경제의 결합

 

, 이 두 가지가 결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공감하려는 집단에게 내 사고를 외주화 시킵니다. 그것을 이끄는 유튜버가 있을 수 있고 그것을 이끄는 커뮤니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가장 공감되게 전달하는 사람이나 커뮤니티가 생깁니다. 이들은 더 많은 공감을 이끌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여기에서 주목경제가 작동하는 거죠.

이들은 복잡한 논의를 제대로 정리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잡한 논의를 단순 명료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원인과 해결책을 간단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한 두 가지 때문이라고 간단 명료하게 정리 후 과대포장합니다. 분노에 해 있는 남성들에게 한가지 던져 줍니다. 당신이 연애도 못하고 무시당하고 여자한테 차이고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페미니즘 때문이다라고 쉽게 원인과 결과를 말합니다.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당신이 일자리를 잃어버린 이유는 바로 이민자들 때문이다 라고 쉽게 말해버립니다.

트럼프 당선까지 미국 커뮤니티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사이버 불링이 일어나며 당사자의 주소를 웹상에 공유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 욕설을 합니다. 결국에는 총기난사 사건들까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가 젊은 층에게 제법 나타납니다. 지난 대선때 어떤 후보측에서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여섯 글자를 페이스북에 올려버립니다. 이 여섯 글자로 인해 20대 남성들이 열광을 합니다. 자기들의 분노의 원인, 세상의 불평등이 바로 이 여성가족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가족부가 없어지면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이 오는가 라는 논의는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고 그냥 없어지면 속이 시원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감정이죠.

얼마 전, PD수첩에서도 이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한 청년이 여성가족부를 엄청 비난하면서 말도 안되는 정책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PD가 묻습니다. 그 말도 안되는 정책이 무엇이지요?라고. 그 청년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사유의 외주화로 일어난 현상이죠.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사람들이 저게 문제라고 하니깐 문제라고 말합니다.

, 청년들은 86세대 때문에 이 모양 이꼴이 되었어 이런 생각이 제법 있습니다. 어느 설문조사를 보니 만 34세 이하 청년들에게 ‘586세대는 한국 사회의 기득권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80%가 동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만 34세 이하 청년 중 44%586이라는 말 자체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유의 외주화 모습이 여기에도 등장합니다.

 

젊은 청년 층이 증오해 있다는 것입니다. 젊은 남성을 주로 예로 들었지만 젊은 여성들도 이건 피해가지 못합니다. 젊은 층들의 전형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분노하고 생각을 하지 않고 혐오의 감정을 마구 표출해냅니다. 근거는 없습니다. 감정만 남아있습니다. 집단에 대한 분노, 혐오가 있습니다.

 

 

20대 남자들은 분노해 있을까?

 

아무리 사고의 외주화가 작동해도 그렇지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일단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기성 세대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금융경제 위기로 서로가 서로를 피터지게 싸움터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임명묵의 <K를 생각한다>,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 팀 헬마우스의 <추월의 시대>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핵심 중 하나는 금융 경제 위기 후 생존에 대한 불안과 위기가 분노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20대 남자들이 공정에 대한 분노가 굉장히 강합니다. 저는 임명묵의 의견에 공감하는데 공정에 대한 논리적 부분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감, 그러니깐 감정에 우선한다는 것에 동의를 합니다. 살기 힘든 내 삶에서 공정하지 않은 모습들을 보니 속된 말로 빡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타오르는 분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는 박원익·조윤호의 <공정하지 않다>를 읽으며 이해가 되었다. 제가 요약한 부분을 옮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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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젠더갈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젠더갈등은 불평등 사회라는 배경에서 탄생했고, 20대들을 중심으로 과열되었다. 우리 사회의 진보적 담론들이 한국 사회, 특히 20대들이 겪고 있는 불공정과 불평등에 집중하지 못하고, 성평등의 문제를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는 방식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다. 미래를 잃어버린 20대 남성에게 남자로서 더 많은 자원을 갖고 있고, 여성을 차별하고 착취한다고말하면, 이들은 쉽게 동의할 리 없다. ... 무엇보다 20대들은 왜 사회적 책임을 개인 윤리에 묻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돈 있고 힘 있는 놈들은 내버려두고, 만만한 자신들만 두들겨 패는 것 같아 억울하기만 하다.”(73) 젠더갈등의 이면에는 20대 남자들의 억울함이 있다.

 

20대 남자들은 남아선호사상이 해체되던 시기에 태어났다. 30대 중반인 나는 그래도 여성이 우리보다 피해를 보고 있다는 시각이 있는 세대다. 친구들에게도 비슷한 정서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20대들은 매우 다른 성장배경을 가진 세대다. 당장에 봐도 2018가사분담을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20대 남자들이 80%나 동의했다. 여성은 83%. 10년 전 2008년도 20대 남자들은 44%였고 여성은 61%인걸 봤을 때 평등의식이 가장 높은 세대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데 엉덩이에 피멍이 들 정도로 남자아이들에게 유독 가혹했던 체벌, 체육시간 전 옷 갈아입을 장소가 부족하면 남학생들만 더러운 화장실이나 창고에서 체육복을 갈아입게 했던 일,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후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어 고민할 때 남자가 그깟 걸 가지고 징징댄다며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분위기 등등. 결정적으로 작가는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2년가량 짊어져야 했던 병역의무를 지적한다. 이는 젊은 남자 세대에게 심각하게 느껴지는 문제이지만, 정작 기성사회는 이를 별 것 아닌 것으로 폄하한다.”(93). 이걸 이중구속 상태라고 하는데 사회는 여전히 남자라는 것에 책임감을 주는데 교육을 받을 때 남자나 여자나 평등하단 교육을 받으니 20대 남자들의 내면에 분노가 채워지는 건 당연한 듯 보인다.

