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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설교와 목회자

[책리뷰] 존 스토트 - 존 스토트의 설교

by 카리안zz 202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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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존 스토트! 복음주의계의 교황을 뽑으라고 하면 당연히 존 스토트를 뽑을 것이다. 로잔 언약에서 그는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책도 많이 쓰셨지만 영국 런던 올 소울즈 교회 관할 사제로 30여 년간 목회를 했던 분이기도 하다. 그러니 설교자로 유명했다. 혹자는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를 비교한다. 로이드 존스는 원맨이었다면 존 스토트는 팀이었기에 존 스토트가 떠난 뒤에도 건재하다고 했다. 존 스토트의 후계자는 <하나님의 선교>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라이트이다. 

 존 스토트의 설교라고 하면 나는 "다리놓는 설교"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성경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놓는 설교. 나야 예언자들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을 다리놓기를 주로 한다. 그때의 우상과 지금의 우상을 말한달까? 

 

다리놓는 설교

 학부에서 신학을 배울 때 어떤 교수님은 그냥 성경을 선포하라고 했다. 아마도 교수님은 선포를 하면 성령님께서 각 성도들에게 적용을 하게 하실거라는 맥락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같다. 당시는 저 말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설교는 다리를 놔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는 현장을 직시해야 한다. 교인들이 처해 있는 삶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사회 역시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교인들의 삶은 너무나 다양하다. 어떻게 그 삶을 다 이해할 수 있겠나. 그래서 교인들 중에서는 목사를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들로 치부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시선에 동의하지 않는다. 서로가 처해있는 상황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교인들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살며 이것이 진정한 목회이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목회자가 모든 교인들의 삶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간접적인 방식이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재철 목사님은 문학을 읽으라고 추천을 한다.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문학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학 외에도 다양한 삶을 이해할 책들이 많다. 법조계를 알고 싶으면 앞서 리뷰했던 판사, 검사, 법조계 사람들의 다양한 인터뷰들을 읽으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외에 대한민국의 사회를 읽고 싶으면 나는 드라마도 추천한다. <sky 캐슬>과 <동백꽃 필 무렵>이 참 좋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분석하는 책이라든가 당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떤 이의 시선으로 보는 칼럼들도 추천한다. 또, 심방을 통해 각 교인들의 사정을 듣는다면 그것 역시도 현장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목회자가 다각도로 몸부림 쳐야 문화적인 간극을 어느 정도라도 메울 수 있다고 본다. 존 스토트는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비유는 설교란 하나님에게 받은 메시지를 들을 필요가 있는 동시대인에게 전달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성경의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의 간극을 잇는 다리를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리가 강이나 협곡 이편에서 저편으로 다닐 수 있게 해 주듯이, 설교는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가 성경에서 나와 오늘날 사람들의 삶으로 흘러들어 가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오늘날에도 적실함을 보여 주려면 우리가 짓는 다리의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79)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한 이후에 중요한 점을 지적해 준다. 그는 로잔 언약에서도 그 특유의 균형감을 보였는데 이번에 설명하는 것도 균형감을 보인다. 

 

 보수적 신학을 지닌 설교자들은 간극의 이편, 곧 성경 편에서만 살아가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이편에서 우리는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낍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고, 사랑하고, 읽고, 연구하며, 그 메시지를 설교합니다. 그러나 간극의 저편, 곧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저편의 세계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위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편에서 짓는 다리를 기초가 튼튼하지만 다른 편에는 결코 이르지 못합니다. 적용 없이 강해하는 이유를 해명하라는 요청을 받으면 우리는 성령이 직접 그분의 말씀을 인간 삶의 현실에 적용하시리라 믿기 때문이라고 그저 경건하게 대답합니다. 
 간극의 저편에는 시대와 함께 움직이는 것에 긍지를 갖고 설교의 기초를 현대 세계에 두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동시대인에게 의미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믿을 만한 언어로 기독교 신앙을 재진술하려고 대단히 고심하며, 그래서 사람들이 묻는 질문, 심지어 잘못된 질문에도 답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상의 자기 이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최신 유행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시대와 관계를 맺으려는 열정 때문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79-80)

