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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G. K. 체스터턴 - 정통

by 카리안zz 2020.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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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체스터턴의 책이다.

언젠가 읽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12월에 다 읽었다. 

루이스가 그랬다지, 강한 무신론자로 남고 싶으면 그의 글을 경계해야 한다고. 

어쨌든 강영안 교수님의 추천사로 글을 시작했다. 

 

. 느낀 점

 

언젠가 체스터턴은 글을 쓰지않고 조교인가한테 

말하고 쓰게한다고 들었다. 

다 읽고 그 내용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어디인지 출처를 확인할 수가 없다.ㅠㅠ 

어쨌든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걸 고치지도 않고 그저...ㅎㄷㄷ

천재인가!!

 

무튼

다 읽었지만 모든 부분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의 논지를 따라가기 벅찼을 때도 있었고 

쾌제를 부를 때도 있었다. 

 

그는 시대의 공격에서 기독교를 변증한다. 

가장 와닿았을 때가 포스트 모던에 대한 비판을 했을 때다. 

 

"즉 고정된 목표가 있는데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이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는 뜻이라면, 가령, 여인들이 우아하게 되고 싶다면, 한 시대에는 뚱뚱해짐으로써 그리고 다른 시대에는 날씬해짐으로써 조금씩 진보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아해지고 싶은 소원을 그만두고 타원형이 되고 싶은 마음을 품기 시작한다면 그들이 진보를 이룩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만일 표준 자체가 변한다면, 어떻게 표준에 함축되어 있는 진보가 있을 수 있겠는가?" - (p.83)

논리들을 단순히 잘 비튼다. 

유물론에 대한 비판을 보자. 

 

"현대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저 높이 치솟은 유물론은 결국 한 가지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가정이다. 만일 한 사물이 계속 반복해서 움직이고 있다면 아마 죽은 상태일 것이라는 가정이다. 시계의 태엽장치가 그런 것처럼... 즉 그 힘이나 욕망이 점차 죽어가거나 꺾어지기 때문에 생긴다. 사람은 약간 쇠약해지거나 피곤해졌기 때문에 동작을 바꾸게 된다. 걷는 일이 피곤해져서 버스를 타게 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지겨워서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 (p. 129)

그의 유쾌한 논증을 한 번 보자. 

 

 현대의 논쟁석상에서, 이런저런 신조는 한 시대에는 신봉할 수 있지만 다른 시대에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습관이 생겼다. 어떤 도그마가 12세기에는 믿을 만했지만, 20세기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어떤 철학은 월요일에는 믿을 수 있어도 화요일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차라리 우주가 3시 반에는 적당한 상태였으나 4시 반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당신의 우주관을 얘기하는 편이 낫겠다. 

 한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시계나 세기에 달려 있지 않고 그의 철학에 달려 있다. 만일 어던 사람이 불변하는 자연법칙을 믿고 있다면, 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기적도 믿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법칙 뒤에 있는 어떤 의지를 믿는다면, 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기적도 믿을 수 있다. (p, 157)

 

만일 내가 중세인이 어떤 면에서 미신적이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하면, 그들의 궁극적인 답변은 중세인이 기적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만일 내가 "한 농부가 유령을 보았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런데 농부는 아주 속기 쉬운 사람이다"라고 응답한다. 그래서 내가 "왜 그렇게 속기 쉬운가?" 라고 물으면, 그들이 유령을 보기 때문이라는 답변만 얻을 뿐이다... 여기에다 한 가지 사항을 덧붙ㅇ는 게 공평하겠다. 실은 불신자가 합리적으로 기적을 부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논법이 있는데도 보통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사용하지 않는다. - (p. 294-5)

마치 C. S. 루이스가 떠오른다. 이리도 유쾌한 논증이라니!허허 

그 외에도 그의 변증은 내 책 속 中을 보길 바란다.

그의 예리한 논증을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맛배기는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표시해논 그의 유쾌한 논증을 다 옮기기에는 

시간이 너무 가기에 몇 개만 옮겨다 놓는다.

 

체스터턴의 유쾌한 논증을 옮기다 보니 역시 또 행복해진다. 

어찌 이를 생각하며 쓰는게 아니라 

떠오는 말로 그냥 떠들었을까? 

그 대단한 순발력이 부럽다.