 

여기에서 불을 붙이는 사건들이 등장하는데 2018년 혜화역 시위다. “워마드에서는 여성 몰카를 찍는 남성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남성 몰카를 찍은 여성에게만 가혹하다며 혜화역에서 몰카 사건의 범인을 두둔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에 대해 여성계와 기성언론이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자,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발이 일었다. 몰카 범인이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죄를 옹호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삼아온 페미니즘이 그 원칙을 저버리고 여성 이기주의를 드러냈을 때, 왜 이에 대해서 기성세대나 주류사회는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옹호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젠더 담론이 왜 젊은 여성의 젠더 감수성에마 초점을 맞추느냐는 항의이기도 했다. 물론 가부장제와 성차별을 반대하는 데 여성들의 주장을 더 많이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다. 하지만 성평등 사회에서 절반의 몫을 담당할 미래세대인 남성들을 담론에서 소외시키고, 잠정적 가해자로만 취급하는 것은 문제다.”(81-82)

 

미러링이라는 명목으로 남성혐오 단어를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성차별이라는 것이 젊은 남성들의 주장이다. 누구보다도 예민한 젠더 감수성을 가진 이 세대에겐 더욱 그렇다. “일베가 아닌 일반 남성들에게까지 남성비하적 말과 행동을 쏟아내는 메갈리아과 워마드를 두둔하는 여성운동가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83)이다. (기독교는 전광훈과 거리를 둬야 하듯이 페미니즘도 그들과 거리를 둬야하는 것 아닐까?) 이러니 젊은 남성들의 눈에 지금의 페미니즘 담론은 가부장제를 없애려고 하기보다 젊은 남성들에게 죄의식과 잠재적 가해자 프레임을 뒤집어씌우려 드는 대표적인 불공정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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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한 분노도 불공정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저자들은 말합니다. 학교에서는 성평등을 배우는데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전혀 그것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군대 문제가 다시금 보이는 것이지요. 공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런 가운데 여성가족부 장관이라는 사람들이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하니 더욱 분노해 있는 겁니다. 20대 남성들이 여성가족부에게 분노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여성가족부에게 분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성가족부 장관들이 했던 말들에 분노해서 그 분노가 여성가족부에게도 전염이 된 것이지요. 이러니 여성가족부가 폐지가 된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요?

 

문제는 여기에서 여성가족부의 예산이 어떻게 쓰여 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사람들도 없고, 여성가족부가 폐지되면 정말 공정해지는가? 라는 논의도 없습니다. 깊은 토의는 사라지는 겁니다. 앞서 이런 현상은 주목경제와 사유의 외주화 현상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나가면서

 

지금의 중등부 아이들에겐 분노의 모습은 보이질 않습니다. 작년 고등부 아이들에게 보였던 분노가 중학생 아이들에겐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전 단계를 봅니다. 기름이 끼얹어 있는 상태 같습니다. 사회에서의 불안을 알게 된다면 라이터가 켜지듯 폭발할 것처럼 보입니다. 서두에 말했던 생각하지 않음과 타인과 나눔을 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그러한 전조현상이지요.

 

여기에서 온라인을 통한 감정 전이 현상, 증오발언을 접하기 될 때의 만성적 뇌 활성화, 혐오발언에 대해서 잘못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둔감화 등의 현상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더 살펴 본다면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입니다.

 

심각히는 독일의 홀로코스트 상황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패망과 경제 불황이라는 엄청난 재난이 홀로코스트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누군가가 거짓, 루머, 그럴듯한 통계들을 갖다 붙이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 분노, 증오를 악의 씨앗처럼 키웠습니다.

우리도 점점 상황이 비슷하게 갑니다. 코로나라는 재난을 겪었고, 내년부터 경제불황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분노의 마음을 어딘가에게 쏟아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지난 대선 때 그러한 분노가 한 차례 쏟아내졌다는 것에 안도를 하기도 합니다.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다시 피어오르는 불안과 그로 인한 분노감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기독교 교육은 어떤 방향을 가져야 할까요? 최근 EBS에서 나온 책은 문해력의 위기는 자신의 시험점수, 좋은 대학, 일자리, 연봉, 국가 산업 경쟁력의 위기이기 때문에 문해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저는 국가의 마인드가 이렇다는 것에서 한국 교육에 대한 절망을 느꼈습니다. 매리언 울프와 마사 누스바움처럼 민주주의의 위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된다는 주장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리는 어떤 방향을 가져야 할까요? 우리는 이러한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두서 없지만 이런 부분들을 토의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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