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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설교와 목회자

[책리뷰] 마이클 부쉬 엮음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새물결플러스 I 상실과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위로 I 장례식 설교 I 칼 바르트 I 조나단 에드워즈 I 플레밍 러틀리지 I 프리드리히..

by 카리안zz 2022.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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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들은 평소에도 늙은 애비와 게임이나 시합을 할 때마다 지 애비를 이겨야 직성이 풀리더니, 기어이 무덤마저도 저를 앞질러 버렸습니다.”

 

이 책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상실과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위로를 건네는 책이다. 설교자들의 설교를 실은 책이다. 자신의 아이들이 죽은 비극을 설교자들은 설교를 해야 했고, 또는 자신의 교인들의 죽음을 설교한 책이기도 하다. 칼 바르트, 슐라이어마허가 포함되어 있다. 한 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에게도 이런 상실의 아픔이 있었구나. 그 외 서구의 대표적인 설교자인 플레밍 러틀리지의 설교도 실려 있다.

 

나는 여기에 나오는 설교자들처럼 이렇게 아픈 상실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중간중간 찾아오는 기억에 상실감은 멈추어지지 않더라.

 

“그 아이가 생전에 우리와 함께 있었을 때 왜 좀더 잘해 주지 않았을까, 왜 한 번만 더 아이의 손을 잡고 따뜻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하는 열망에 사무쳐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있으며, 우리의 질문이나 묵상이 무슨 소용이며, 우리의 소원이 이 죽음이라는 크고도 냉혹한 수수께끼 앞에서 무슨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37)

 

상실의 결과는 후회인 것 같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는 싸움이었다. 그것도 절연을 하는. 심지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설마하는 마음에, 익숙해진 마음에 그냥 넘겨버렸다. 작년 12월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일주일 정도 함께 있었던 시간이 아버지와 보낸 마지막 시간이기도 했다. 병원을 퇴원하는 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싸웠고, 그때의 대화가 아버지와 했던 마지막 대화였다. 그 시간이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왜 그렇게 싸웠을까. 싸운 뒤 TV가 있는 대기실 한 구석에 있었는데 아빠가 맨발로 TV를 보러 나왔더라. 그때 참 행복한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좋은 아버지는 분명 아니셨다. 나는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슬프지 않을 것 같았다. 애정과 증오가 가득했는데 돌아가시니 증오가 빠져간다. 그러니 이제야 커지는 애정에 미안함이 몰려온다. 마지막 차 안에서 나는 사과하라는 말을 했다. 가족에게. 영화 <세자매>를 보고 그렇게 펑펑 울었다. 사과하라는 그 대사가 내가 아버지한테 했던 마지막 말이었으니까. 나도 그랬으니까.

 

아빠라는 단어를 상실했다. 존재가 사라지니 단어를 잃어버렸다. 평생 달고 살았던 이 단어를 이제 쓰지 않으니 이상하다. 날 때부터 존재했기에 잃어버릴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역을 하면서 만나는 이들과는 그토록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아버지에게도 마지막이 있을 줄 왜 몰랐을까. 항상 처음부터 존재했기에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상실한 뒤 오는 슬픔은 찌르듯이 오는 아픔이 아니라 적막하게 오는 아픔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 날의 얼굴을 기억한다. 돌아보니 죽어가는 얼굴이셨다. 나는 그 모습에 이제야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그리스도의 얼굴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설교했다. 한 편의 설교에 때론 그 사람의 아픔이 녹아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그러니 나는 이 슬픔을 참지 않는다. 더욱 슬퍼하고 더욱 아파한다. 더욱 위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 요한도 무수히 많은 죽음과 고난을 그토록 목격했기에 울었지 않았을까? 터져 나오는 그의 눈물을 그리스도는 닦아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조횽히 찾아오는 기억에 눈물이 난다. 잃어버린 자만이 알 수 있는 눈물이다. 상실의 날들을 살아가면서 기억은 옅어지겠다. 그럼 눈물은 마를까? 아니, 아버지의 나이와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 울 것 같다. 나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는다. 그렇기에 그날을 소망한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그 약속을 믿고 소망하기에 그렇다. 미음, 소망, 사랑 그중에 사랑이 제일인 이유가 이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가 부활하는 그날 눈물이 닦이고 아버지를 다시 만날 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할래. 나는 그날을 소망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나에게 좋은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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