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들고 담당 교역자를 찾아가 예배가 무엇이어야 되는지 당장 가르쳐 달라고 해보자! 괜히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예배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사역자들에게도 이 책은 참으로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19페이지에 질문들이 참 와닿는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 형식들은 복음에 대한 적절한 반응인가?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우리를 함께하는 교제의 삶으로 이끄시는데, 예배 형식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예배와 사역을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돕는가, 아니면 그것을 방해하는가?
그 형식들은 예배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을 투명하게 보여주는가, 아니면 혼탁하게 만드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예배의 전통과 절차가 적절한지를 판단하기에 앞서서 예배의 의미와 내용부터 살펴야 한다.” 이 책은 예배의 의미와 내용을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기독교 예배를 이렇게 정의한다.
“기독교 예배란 성자가 대신 드리신 예배와 중보의 삶 안에서 우리가 성자와 성부의 교제에 성령을 통해 참여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 아버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우리의 반응이다.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바쳐진 한 참된 제사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의 몸과 정신과 영혼을 다해 드리는 자기 제사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감사의 반응이다.”(18-19)
바르트의 제자들은 왜 이리 나를 뜨겁게 하는 것일까. 하우어워스도 그렇고 밀리오리도 그렇고. 박영선 목사님이 ‘바르트가 죽어서 내가 된 것같다’는 말이 참 충격이었는데 그럴만하다. 바르티안들의 글을 왜 이렇게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 때문이 아닐까. 예배조차 실용적이 된 요즘, 시대의 정서가 예배에 흘러들어오는 요즘(96), 은혜 받았다는 말이 내 감정과 연관된 요즘, 저자가 지적하듯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53) 예배조차도 그러한 요즘에, 상호 내주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교제와 연합을 선언하는 말은 우리를 뜨겁게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집중하게 된다. 20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책을 참 감명깊게 읽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알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역사적 예수에 집중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저자도 시종일관 ‘어떻게’보다 ‘누구’신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97). 우리의 많은 말들 속에서 어떨 때는 예수님의 모습 정반대를 그리기도 하며, 관심이 없는 것 같으며, 이미 아는 예수이기에 더 알려고 하지 않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평생의 질문이며 평생의 결단이지 않을까.
“예배란 하나님과 교제하고 서로 교제하는 삶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일이다. 우리는 교제 안에서 우리의 참존재를 찾을 때보다 더 진정한 인간일 수 없고 더 진정한 인격일 수도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101)
인간은 관계와 사랑의 교제 안에서 자신의 참존재를 발견(53)한다는 저자의 말에 참으로 공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배 속에서 우리의 참존재를 발견하며 형성해 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의 교제 속으로 참여가 가능해졌으니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교제로 우리는 참여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 그게 바로 예배다(98).
두서 없이 많은 말들을 했다. 더 하고 싶은 말도 있지만 여기까지. 김진혁 교수님의 해설이 치트키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분들은 혼자 읽기 조금 지루하지 싶다. 공동체에서 다 함께 읽기를 권해본다. 예배 속에서 우리는 얻는 게 너무나도 많다. 가나안 성도의 속출은 사실 요즘 예배로부터의 탈출이 아니었을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나부터 정신차려본다.
개혁주의를 강조하는 신학교를 2년 다녔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에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다. 내가 부족한 것이겠지만 나는 내가 지금 속한 교단의 신학교에서 개혁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음, 개혁주의란 말보다 개혁파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니 계속 개혁파라고 쓰겠다). 두꺼운 개혁교회 교의학을 읽었지만 개혁파가 뭘까 했고, 약간의 반감이 더해졌다. 그러다 이동영 교수의 <송영의 삼위일체론>을 읽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개혁파 예배가 무엇이여야 되는지 나에게 잘 알려주었다. 신대원에서 공부를 성실하게 하지 못한 3년에 시간보다 이 두 책을 읽는 게 개혁파 교회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아, 이 책을 읽으니 다음 책으로 제임스 스미스의 책이 연결된다.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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