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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랭던 길키 - 산둥 수용소

by 카리안zz 2020.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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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물결플러스 대표이신 김요한 목사님이 많이 팔렸으면 하는 이 책이 안팔려 너무 아쉽다고 하시길래 어떤 책인지 싶어 구입을 했다. 그리곤 계속해서 이 책만큼은 많이 팔렸으면 하며 계속된 홍보를 했다. 그 홍보에 넘어간 나는 이 책의 맛을 그만 봐버렸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을 다 읽게 되었다.

 

. 느낀 점

 

 인간은 과연 선할까?

 일단 이 책의 초반부를 읽다보면 약간은 지루했다. 김 대표님의 계속된 홍보가 아니었으면 아마 초반의 산을 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3장부터인가 몰입력이 쭉쭉 높아졌다. 랭던 길키의 빼어난 글빨이 한 몫한 것 같다. 그의 미세한 관찰력을 흥미롭게 잘 펼쳐 나갔다. 물론 그런 글을 잘 읽히도록 편집을 해주신 새물결플러스 출판사에도 감사드린다. 

 1장을 넘어서 갈수록 흥미가 돋는데 인간은 과연 합리적일까 하는 의문을 그는 명쾌하게 아니라고 보여준다. 계속된 그의 성찰은 인간은 그다지 합리적이지도 않고 본인의 이익이 있으면 움직이며 그렇지 않을 때는 전체가 이익일지라도 개인은 그것을 거부한다고 보았다. (p. 147, 157-8, 167 등)

 그는 서구가 그도톡 확신했던 인간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의심하며 왜 그토록 거기에 확신하도록 했을까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가려진 현실에 갇힌 나머지 이 세상 모두가 그런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p. 168-9) 더 나아가 그 망각 속에서 원죄와 같은 교리가 환영 받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된다. (p. 169) 그는 잉여가 없는 산둥 수용소라는 장소에서 인간의 진면목을 파악해 나갔다 시작한다.(p. 170)

 

 이런 수용소 안에서 랭던 길키는 인간 본연의 문제들을 관찰하고 분석해 나가기 시작한다. 특히나 5장, 6장, 7장은 그 관찰이 아주 빛이 났다. 더군다나 이 책의 장점은 사례를 통해서 근거를 더해가니 더욱 설득력이 있다. 

 

 9장과 10장은는 근본주의 개신도들이 좀 봤으면 하는 장이다. 으이구! 삐뚤어진 시각은 악을 범한다.(p. 316,323-4, 328, 331, 344, 350)

 

 이 책은 인간 본연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는 책이다. 이 책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다면 책 속 중을 참고하길 바란다. 강력 추천한다!

 

. 메모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이런 체제는 모두에게 이로웠다. 특히 지난 수년간 술집 테라스에서 하이볼(위스키에 소다수 등을 탄 음료)을 너무 많이 마신 사람들(이런 사람이 많았다)에게는 더욱 그랬다. 배가 나오고 턱살이 처졌던 남자들은 다시 날씬해졌고, 햇볕에 그을린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마약에 중독되었던 폐인이던 브릭스 같은 사람은 피부에서 푸른색이 사라지고 체중과 근육이 늘어서, 1943년 8월 다른 미국인들과 함께 송환되어 수용소를 떠날 때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갑작스레 우리 모두는 평등한 노동자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이를 좋아했다. 북경에서 온 학생(지금은 예일대에서 중국학을 가리치는 유명한 교수가 되었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기차역에서 짐 가방을 들 때마다 비틀거리지 않아도 되겠네요!" (p. 38)

-아이러니

 

 정의는 이론과 샐자가 달랐다. 이론의 영역에서는 정의를 이루는 데 책임이 따르지 않지만, 실제 삶에서는 합리적이고 공정하다는 것은 내 소중한 삶의 공간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갈등

 

이건 미국인 재산입니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재산은 적군이 아닌 오직 미국인들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평판에 큰 오점을 남긴다 해도, 반드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우리 미국 재산에 대한 권리를 지켜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이곳에 물건을 보낸 적십자 후원자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실하게 우리의 권리를 행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문적인 변호사로서의 읜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몇 개의 꾸러미를 받든 상관없습니다."

