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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데이비드 카 - 거룩한 회복탄력성[감은사 I 트라우마로 읽는 성경 I 성경 I 트라우마 I 성경읽기]

by 카리안zz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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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회복탄력성이지만 나는 부제가 더 제목 같았다. 트라우마로 성경을 읽어본다. 저자가 트라우마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다. 2010년 그는 거의 죽을 뻔한다. 자전거를 타다가 언덕에서 넘어지게 되어서다. 의사의 말로는 자신이 알기론 이 정도의 흉부 외상의 수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했다. 죽을 뻔한 이 경험이 1년 전 시작했던 트라우마와 성서라는 연구 계획과 절묘하게 맞물렸다.

 

트라우마로 본다면 이스라엘의 다른 나라들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들은 수 세기에 걸친 고통과 공동체적 회복탄력성의 잔존물이 기록된 보관소다. 다른 나라의 신화들이 승리에 초점을 맞추면서 나라들과 함께 몰락한 반면, 성서는 거대한 재앙의 잔존물에 대해 말한다.”(19)

 

북이스라엘은 멸망했고, 남유다도 결국 망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많은 상류층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떠났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영원한 왕국을 약속했는데 유다왕국이 멸망했다. 온 마을이 불탔다. 학살이 시작되었다. 결국 예루살렘마저 함락당했다.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다.

 

“포로지로 끌려간 이 수천 명의 상류층 유다인들은 유다 외에 다른 곳에서는 살았던 적이 없었다. 대부분은 전 생애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지냈다. 이제 그들은 인구가 적은 바빌론의 여러 지역에 재정착했고, ...포로민들의 정착촌에 흩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전에 이 포로민들은 유다의 제사장들, 관리들, 다른 특권 지도층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강제로 이주됐던 이유다. 이제 그들은 낯선 땅에서 외국이었다.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바빌로니아 포획자들의 조롱을 견뎌야 했다. 이 포로민들은 한 세기 전에 형제 국가 이스라엘이 영구적으로 멸망됐을 때 발생한 것과 동일한 일들-수도의 파괴, 왕정의 종료, 유배-를 겪었다.우리는 한 시편(시 137편)에서 그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데... 거기에서, 한 포로민 집단은 바빌로니아 포획자들의 조롱을 견디면서 혼란과 분노를 표명한다.”(102-3)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시편 137편 중)

 

언제가 임목사님과 이야기하던 중에 신약의 부활의 빛으로 쓰여졌듯이, 구약에는 포로기라고 했다. 저자도 마찬가지 표현을 한다.

 

“나는 이 장에서 이 이야기들이 포로기 시기의 새로운 빛 안에서 다시 읽혔고, 수정, 확장됐다고 주장한다.”(130)

 

저자는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성경의 이야기 중에서 다시 읽혔고, 수정, 확장된 내용을 이 책에 담았다. 에스겔의 이야기, 예레미야의 이야기, 이사야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에서도 그 트라우마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설교에서 전할 때는 수정, 확장 부분은 빼고 다시 읽혔다는 것만 강조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깐, 시편 137편을 읽어주며 바벨론 강가에 앉은 포로기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가 어떻게 읽혔겠는가? 신약의 사람들에겐 어떻게 읽혔겠는가?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거친 우리에겐 어떻게 읽히겠는가? 오늘 우리에겐 바벨론이 무엇이며 시대를 조망하는 것도 중요하겠다.

 

여튼, 이 책에선 알짜배기 정보들이 많았는데 감탄하면서 읽었다. 대표적으로 이런 식이다.

 

“수 세기 동안 여러 해석자들은 자신의 아내를 애도하지 못했던 에스겔로 인해 혼란을 겪었지만, 이 이야기는 포로민의 심리적 마비상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예루살렘이 잿더미 안에 있고 유다인들이 바빌론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입술을 가리지 아니하며 사람의 음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발에 신을 신은 채로 두고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한다”(겔 24:22-23). 이 포로민들은 에스겔서에 묘사된 에스겔처럼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전형적인 “삶 안에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110)

 

물론, 너무 트라우마라는 틀에 맞춰서 성경 보는 것 아닌가 싶었다. 신약부분에서는 동의되지는 않더라. 저자는 트라우마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자기비난, 이질성에 대한 두려움(183-4)에 대해 꾸준히 언급하는데 신약부분, 특히 바울에 대해서는 너무 무리하게 접근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럼에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신적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아프리카인 노예들에게서 발견된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내가 보았던 고난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오직 예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내가 보았던 고난을
영광 할렐루야
!”(230)

 

, 십자가를 생각할 때면 늘 고민되는 지점을 저자는 말했다. “분명 회피할 수 있는 고난을 수용하고 시지어 추구하도록 격려하는 교묘한 방식이 많이 존재한다.”(316) 이 부분이다. 남편의 폭력에 노출된 사람에게 십자가로 알며 견뎌야 하는 것인가? 지혜가 필요하다.

 

읽으면서 감탄하고, 동의하고, 아닌거 같기도 하고, 너무 끼워맞춘 것같기도 하고, 생각도 많이 하고, 그런 책이었다. 읽으면 많은 것을 얻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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