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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톰 라이트 - 톰 라이트가 묻고 예수가 답하다

by 카리안zz 2020.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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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낀 점

 원래 이 책은 조금 늦게 읽으려고 했는데 교회의 한 자매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하기에 혹시 물어볼까봐 먼저 이 책을 읽었다. 역시 내가 보기에 어렵지 않은데 1세기 예수님 시대의 안내서로 적격이라고 본다. 밑에 책 속 중을 보면 알겠지만 뛰어난 성경 교사인 라이트는 그 시대를 포인트로 집어서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특히나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들! 그중에 천국에 대한 개념은 하루빨리 수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학과 신앙생활의 거리가 이토록 멀어졌는 한국교회의 분위기에 이 책은 많이 읽혀져야 한다. 우리의 생각으로 성경을 보고 편견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 의가 우리의 생각을 교정해야 한다. 그것을 원하는 자들은 이 책을 읽어보길 강력히 추천한다! 

 

 

. 메모

 

 예를 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날 서구 세계에서는 젊은 성인들이 삶을 독립할 때 부모에게 재정적 도움을 청하는 일이 흔하다. 부유한 부모가 그 청을 거절한다면 인색하게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둘째 아들이 자신의 유산을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그분이 하셨을 때, 청중들은 충격받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들의 행동이 아버지를 향한 저주요 사실상 '당신이 죽으면 좋겠다'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p. 33-4)

- 다음 주 설교 참조(아마 이 본문이 겹쳤는 듯)

 

곧 닥칠 이 거대한 폭풍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냥 항구에 남아 있으라고 진지하게 조언한다. 지금은 바다로 나가는 게 너무 위험하니 그냥 우리가 배운 대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교회의 위대한 전통에 의지하고 성경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p. 51)

- 존 파이퍼?ㅎㅎ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야기들 특히 마지막 며칠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 그 순간에 겹쳐지는 다양한 주제들을 우리의 생각 속에 조합하여 일관성 있는 단일한 전체로 생각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온 도시가 유월절을 준비하던 그날,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던 사람들은 노련한 사령관의 입장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행동, 그것이 연상시키는 예언, 유월절의 여러 주제(압제자를 이긴 승리, 노예 해방, 희생제물, 하나님의 임재) 등이 일관성 있고 단일하면서도 아주 도전적인 전체를 수월하게 이루어 냈을 것이다 그들의 세계관과 지배적 내러티브에 생소한 우리에게는 별도의 요소들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 그 시각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풍부하고 촘촘한 단일한 사건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의미까지도 한 눈에 파악했을 것이다. (p. 204-5)

- 바로 이런 내용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①

 

바로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심호흡을 하고, 1세기의 대다수 유대인들이 세상을 보던 방식이라는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어두운 물속이기도 하다. 흔히들 말하는 '예수를 현대화하는 위험'은 말 그대로 위험한 일이다. 예수의 극적인 말씀과 행동 앞에서 우리는 그 의미가 그 당시에도 지금 우리의 세상에서와 같았을 것라고 단정한다. 그런 당전을 물리쳐야 한다. 여기서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사람들의 현실관의 지극히 근본적인 요소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p. 207)

-바로 이런 내용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지독한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배경에 포진한 로마는 제국의 이기적 야욕을 언제라도 무력으로 밀어붙일 태세였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해방의 축제인 유월절을 또 한 번 지키면서, 이교를 몰아낼 민족적 자유와 승리를 열망하고 있었다. (p. 240)

-예수 시대의 배경

 

그룹의 대변자 노릇을 한 베드로는 자신들이 아닌 한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는데, 물론 이것은 세례 때에 하늘에서 난 소리를 따라한 것이었다. 예수는 베드로의 고백도 그 소리처럼 하늘에서 온 것임을 인정하셨다. (p. 267-8)

-오호!

 

. 책 속 中

 

 

 누군가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이 창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고 묻자 그는 실없는 질문이나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고 답했다. 단순성은 훌륭한 미덕이지만 지나친 단순화는 게으름의 징후이며 오히려 악덕이다. (p.12-3)

 

우리가 의식하는 예수의 임재, 곧 불편하게 하면서도 치유를 가져다주고,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위로하는 그 임재는 단순히 상상의 산물인가? 단지 내적 욕망의 투사라고 말한 프로이트가 옳았는가? 단지 굶주린 대중을 입막음하는 수단이라 말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예수가 나약한 종교를 가르쳐 인류를 영영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니체가 옳았는가? 이미 세 사람은 문화 지형에 불후의 자리를 굳혔으니, 그렇다면 신 자체가 하나님의 망상이요 기독교는 수많은 오류에 기초한 것이라는 오늘날 시끄러운 무신론자들의 말이 옳은가? 기독교는 완전히 구식이며, 건강에 해롭고, 다분히 오류로 입증되었고, 사회적 재난이며, 터무니 없는 모순이라는 그들의 말이 과연 옳은가? (p. 24)