 ... 사실 그의 말은 문제의 핵심(배고픔, 불안, 이기심)을 건드리지 않았다. 인종과 계급을 뛰어넘어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선한 영혼을 가진 수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후원하여 만든 적십자사가, 지금은 절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규모 집단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니, 참으로 역설적이었다! (p. 198-9)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 

 

"그럼, 어쩌겠다는 겁니까? 공정한 방법으로 방을 구할수 없으니 벨기에인들을 추운 바깥에서 자게 하겠다는 겁니까?" 켐밸은 자신의 논리가 이겼다는 걸 알고는 씩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벨기에인들을 고통받게 하는 것이(그들의 고통이 독신 여성들의 고통보다 훨씬 클 텐데) 그나마 양심의 가책을 덜어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충고대로 가서 독신 여성드를 옮기세요."(p. 223)

- 고통을 인질삼아 말한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양심적 가책이 없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노동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느냐 하는 문제였다. 고용도 하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해고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게으른 사람을 열심히 일하다록 만들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 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용소의 그 누구도 게으른 사람의 태만을 중단시킬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p. 237)

-수용소 안에서 인간사 문제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법이라는 것이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따라서 법의 제 1기능은 과거의 내 생각처럼, 추상적으로 무엇을 옳고 공평한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심을 통제하여 그 이기심이 사회를 파괴하는 데 사용되기보다 사회를 창조적으로 이끄는데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p. 257)

- 이 책의 장점은 사례를 통해서 그의 이야기에 근거를 더한다. 그것도 어려운 주제들을 

 

. 책 속 中

 

 수용소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다른 사람을 볼 때 그가 영국인인지, 유라시안인지, 미국인인지를 보았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가 유쾌한 사람인지 불쾌한 사람인지, 부지런한지 게으른지, 그의 성품을 보게 되었다. (p. 51)

 

전쟁 경험이 모두 그러하듯, 수용소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운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이렇게 사회에서 통용되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우리는 이웃 사람을 보면서, 그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인간인지와 관련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p. 51-2)

 

오히려 기술적인 지식과 방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다시 말해 "도덕적"이거나 "영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던 것이다. (p. 142)

 

그때까지 나는, 보통의 문명화된 인간인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단 상황을 이해하면 공정하고 관대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철학자, 교육자, 사회과학자, 사회심리학자들 대부분이 당연히 그렇다고 믿었다. 현대 문화는 과학 지식과 기술 발달이 사회 진보를 이끌어왔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이런 주장이 함축하는 바는,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은 조직적인 탐구를 통해 분명하게 사물을 이해하게 되면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가정 아닌가? (p. 147)

 

공정한 이성은 필요한 순간에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조화를 찾으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성이란 사회적 조화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증상 혹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맞겠어! (p. 157-8)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행위가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고는 나중에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을 찾으려 한다. (p. 167)

 

왜 우리 문화는 그리고 그 문화의 산물인 나는 인간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낙관적으로 확신했던 것일까?... 내 과거의 삶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흔들릴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중상류층 사회에 익숙해 있었다. 거기서는 모두가 편안하고 물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 그러니 사람은(적어도 우리 그룹 안에 있는 사람은) 대체로 공정하고 관대하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이런 상류 계층이 누리는 표면적 조화 아래에, 이제 내가 막 보기 시작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더 넓은 공동체 세사에서 일어나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갈등과 비즈니스 세계의 냉혹한 경쟁들은(여기서는 직업, 인종, 계급, 민족 간의 근본적인 갈등이 일어난다), 안일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들에게 인간의 적개심, 이기심, 편견 같은 추한 면모들을 보여준다. (p. 168-9)

 

즉, "원죄"나 인간의 내재적인 이기심 같은 것은 옛날 비관주의자나 수도사들이 고집하는 한물 간 생각이거나, 현대 소설가나 극작가가 만들어낸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p. 169)

 

급할 때를 대비해 여분으로 남길 것이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의 도덕성이나 공정성이 다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진짜 내면을 관찰하기 딱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p. 170)

 

