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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공부흔적

누가복음 2장 21-40절(눅 2:21-40, 눅 2:21~40)[예루살렘, 시므온, 안나]

by 카리안zz 2021.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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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1- 40

 

예수님이 태어나고 8일이 지나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례를 받았고 이름도 이제 지어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당연히 예수입니다.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죠. 마리아, 요셉의 믿었고 순종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할례를 하고 이제 정결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아이가 출생하면 치러야할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산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장자가 태어나면 두 가지 의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장자의 속전 의식입니다. 제사장들에게 5세겔을 내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민수기 3:1-2, 11-16; 18:15-16). 그러나 예수님은 이 장자의 의식을 치뤘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걸 의미하는 건 값을 지불하고 되찾을 수 없이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민수가 1815-1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5: 그들이 나 주에게 바치면, 사람이거나 짐승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태를 처음 열고 나온 것은, 모두 너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맏이는 네가 속전을 받고 반드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 부정한 짐승의 맏배도 속전을 받고 되돌려 주어야 한다.

16: 나에게 바친 것이 속전을 받고 되돌려 줄 것이면, 난 지 한 달 만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속전은 한 세겔 당 스무 게라 나가는 성소의 세겔에 따라서 네가 은 다섯 세겔로 정해 주어라.

 

이 속전 의식을 안 치뤘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죽음이 온 인류를 속량할 것이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한나와 사무엘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천사의 탄생 예고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드려진 것이죠.

 

, 이제 이야기의 배경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성전은 유대교 제사의 중심이며 계명의 많은 것들이 완성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그려지는 성전은 부정적입니다. 성전은 예언자를 돌로 치고, 과부의 돈을 삼키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 저주를 받게 되고 성전은 정화되어야 하는 곳이 됩니다. 저주받은 예루살렘이 새 예루살렘으로 교체도어야 하고 타락한 성전 역시 새로운 성전으로 교체됩니다. 누가복음의 맨 처음에 예루살렘은 기도하는 곳으로 나왔는데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찬양하면서 마무리 됩니다. 이건 성전 건물이 다시 회복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사역과 믿음, 또 믿음의 사람들 속에서 새로워지고 회복된 성전의 역할이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 역할이 더 심화되어서 보여집니다.

 

25절부터 시므온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은 시므온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25) 말하는데, 성령님께서 그에게 임하여 계신 가운데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성령님의 말씀처럼 눈 앞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이 예수님 탄생에 세 번째로 나오는 찬가이죠.

 

성전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건 누가에서만 나오는 장면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온 세상의 구주시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에 찬가에서 이전의 찬가들의 주제가 이어집니다. ‘평화’, ‘구원’, ‘이 바로 그런 주제이죠. 그런데 시므온의 찬가에서는 이방인이 새롭게 포함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단순히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사가랴의 찬가와 유사한 두 주제,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결정적으로 행동했고, 이 구원은 이스라엘의 과거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성취죠. 시므온은 여기에서 이방인들을 언급합니다. 이방인들 역시도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될 것라는 게 바로 시므온의 찬가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와 요셉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이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한다니요? 뒤에 나사렛에서 배척받을 때는 이상함을 넘어서 화가 나 예수님을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이상한게 여긴건 어찌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이어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함과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고 말해줍니다. 이 말은 누가복음서를 이끌어 가는 단서가 됩니다.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은 사회적 변동을 지시하고, ‘비방을 받는 표적은 예루살렘과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접하게 될 저항을 예고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마치 검처럼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게 될 겁니다.

패함과 흥함을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패하고 흥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이 패하고 비천한 자들이 흥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동일하 집단이 패하고 흥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정확한 의미가 읽혀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패함의 잔, 즉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일어서라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패하는 자들이 나중에 흥할 수 있다는 걸 말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리아의 영혼을 찌르는 검에 대해서 좀 살펴보겠습니다. 이방인들, 죄인들 그리고 사회에서 배제된 많은 외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새로운 계약 백성으로 재형성이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아픔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더하여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끔찍한 죽음을 당할 것과 그가 죽기 전에 그리고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분쟁이 마리아를 매우 고통스럽게 할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 것처럼 시므온의 찬가와 마리아가 들은 예언은 누가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 중요한 예고편이 됩니다. 이제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포용적인 구원 목적이 인간의 적대감과 부딪히는 사건에 관한 것이라고 예상할 것입니다.

 

36-38절은 시므온의 짝으로서 안나를 소개합니다. 둘 다 예언자적인 인물들입니다. 나이가 많고 경건하며 성전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결정적으로 종말론적인 구원을 기다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 안에서 세계를 끌어안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개입을 인정합니다. 안나는 예수님의 도래의 중요성을 해석하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이 놀라운 아이의 출현에 반응합니다. 누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근거하고, 성경이 말해왔고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 그리니까 시므온과 안나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이 신실한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이 기대되고, 이제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열매를 맺을 거라는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안나가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누가는 안나의 반응보다 안나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더 강조하는데 시간을 씁니다.

38절에 보면 예루살렘의 구속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예루살렘의 상징적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구원하는 것이 분명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죠.

 

 

이제 한 단락의 이야기가 끝을 맺습니다. 221-24절은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는 예수님의 부모님이신 요셉과 마리아의 헌신을 강조했습니다. 239절에서는 그들이 주의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끝마쳤다는 정보로 이제 한 단락이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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