 

우리 교회들이야말로 정말 환원주의자들이다. 하나님 나라를 개인의 경건으로, 십자가의 승리를 양심의 위안으로, 부활절 자체를 슬프고 어두운 이야기 후의 도피주의적 해피엔딩으로 축소시켰다. 경건과 양심과 궁극적 행복도 중요하지만 예수 자신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p. 27)

 

요즘 세상에서 이에 상응하는 예를 찾자면, 새로운 '종교적' 스승이나 지도자보다는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가가 더 가깝다. (p. 35)

 

엄밀한 의미에서 '신화'란 어떤 면에서 자칭 '역사적' 이야기로서, 그 이야기를 하는 공동체의 확고한 신념들이 그 안에 압축되어 있고 또한 그 속에서 강화된다. 이런 진지한 '신화'는 대개 내러티브를 통해서만 아니라 상징과 행동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p. 47)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여 엉뚱한 질문들 대신 올바른 질문들을 하려면, 우리의 사고와 상상이 예수 자신의 시대 속으로 들어야가 한다. (p. 56)

 

일단 우리가 예수 시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분이 사용하신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면, "이제 예수 자신이 왕이시다"라는 놀라운 주장도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은 "영원한 권세(단 7:14)와 결코 망하지 않을 왕권을 지니신 분이다. 

 이 주장은 고대의 의미로는 물론 지금 우리의 의미로도 결코 한낱 '종교적인' 것일 수 없다. 이는 권력과 정치부터 문화와 가정까지 모든 것을 포괄한다. 개인의 영성과 변화 같은 '종교적인' 의미, 그리고 윤리와 세계관 같은 철학적인 의미를 모두 아우른다. 더 나아가 그 모든 것들을 더 큰 비전 안에 둔다. 그 비전을 아주 간단히 표현하면 "이제 하나님이 왕이시며, 그분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통치하신다"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말씀과 행적, 그분께 벌어진 일, 뒤이어 그분 제자들의 말과 행적, 그들에게 벌어진 일, 이 모두가 그 비전으로 설명된다. (p. 96-7)

 

이 시점에서 우리는 평소에 세상과 특히 현대 서구 세계를 보던 안경을 벗고 다른 안경을 써야 한다. 예수를 이해하려면 세상을 그분의 동시대 사람들이 보던 것처럼 볼 줄 알아야 한다. (p. 110)

 

1세기 모든 유대인들은 그것들을 뼛속깊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현대 서구의 안경을 벗고 1세기 유대의 안경을 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예수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인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이 모든 내용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약 똑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자신의 상사잉라는 작은 상자 안에 그분을 우겨 넣게 된다. 출애굽의 일곱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악한 압제자

· 선택된 지도자

· 하나님의 승리

· 희생을 통한 구원

· 새로운 사명과 생활 방식

· 하나님의 임재

· 약속된 유업의 땅 (p. 114)

 

한편 남방에는 해마다 지명되는 대제사장을 수장으로 한 대제사장들이 있었다. 이 허울 좋은 귀족 정치는 자리만 지키고 있었을 뿐 사실은 헤롯 안디바처럼 로마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거대한 제국을 현지의 실세들을 통해 운영하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세금 징수와 민심의 통제를 그들에게 의존했다. 누군가 하나님이 왕이라고 발표하고 다닌다는 말이 헤롯이나 대제사장의 귀에도 들어갔을 테고, 그들은 즉시 골치 아픈 문제임을 감지했을 것이다. (p. 121)

 

 깜짝 놀랄 내용이긴 하지만, 예수의 공적 가르침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내용과 잘 맞아든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마 5:44), 다른 여러 각도에서 그 점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용서는 그분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이는 유대교 순교자들의 보편적 관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p. 132)

 

앞서 보았듯이 예수는 자신의 희년 운동을 상술하실 때(눅 4:23-27), 하나님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빚을 탕감(용서)하시고 과거나 현재의 적인 주변의 이방 나라들을 벌하시는 게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오히려 그것은 그 이방 나라들 자체에게 기쁜 소식이 될 메시지였다! (p. 133)

 

