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 준비로 과학과 기독교에 관한 책을 네 권 읽었다. 세 권이 전형적인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변호를 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전형적이지 않은 기독교인이자 마르크스주의자, 문예평론가의 변증이야기다. 보는 내내 유쾌했다. 글빨이란 이런 것일까 싶었다. 번역이 잘 된 건지 모르겠지만 술술 잘 읽혔다. 특히 배경지식이 필요한 단어나 문화적으로 번역이 필요한 부분들은 밑에 따로 표시를 해서 설명을 해주었는데 너무 좋았다. 번역에 대한 평가는 원문을 봐야 정확한 평가가 되겠지만 그게 안 되는 나로서는 문장의 연결들과 가독성이 높은 것으로 종종 판단을 하는데 이 책은 정말 잘 읽히며 성실히 번역해주었다는 게 느껴졌다. 번역가 뿐만 아니라 출판사가 좋은 역량을 가졌지 않을까 싶다.
내용 역시도 아주 좋았다. 예일대학교에서 했던 강의를 엮어서 책으로 낸 거다. 테리 이글턴은 단지 이 책을 쓴 저자라고만 알고 있었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사람인지 잘 몰랐다. 구글학술 인용을 보니까 엄청나더라... 이쪽 분야에서는 상당한 분이신 듯 하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분이니 뭐 말을 다했지 싶다. 이글턴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내 조상들이 온 삶을 바친 믿음이 무가치하고 쓸모없다는 비난에 맞서 조상들의 입장을 대변할 필요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을 지켜온 교리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민주주의의 정신에 맞다.”라고 생각해서 이 글을 썼다. 물론, 막연한 옹호는 아니다. 까여도 이런 식으로 까이니 기분이 나쁜 거다. ‘성급한 일반화’, ‘무딘 환원주의의 오류’로 공격하는 수준이니 그렇다.
도킨스와 히친스를 이렇게 뭉개버릴 수 있구나 싶은 문장들이 나오는데 이렇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이 저서 <주문을 깨다>에서 그랬듯이 도킨스도 기독교 신앙이 세상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야바위이론이라고 여긴다. 이런 점에서 도킨스는, 소설을 서툴게 짜깁기한 사회학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소설이라는 형식의 취지를 이해 못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막스 베버의 사회학 책을 읽으며 그만인데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과 힘들게 씨름할 이유가 뭐냐는 식이다.”(17)
“따라서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교리와 리처드 도킨스의 과학자라는 직업 사이에는 흥미로운 관계가 있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킨스도 할 일이 없었으리라는 얘기다. 그러니 도킨스는 자신에게 일거리를 준 이를 의심한다는 건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20)
“히친스가 스탈린주의의 뿌리를 마카베가에서 찾지 않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한편 도킨스는 바울을 히브리서의 저자로 믿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곧 그가 전지성을 지녔다는 뜻이라고 믿는 듯하다. 적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는 현명한 충고를 이들은 완전히 무시한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무신론적 근본주의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거울상처럼 좌우만 뒤집은 채 그대로 닮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무절제한 열정과 강박적인 집착에서만 그런게 아니다... 히친스는 다른 많은 점에서 그렇듯 이 점과 관련해서도 현대 성서학의 여러 세대에 걸친 연구 결과를 소름 끼칠 정도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76-78)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과학의 실패와 재앙에 대해서는 입을 너무나 굳게 다물지만(예컨대 종교재판을 모질게 비난하면서도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서는 함구한다.)”(174)
무신론자들은 왜 공부를 하지 않을까? 평화나무에서 김갑수 씨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지 말하는 영상을 봤다. 이분은 기독교 사상과 지금 대형교회에서 보이는 모습을 구분을 못한다. 이동형 씨 편도 보다가 말았는데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찾아서 공부해보면 된다. 그러면서 김갑수 씨는 지식인 포스를 내뿜는데 우습다. 이글턴의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뭐 김용민 씨는 무신론 비판서 중에 제대로 나온 책이 하나도 없고 나온 책들은 다 허접하다고 하던데 이 책도 그중에 하나일지 모르겠다.
테리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자답게 그 입장에서 도킨스와 히친스를 비판한다. ‘니들은 합리적이라고 말하면서 왜 이 부분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지?’라고 말이다.
“그 같은 이상과 현실 간의 거리라는 측면에서는, 뭐 묻은 뭐가 어쩌고 하는 속담대로 디치킨스가 종교를 비난할 입장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신 있게 말하건대, 히친스가 관타나모 수용소를 기획한 사람들과 아무리 친하게 지낸다 해도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토머스 제퍼슨의 유산을 찾아볼 수는 없을 터이다. 요컨대 히친스와 도킨스 모두 종교에 관한 한 문제의 양면을 동시에 생각하는 능력(이는 완벽한 공평성과는 별개의 문제다)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이 당초 종교를 미워하게 된 근거인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 정치적 좌파라고 다를 바 없다. 그들이 내세우는 고결한 이상과 그것이 현실에서 보여주는 고약한 모습 간에는 큰 거리가 있고, 따라서 종교를 향한 비판의 설득력도 약해지게 마련이다.”(93-94)
내로남불! 물론, 이글턴은 종교인들이 보였던 악한 모습들에는 동의한다. 또, 이글턴의 신학적 입장에 서있는 편은 아니지만 속이 시원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의 신학적인 입장에 동의 못할 부분도 아니다.
“구원은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들을 환영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로부터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미망인을 보호하는 문제다. 놀랍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종교라는 특별한 기구를 통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서로 뒤섞여 살아가는 일상적 관계의 질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일상의 삶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기독교이지 프랑스 지식인이 아니다.”(33)
“정의를 향한 운동들은 민족이나 사회, 국가뿐 아니라 전통적 혈연관계까지도 초월한다는 사실을 도킨스는 읽어내지 못한다. 정의는 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48)
“죽음보다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며, 오직 사랑에서만 문명의 아름다움이 샘솟을 수 있다고. 이성은 너무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이어서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210)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인문학 책으로도 읽으면 참 좋을 책이다! 그러니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일반 출판사에서 나왔겠지. 강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