 

 

. 메모와 코멘트

 

도덕이란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네가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너를 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이런 거래 관계가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우리가 이 거룩한 곳에서 서로 치고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그 흔적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도덕을 얻은 셈이었다. 그들은 용기를 배양하지 않았다. 신전을 위해 싸우다보니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결함을 배양하지 않았다. 제단을 위해 스스로를 정결케 하다보니 깨끗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는 잉글랜드 사람에게 알려진 유일한 초기 문서이므로, 이런 사실은 그 문서에 근거해서도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p. 145)

- 이 논증은 현대에 통할까? 이제 이 논증은 인류학자에게 맡기자!ㅎㅎ 

 

자살은 하나의 죄일 뿐 아니라 대표적인 죄이기도 하다. 그것은 존재 자체에 관심을 두기를 거부하는,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악이다. 즉 인생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p.154)

- 당시의 자살이 어떤 맥락인지 모르겠다. 앞에 문맥을 보면 자살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들 때문에 이리 강경하게 말하는 것일까?

 

기독교를 비난하는 비난하는 전자의 입장은 그것이 병적인 눈물과 위협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의 품에서 기쁨과 자유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후자의 입장은 기독교가 허구적인 섭리를 들어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즐거운 보육원에 둔다는 것이었다. 한 위대한 불가지론자는 왜 자연은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고 왜 그것은 자유로워지기 어려운가 하고 물었다. (p. 177)

-와우! 

 

블래치포드 씨와 같은 대중 과학의 신봉자는 기독교와 불교가 아주 비슷하다고 늘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도 흔히 그렇게 믿고 있다. 나도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믿었었다.

-당시엔 이런 주장이 유행했나 보다. 

 

 어떤 현대의 몽상가들은 개미와 벌이 우리보다 우월한 사회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하나의 문명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는 그것이 열등한 문명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줄 뿐이다. 이제까지 개미 언덕이 유명한 개미의 형상으로 장식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사람이 있는가? 이제까지 벌집이 그 옛날의 멋진 여왕의 이미지로 깎여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는가? 그런 적은 없었다. 사람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큰 간격은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 282-3)

- 헙. 현대의 건축은 개미와 벌에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걸로 아는뎅ㅠㅠ 이런!! 허허

 

 이방인의 작은 꼬리표였던 기쁨이 지금은 그리스도인의 거대한 비밀이다. 이제 내가 이 혼란스런 책을 덮으면서 기독교의 기원이 된 그 이상한 작은 책을 다시 열어본다. 그리고는 다시금 일종의 확신에 사로잡힌다. 복음서들을 가득 채우는 그 거대한 인물이 다른 모든 면에서 그렇거니와, 이 면에서도 스스로 크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상가들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그의 연민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무심결에 표현된다시피 했다. 고대와 현대의 스토아학파는 눈물을 감추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결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고향 도시의 앞날을 내다보며 공공연하게 백일하에 눈물을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무언가를 감추었다. 장엄한 초인들고 위엄 있는 외교관들은 분노를 억제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결코 분노를 억제하지 않았다. 그는 성전의 앞 계단에 있던 가구를 뒤엎었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럼에도 그는 무언가를 억제했다. 나는 지금 경외심을 품고 이말을 하는 중이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 인물 속에는 수줍음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한 가닥의 실이 있었다. 그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을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감춘 그 무엇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침묵하거나 서둘러 고득을 택함으로써 계속해서 은폐한 그 무엇이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땅 위를 걷는 동안 너무나 커서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때로 나는 그것이 그분의 환희가 아니었나 하고 상상해본다. (p. 311-2)

- 아! 마지막 이 한 문달을 나는 기대했던 걸지도! 그렇다! 오, 예수님! 정녕 그러한 분이시다!!

 

 

 

. 책 속 中

 

광기를 실제로 낳는 것은 바로 이성이다. 시인들은 미치지 않는데 비해 장기꾼들은 미친다. 또 수학자들이미치고 돈을 계산하는 출납원들이 및니다. 반면에 창조적인 예술가가 미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만, 나는 지금 논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신이상의 위험은 상상 속에 있지 않고 논리 속에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p. 47)

 

광기란 뿌리 없이 사용된 이성, 빈 공간에 있는 이성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올바른 근본 원리가 없이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미치게 된다. 그는 첫머리부터 잘못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람이다. (p. 68) 

 

