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해외에서 출판된 책이 벌써 번역되어서 나왔다.
이형일 박사님이 페친이여서 이 책에 대한 광고를 많이 보기도 했다.
사실, 이번 달에 바로 읽은 생각은 없었으나 설교 준비를 하다
이 책의 내용에서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읽었다.
간단한 설교 구상으로는 예수님의 치유와 오늘 이 시대의 치유를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원래 요한복음 5장을 본문으로
삼으려 했고 거기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의 앞 못보는 사람의 치유를
중심으로 다루려고 했다. 내면적 치유를 중심으로 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런 구상에서 죽음의 세력과 싸우는 예수를 본다면 좀더 깊고 다채롭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읽고 나니 구상을 다 버리고 이 책을 중심으로 본문을 다뤘다.
본문은 누가복음 8장으로 잡았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의식적 부정을 일으키는 세 가지 중 두 가지 원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혈액/정액, 레프라(피부병), 시체가 부정을 일으키는 세 원인이다.
이 원인들과 접촉을 하면 부정해 진다. 왜 부정을 일으키냐면
죽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의 내용을 내 설교의 구상에 맞게 편집을 좀 했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내쫓는 이야기를 먼저 배치했다.
예수님은 결박된 귀신을 내쫓으려면 더 큰 힘으로 제압해서 집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이미 말씀하셨다. 군대 귀신이 딱 그랬다.
누구도 제압할 수 없는 큰 힘이었지만 예수님은 제압하셨다.
그리고 내쫓으셨다. 더러운(부정한) 귀신, 무덤, 돼지 모두 부정한
요소들인데 거라사인은 그 부정함에서 구원받았다.
자, 이제 본격적인 부정함의 원인들에 예수님은 다가가신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에 대한 설명은 넘어가고
부정함에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죽음이다. 시체는 그 죽음의 본토다.
야히로의 딸에게 예수님은 접근하시어 손을 대어 일으키신다.
부정함이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거룩함이
시체, 곧 죽음의 세력에게 다가갔다. 군대 귀신을 내쫓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장악하고 있는 시체에서도 마찬가지로 내쫓으셨다.
예수님의 능력은 더욱 광대하게 보인다. 앞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는
야히로의 딸에게는 직접 손을 대었다면 관에 손을 대고 치유하셨다. 그럼에도
일어났다. 또, 야히로의 딸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지 꽤 지났고 무덤에 안치되려 했다. 죽음의 세력이 완전히 점령하였음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잠식한 세력을 물리치고 일으키셨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는 어땠는가? 손도 대지 않았고 가까이 가지 않았다.
나사로는 죽은지 꽤 되었는지 시체의 냄새까지 많이 났다. 죽음의 세력이
정복하고도 한참이 지난 그 시체에 예수님은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다. 죽으시자 무덤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저 깊은 어둠 가운데 있던 자들 마저도
일으키셨다. 실로 그분의 거룩함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그렇다. 그 거룩함은 오늘 역시도 통용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것이 신앙이다.
죽음의 세력들 속에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넘쳐난다고 믿는다.
언젠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모든 죄의 죽음에서 우리는 해방되고 부활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대강의 설교 내용이었는데 책의 내용을 발췌한 부분을 내 설교에 구성에 맞게 꾸몄다.
현대적 적용에서 죽음의 세력은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나름의 진단을 하였는데
한참 부족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부족한 부분은 성령님에 대한 접근을 했으면
참 좋았지 않아 싶다. 성령님은 살리시는 영이고 사도행전 내도록 활동하시지 않았는가.
설교를 AS해서 성령님의 활동을 좀더 마무리로 잡아야 겠다.
많은 인사이트를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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