이 함축적 주장에 담긴 구체적 단계들을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내의 죄를 통상적으로 어떻게 용서하시는가? 그야 성전과 그곳에서 행해지는 제사를 통해서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는 통상적으로 성전에서 있을 일을 하나님이 자신을 통하여 가까이서 개인적으로 행하고 계시다고 주장하신 셈이다. 앞서 보았듯이, 광야의 성막을 이어받은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던 곳이었다. 성전은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성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인간의 세속적 현실과 교차하는 곳이었다. (p. 137)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예수를 '천국 통치'내지 '하나님 나라'를 어떤 식으로든 도래시키는 분으로 본다는 것이 그때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으며, 지금은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왜 요한을 감옥에서 풀어 준다는 의미가 아니었는가?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편다 해도, 어떻게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운동의 실행으로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이 혁명에 굶주려 있던 많은 갈릴리 사람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당연히 있었을 질문이다. 여기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전에도 더러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새롭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분이 내놓을 것은 무엇인가? 그분을 믿어도 되는가? 그분은 하나님과 율법에 순종하는 충실한 유대인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사람인가? (p. 141)

 

마가와 마태는 둘 다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 곳을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이라고 밝혀 놓았다. 그곳은 기억들이 꿈틀거리는 곳이었다.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이 거기였다. 요한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헤롯 안디바를 비난한 곳도 거기였다. 그런 곳에서 이혼에 관해 묻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론적 질문이 아니었다. 예수를 죄에 빠뜨리려는 수작이었다.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는 요한이 안디바에게 당한 일을 예수도 당할 수 있었다. (p. 169)

 

헤롯 대제가 우리의 이야기에 중요한 이유는 그가 예수의 삶의 한 배경을 이루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에 누가 '유대인의 왕'이라 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를 그가 명백히 풍자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승리를 의미했고 성전을 의미했다. 유대 민족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였다. (p. 185-6)

 

그런데 계몽주의 사상의 층층이 단절된 세계에서는 악의 세력을 논할 적절한 어법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의 실체와 씨름하려는 일을 그것 때문에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선하게 보고 '그들 같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악하게 본다는 뜻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 위험을 인식해야 한다. 이미 서구의 일부 지도자들이 '악의 축' 운운하며 그것을 제거하려고 전쟁을 벌인 비참한 일들이 있었다... 이런 논리는 복잡한 생각을 피하는 편리한 도구이지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 모두에 재난을 부른다. (p. 196)

 

애매모호한 현실들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분명하고 간단한 줄로 알았던 것들이 흐릿해진다. 삶은 더 복자해지지만 당연히 더 현실에 가까워진다. 전통적인 선을 그어 아군과 적군을 가르기가 그렇게 쉽지 않아진다... 복음서의 이야기에 보면 예수께서 '사탄'을 그 호칭으로 직접 부르신 경우는 두 번밖에 없다. 한 번은 유혹의 내러티브에서 그를 책망하실 때였고(마 4:10), 또 한 번은 하나님의 특이한 계획에 저항하는 최측근 동지를 책망하실 때였다(막 8:33).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하나님과 사탄의 차원에서는 분명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인간의 차원으로 내려오면 훨씬 덜 분명해진다. (p. 196-7)

 

예수께서 환전(성전의 공식 화폐만 사용이 허용되었다)과 짐승 제물의 매매를 중단시키신 것은 곧 상징적인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사실상 제사 제도 자체를 중단시키신 것이다. 제물의 꾸준한 유입이 중단되면 성전은 대책 없이 멈추어 버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성전의 목적이 없어지는 것이다. 1세기 유대교의 정황에서 성전을 중단시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고 계시다는 생각 때문일 수밖에 없다. 성전이 만물의 중심지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모이는 건물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성전은 무엇인가? (p. 207)

 

'하늘'과 '땅'이 오늘날의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 겹쳐져 있고 맞물려 있다는 세계관의 중요한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계신 곳과 그분이 하고 계신 일이 곧 연합의 장소였고 원이 겹치지는 부위였다. 예수는 말하자면 걸어다니는 성전이셨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 쉼 쉬는 자리셨다. (p. 212)

 

이렇듯 예수는 놀랍고 위험하고 어쩌면 무모하기까지 한 비전을 행동에 옮기셨고, 자신이 성전인 것처럼 행동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신성한 공간을 재정의하셨다. 그런데 그와 똑같이 이상하고 위험한 일이 시간의 영역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p. 216)

 

마태는 복음서의 맨 서두에 이 모두를 특이한 방식으로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족보를 세 번에 걸쳐 14세대 단위로 묶어 배열한 것인데(7세대의 여섯 번), 그리하여 예수는 안식 중의 안식이 시작되는 순간에 등장하신다. (p. 218)

 