즉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병적인 논리학자는 모든 것을 명료하게 만들려고 애쓰다가 모든것을 신비롭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신비주의자는 한 가지를 신비로운 것으로 내버려두다 보니 다른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결정론자는 인과론을 아주 분명하게 정립한 뒤에는 자기가 가정부에게 "만일 당신이 괜찮다면"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의지를 거룩한 신비의 영역에 그냥 있도록 허용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 자신과 가정부와의 관계는 투명하고 확실한 관계가 된다. 도그마의 씨앗을 가장 캄캄한 곳에 둔다. 그런데도 그것은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풍성하고 자연스러운 건강을 자랑한다. (p. 69)

 

이전 시대의 조롱꾼은 너무 교만하여 설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 겸손해서 설득을 할 수가 없다.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 그러나 현대의 회의주의자는 너무 온유해서 그 유업조차 자기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지적인 무력감이야말로 우리가 안고 있는 두 번째 문제점이다. (p.77-8)

 

당신은 호랑이를 우리에서 해방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그를 그의 줄무늬로부터 해방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낙타를 그 등의 혹으로부터 해방시키지는 말라... '삼각형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썼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으나, 만일 삼각형이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삼각형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p. 92-3)

 

우리 문학에서 풍자가 사라지고 있는 이상한 현상은 맹렬하게 붙잡아야 할 원칙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p. 96)

 

우리는 모두 똑같은 정신적 재난을 당한 상태에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무엇인지를 잊어버렸다. 우리가 상식, 합리성, 실용성, 실증주의 등으로 부르는 그 모든 것은, 삶의 수평적 차원에서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영, 예술, 황홀경 등으로 부르는 그 모든 것은, 어느 장엄한 순간에, 우리가 잊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p. 118) 

 

가장 흔한 부류의 문제는 이 세계가 거의 합리적이긴 하지만 무언가 조금 부족하다는 점이다. 삶은 비논리적인 실체가 아니다. 하지만 논리학자에게는 하나의 함정과 같다. 그것은 실제보다 조금 더 정확하고 규칙적인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정확성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실은 부정확성도 감춰져 있다. 그 황폐한 면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p. 169)

 

그런데 크롬웰과 앨바의 대량 학살 역시 기독교 특유의 범죄였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언제나 전쟁을 금하는 동시에 언제나 전쟁을 저지른 이 기독교는 도대체 무엇인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욕했다가 돌아서서 항상 싸우려 한다고 욕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 엄청난 학살과 이 엄청난 연약함은 과연 어떤 수수께끼 같은 세계에서 태어난 것인가? 기독교의 모습은 매 순간마다 더 괴상한 모양으로 변해갔다. (p. 180)

 

기독교의 교리는 삶의 변칙성을 간파했다. 즉 삶의 법칙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외적인 것들도 내다보았던 것이다. 기독교가 자비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과소평가하는 셈이다. 누구든지 자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은 모든 사람이 그걸 발견했다. 그러나 자비로운 동시에 엄격하게 되는 계략을 발견하는 일, 이것은 인간 본성이 지닌 이상한 필요를 미리 내다보는 조치였다. (p. 201)

 

불평등은 평등만큼이나 하나의 가치 기준을 함축하고 있다. 동물들의 무질서로부터 귀족정치를 끌어내는 것은 거기서 민주주의를 끌어내는 것처럼 감상적인 처사다. 귀족정치와 민주주의는 모두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일 뿐이다. 후자는 모든 사람이 귀중하다고 말하고, 전자는 일부 사람이 더 귀중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연은 고양이가 쥐보다 더 귀중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 주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연은 고양이는 탐나는 동물이라거나 쥐는 불쌍한 동물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고양이를 더 우월한 동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대다수가) 생명이 죽음보다 낫다는 특정한 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쥐가 독일 비관주의를 좇는 쥐라면, 그는 고양이가 자기를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가기가 무덤에 먼저 도달함으로써 고양이를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는 고양이를 계속 살아 있게 만듦으로써 그에게 무서운 벌을 가했다고 느낄 것이다. 마치 세균이 전염병을 퍼뜨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듯이, 비관주의적인 쥐는 자기가 고양이 속에 의식적인 실존의 고문을 재발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크게 기뻐할 것이다. 이 모두는 쥐의 철학에 달렸다. 당신이 무엇이 우월한지에 과한 모중의 교리를 갖고 있지 않으면, 자연속에 승리나 우월성이 있다는 식으로 두무지 말할 수 없다. 만일 득점 시스템이 없으면, 고양이가 득점을 올리고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p.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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