한 시간 정도의 노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조건(예를 들어, 거주 공간이나 음식의 양)과 관련될 때는 이런 선의는 감소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결국에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깥세상에서는 우리 대학 근교의 집주인들처럼 개인 관계에서 얼마든지 관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국가 안보, 경제적 권리, 숙소 제한, 인종 간 정의 같은 더 깊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고집을 피우거나 편견을 주장하거나 심지어 악의적으로 대항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나는 기독교 도덕론자들이 "개인의 선함"뿐 아니라 사회구조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확신한다.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은 사회 구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이 사회 구조 영역에서 공의와 관대함을 발견하기란 훨씬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 (p. 172)

 

인간 지성에 대한 이런 낙관적 묘사는, 살아 있는 그대로의 삶의 실존보다는 연구나 실허믈 통해 이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익숙한 학자들이 만든 신화라 할 수 있다. (p. 172-3)

 

합리적 행동은 도덕적으로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행동이다. 나는 이기심 없는 도덕성이야 말로 인간이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수 조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하지만 학자들은 반대로, 인간이 이성적이 되면 그 결과로 이기심 없는 도덕성이 나타난다고 믿는다). (p. 173)

 

"만약 우리가 옛날처럼 인간을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p. 177)

 

부란 절대로 공동체에 완전한 축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경우 부는 축복이라고 간주된다. 하지만 사실상, 부는 운 좋게도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음식과 평안을 제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이 좋지 않아 부를 가지지 못한 공동체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며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만든다. 부는 하나의 역동적인 힘으로 너무나 쉽게 악해질 수 있다. 부는 선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p. 193)

 

내게 원죄 사상이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p. 211)

 

우리는 선을 원하지만 의지에 있어서 악하다는 원리가 그 어떤 판단 기준보다 더 잘 우리의 경험을 설명해준다. 내가 수용소에서 본 것은, 바로 원죄론이 말하는 것이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행하고 싶은 바를 무엇이든 마음껏 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서로 사랑하기를 원할 자유는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는 그것을 정말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매여 있었다. (p. 212)

 

민주주의 정부 형태로서 지극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권위는, 권위를 사용해야 할 바로 그 대상자들로쿠터 나온다. 따라서 권위의 합법성을 묻는 질문에 합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선거를 통해 뽑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권한을 얻었냐고요? 바로 당신들로부터지요! 그러니 우리가 정지갛게 일한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는 다른 사람을 뽑으세요." (p. 226)

 

내가 경험으로 배웠듯, 인간은 이웃을 희생시켜서라도 이웃보다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죄인이다. 따라서인간다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효과적인 법이란 인간의 행동을 충분히 통제할 만큼 "현실적"이어야 한다. (p. 258)

 

내 옆에 있던 영국인 은행가는 트럭이 떠나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저들 대신 개신교인들이 떠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가톨릭 사제들이 우리에게 남긴 인상은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p. 331)

 

분명히 우리 공동체는 공동체의 존재마저 위협하는 심각한 도덕적 문제들에 오랫동안 직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개신교 리더들은 이런 심오한 삶의 문제와는 별 상관이 없는 도덕적 논쟁과 악행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들이 가진 도덕적 강점은, 원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추진력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문제와는 무관하게 기능했다. 선교사들은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며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을, 그들이 다만 담배를 피우고 거친 말을 한다는 이유로 "연약한 자들"이라고 판단했다. 심지어 자녀들에게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도덕성은 우리 삶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하는 대신 오히려 남을 헐뜯는 역할만 하게 되었다. (p. 350)

 

라인홀드 니버가 말했듯, 종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은혜가 충돌하는 궁극적이 전투지다. 따라서 인간의 교만이 이기면 종교는 인간의 죄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전투 속에서 인간자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종교는 모든 인간이 갖는 이기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p. 360) 

 

사실 조금만 연구해보면 인간의 선함이나 도덕성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증명 불가능한 종교적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면, 반대되는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인본주의자의 태도 또한 비합리적임이 분명하다. (p. 428)

 

그렇다면 이것들은 종교적 의미에서 죄라 할 수 있다. 물론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죄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겠지만 말이다. 죄란 유한한 대상에게 궁극적인 종교적 헌신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즉 죄란 자아와 자아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인 관심과 헌신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렇게 더 심오한 죄의 관점에서 보면, 자아와 자아가 소유한 것에 대한 과도한 사랑으로부터 이웃에 대한 무관심, 불의, 편견, 잔인함 같은 도덕적 악행들, 그리고 "죄"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파괴적인 행동 양상이 생겨난다. (p. 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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