때가 도래했고 미래와 새 창조가 이미 여기에 있으니 더 이상 안식일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안식일에 관한 율법이 이제는 폐기되어도 좋은 어리석은 규정은 아니었다(물론 예수께서 지적하신 대로 일부 시시콜콜한 안식일 규정들은 터무니없는 극단으로 치달아, 예컨대 안식일에 나귀를 우물에서 끌어내는 일은 허용되었지만 병자를 고치는 일은 금지되었다). 안식일 규정은 표지판이었는데, 그 표지판의 목적이 이제 성취되었다. 안식일 규정은 때가 차게 될 그 시점을 가리켜 보이던 이정표였는데, 지금 그 시점이 임하고 있었다. (p. 219)

 

이 말씀 바로 앞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명하고 예리한 말씀들이 나온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처음에는 작지만 나중에 자라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된다. 또 하나님 나라는 반죽에 섞은 누룩과 같아서 반죽 덩이 전체를 변화시킨다. (p. 220-1)

 

이 모든 흐름은 예수의 부활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부활 자체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건들 또한 우리가 합리화하려 해도 부질없는 짓이다. 원한다면 밎지 않아도 좋다. 신이 존재한다 해도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 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의 초연한 신념을 고수해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성경이 주장하는 내용들만이라도 보아야 한다. 이런 '기적들'은 현재의 창조 세계 내에서는 거의 혹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 세계는 물질이 유한하고, 인간이 물 위를 걷지 않고, 천하의 해상 왕이 잠잠하라고 명해도 폭풍이 사납게 날뛰는 곳이기 때문이다. (p. 223-4)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임하고 있고, 하나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이 마침내 만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굵고 짧은 기간 동안 하나로 수렴하고 있고, 하나님의 새 창조와 현재의 창조 세계가 뜻 밖에 서로 조우하고 있다고 말이다... 바로 이런 일련의 전제 하에서만 우리는 내러티브의 한복판에 나오는 이 가장 특이한 순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내려오되 예루살렘 성전이나 시내산 꼭대기가 아닌 예수 자신께로 내려왔다. (p. 226)

 

첫째, 우리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천국에 가는 법'을 가르쳐 주러 오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은 많은 세대 동안 서구 기독교에 널리 대중화되었지만, 결코 안 될 말이다... 즉, 하나님은 지금 여기 '땅'엣 왕이 되시는 중이고, 그 일이 벌어지기 위해 그들이 기도해야 하고, 그 일이 정말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들을 그분이 하시는 일 속에서 알아보아야 하며, 그분이 일을 다 이루시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p. 229-30)

 

오히려 통상적 부류의 혁명을 그만두고 대신 전혀 다른 방식을 찾는다는 의미였다. 그분은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찾는다는 의미였다. 그분은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사용하신 단어들은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통상적인 '저항' 운동들에 가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p. 233)

 

왕 같은 인물은 어떤가? 물론 사람들은 장차 그런인물이 통치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고, 찰장으로 이방 나라들을 깨뜨릴 것이라고 믿었다. 종은 어떤가? 물론 종은 고난당하고 죽을 것이다. 종인 그 백성은 무거운 짐을 질 것이고, 그 결과로 특히 순교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어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시 오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사실 것이다. 독실한 유대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성전을 재건하거나 정화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했던 것이다. (p. 265)

 

이렇게 예수는 새로운 사명을 향하여 앞서 가신다. 이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민족과 땅과 성전의 정체를 지키려고 미친 듯이 매달릴 게 아니라, 마음과 삶을 새롭게 함으로 본래의 비전을 되찾아 온 세상을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p. 281)

 

 

 

Ⅳ. 목차

 

서문

 

Part 1 세상, 예수를 오해하다

 1. 야망을 내려놓으면 예수가 보인다

 2. 역사의 수수께끼들을 걷어 내면, 예수가 보인다

 3. 규격화된 종교의 틀을 깨뜨리면, 예수가 보인다

 4. 시대의 짐을 벗어 버리면, 예수가 보인다

 5. 하나님의 열망을 알게 되면, 예수가 보인다.

 

Part 2 톰 라이트, 1세기 예수를 만나 배우다

 6. 세상, 탐욕과 편견이 난투극을 벌이다

 7. 왕의 오심, 미처 생각지 못했던 위대함이 몰려오다

 8. 통치,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시작되다

 9. 하나님 나라, 충분하다 그래서 더욱 기대되다

 10. 영적 싸움, 세상과 가장 본질적인 전투에 임하다

 11. 비전, 온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새 출발을 꿈꾸다

 12. 왕의 입성, 예언이 성취되다

 13. 십자가 죽음, 우주의 초석이 되다

 14. 새로운 통치, 가슴 벅찬 약속 그리고 희망을 맛보다

 

Part 3 예수, 온 세상의 왕이 되다

 15. 지금 여기, 예수와 함께 다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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