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처음으로 에어컨을 가동했다. 그러니 책 읽기 능률이 많이 올라가더라. 오늘은 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다 읽었다! 왜인지 진도가 안 나갔지만 꾸역꾸역 다 읽었다. 그리 두껍지 않지만 꽉찬 400페이지는 좀 힘들긴 하다. 다음 책은 프랜시스 콜린스와 칼 가이버슨이 쓴 책과 테리 이글턴의 책을 읽을 예정이다. 아마도 하트의 책보다는 빨리 읽을 듯 싶다. 이번 중고등부 수련회 주제가 복음과의 만남인데 첫째날은 내가 복음을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할 것이고 둘째날은 복음과 세상이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할 참이다. 둘째날 이야기를 위해서 이런 주제를 삼아봤다.
요즘은 듣진 않지만 비아 출판사 팟캐스트를 자주 들었다. 거기에 종종 편집장님이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를 자주 언급했다. (최근에 비아에서 벤틀리 하트의 책이 나왔다! 아, 작년 6월달에도 책이 나왔다.) 대단한 실력자라고. 전공이 철학적 신학, 조직신학이라고 하는데 성경 번역도 아주 잘한다고 한다. 자기가 막 번역하고!ㅎㅎ
하트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굉장히 시니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뛰어난 말빨을 지닌 논객처럼
칼을 내지르는 느낌이랄까. 막상 그의 책을 읽어보니 그런 점들이 느껴진다. 특히 새로운 무신론자 4인방을 평가할 때 그랬다. 그런데 번역이 그런 느낌을 많이 못 살린 것 같다. 내가 번역을 말할 수준은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평해보자면 몇몇 이해되지 않는 문장으로 인해 가독성이 저해되는 경우들이 있다. 믿고 보는 번역가가 절실해진다.
책 내용은 어떨까. 흔히 알려진 새로운 무신론자 4인방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대니얼 대닛, 샘 해리스가 그 4인방이다.
그들은 첫째, 모든 종교의 믿음들은 근거가 없고, 둘째, 종교가 원칙적으로 폭력, 분열, 억압의 원인이므로 평화와 관용을 위해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30)
그들의 인식을 하트는 잘 묘사했는데 이렇다.
"이런 신앙의 시대를 통하여 문화는 정체되었고, 과학은 초췌해졌고, 종교전쟁은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마녀들은 종교재판관들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고, 서구 인간들은 교리와 미신에 의해서,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사악한 연학에 의해서 야만적인 통치로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광신과 신앙주의의 괴멸적 타격으로 인해 고전 학문들의 최후까지 남아 있던 유산들도 초토화된 지 오래 되었으며, 학문의 탐구는 질식되고, 고전 유물의 문화적 유산들도 신앙의 불길 속에 던져졌고, 심지어 "그리스 과학"의 위대한 성취들도 이슬람 문명이 서구에 이것들을 다시 회복시켜줄 때까지 오랜 세월 잊혀져서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자 그리스도교 세계를 파멸시킨 "종교전쟁들"의 결과로서, 계몽주의가 만개하게 되었고, 그것과 함께 이성과 진보, 과학적 성취들과 정치적 자유의 풍요,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새롭고 혁명적인 인식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다."(68)
제1부는 이런 무신론자들의 인식을 설명하고 제2부는 중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중학생때였던가 중세를 암흑기로 배웠다. 과연 중세는 암흑기였을까? 중세 그 천년의 시간이 모두 암흑기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 하트는 제2부에서 이런 편견들의 추적해 나간다. 중세가 나빴던 부분들이 있지만 묘사했던 것처럼 그리 악독한 것은 아니었으며 지나친 편견이라는 걸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밝힌다. 특히나 이런 편견을 부추긴 자료(램지 맥뮬렌 등)를 탐구하며 마치 가짜뉴스를 찾고 팩트 체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3부에서는 마치 혁명과도 같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취를 그린다. 교부들의 가르침이나 수도원에서의 모습 등을 그리며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 오늘날 도덕적 감수성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다른 고대 종교에서는 그런 감수성들이 있었을까?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그런 도덕적 감수성들이 있었을까? 하트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리스도교가 제공한 위대한 서사시, 즉 타락과 구원, 범죄와 성화, 거룩한 성육신과 인간의 영광스럽게 됨이라는 서사시는 인간의 상상 속에 새로운 우주를 제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거닐고, 확장하고, 번역을 누리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옛날의 신들의 통치 아래에서 일찍이 존재했던 것보다 훨씬 심오하고 풍성하고 엄숙한 도덕적 의식을 문화 속에 불어넣었다."(334)
인권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교부들의 가르침 속에 이어져 내려온 인간에 대한 권리. 솔직히 하나님의 형상이자 창조물이 아니라면 인간 모두가 존중 받아야 할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 그리고 하트의 근대에 대한 이 지적은 평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는 분명히 그 사회 자체의 잔인성이나 폭력을 결코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그러나 야망, 범위, 체게적 정확함, 혹은 잔혹성의 측면에서,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강요된 기아, 혹은 근대 전쟁이 보여준 극도의 잔혹함에 비교될 만한 그런 악들을 그리스도인 사회는 결코 키워내지 않았다. 20세기를 뒤돌아보면, 근대성의 발생이 결과로 초래한 것은 곧 유례가 없는 잔혹함과 전례가 없는 극악무도함의 시대를 낳은 것이며, 그리고 이 두가지는 동일한 문화적 실체의 양면이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189)
“근대적 “진보”의 불길 속에 이미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삼켜져버렸는가를 고려해 볼 때, 그런 근대에 많은 희망을 두기란 매우 어렵다.”(370)
계몽이 중세를 보고 암흑이라고 말할 수 있나? 계몽주의 이후 일어난 세계의 비극을 보라. 물론, 하트도 잘 지적하듯이 중세의 잘못들이 그리스도교 본연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아니듯 나는 근대의 전쟁과 비극을 과학에 두고 싶지 않다. 무신론자들은 그렇게 보려고 하겠지만 나는 양심상 그런 식으로 공격을 하고 싶진 않다.
여튼, 하트는 그럼 다시 중세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뜻하는 바는, 옛날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대체로 사라져간 땅에서, 사회적 특권과 권력의 세계를 떠나 자진해서 망명함으로써 자신들을 사랑의 숙련에 헌신했던 고대의 남자들과 여자들의 삶이, 어쩌면 다시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흉내내야할 모델이 될 것 같다는 뜻이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옛날 한 때 제국으로부터의 보호처를 사막에서 찾았고, 그곳에서 그들의 순수한 눈(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볼 수 있는)과 순수한 심장(모든 사람들을 관대한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을 육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는 서양문화의 많은 것들이 신자들에게 사막처럼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옛날 그리스도교 세계의 폐허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필요한 신앙의 피정을 발견할 수 있는 광야로 나가, 그 광야 속에서 옛날에 일어났던 그들의 혁명의 사명을 계속해서 배워야 할 것이다.”(400)
중세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움베리토 에코가 그렇게 말했고, C. S. 루이스도 그렇게 말했단다. 루이스는 직접 중세의 문헌을 읽어보고 말하는 거냐고 말하기까지 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중세를 악으로 산정을 해야 자신들의 정통성이 서는 것처럼 오해한다. 특히 크리스텐돔에 대한 비판 때문인지 중세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려고 내가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우리의 사상의 진수도 중세를 지나며 자란 것이다. 중세는 그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 무수한 시간을 잘라 악이니 선이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트의 글에서 단순히 무신론자들에 대한 잘못된 사실들을 지적한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어 많이 배우는 시간이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