 

 세상에 소리에 너무 민감해서 거기에 딸려가는 것도 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오늘에 현실에 너무 경도되어 있는 나라서 더욱 되새기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기독교 본연의 것이 무엇인가 더욱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골방이냐 광장이냐의 물음은 선택지가 아니다. 골방도 광장도 두 곳 다 경험해야 한다. 그게 어렵겠지만. 존 스토트의 말을 옮기며 다리놓는 설교에 대해서 말을 맺고자 한다. 

 

 우리는 부정의, 빈곤, 기아, 문맹, 질병, 환경오염, 자연 자원 보존 실패, 낙태, 자비로운 살인 혹은 안락사, 사형 제도, 비인간적인 기술주의, 관료제, 실업, 민족주의와 종족주의, 폭력과 혁명, 군비경쟁, 핵확산, 생물학전과 테러의 위협, 범죄 증가와 범죄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 인종주의 등도 다루어야 합니다. 목록은 끝이 없어 보입니다. 강단에서 이런 주제로 설교하는 것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 주제에 집중한다고 이런 주제의 설교를 금하면 하나님이 오직 영적 문제에만 관심이 있으시고 자기 피조물의 안녕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시사하게 됩니다. 영적 문제만 설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을 분리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을 현실 세계에서 물러서도록 부추기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종교는 사람들을 마취시켜 현 상태를 묵종하게 만드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잘 알려진 비판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꼭 정당의 강령을 홍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모든 사람이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성경적 원리를 정리하여 제시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
 강단에는 언제나 정치적 영향력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정치와 조금이라도 관계있는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습니다. 설교자의 침묵은 그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옹호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설교자가 침묵할 때 강단은 사회를 변화시켜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사회가 되도록 돕는 대신 사회를 반영하기만 하는 거울이 되고 교회는 세상에 순응하게 됩니다. 강단은 중립일 수 없습니다. (89-91)

 

 영적인 문제와 현실의 문제. 이 두 문제 사이에서 목회자들은 지금 어느 쪽으로 기우려져 있는가 진단해야 한다. 그것은 각 교회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다. 각 교회의 목회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 보길 바란다. 

 

본문 선정하기

 목회자들은 설교가 주업이기도 하다. 물론 많은 행정적인 일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많은 설교를 처내야(?) 한다. 그러면 설교 본문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 나는 설교를 많이 하진 않지만 여기에 대한 고민이 있다. 존 스토트는 여기에 대해서 답은 없다고 말하긴 한다. "정해진 한 가지 답은 없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모든 설교자는 자기 개성과 상황에 맞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지만 서로에게서 배울 수는 있습니다."(116-117)

 설교자들에게 배울 점을 존 스토트는 알려 준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첫째는 전례이다. 내가 속한 합동측 교회는 교회력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통합측은 교회력에 맞춰서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다. 존 스토트는 이 점을 말한다. 아마도 그가 속한 곳이 성공회이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교회력에는 "기독교의 주요한 세 축일인 대림절, 부활절, 오순절을 중심으로 하는 달력을 따르는"(117) 것을 말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력에 맞춰 성경을 듣는 걸 한다. 예전 성당의 예배방식이 궁금하여 친구에게 부탁해서 한 번 드려봤는데 그곳에서도 교회력에 맞춰서 일반 성도가 나와 성경읽는 시간을 가지더라. 교회력에 따른 설교가 왜 좋은지에 대해 존 스토트는 제임스 스튜어트의 말을 빌려 온다. "교회력에서 매우 중요한 절기인 대림절, 성탄절, 사순절, 성금요일, 부활절, 성령강림절[오순절], 삼위일체주일 등은 우리에게 방향을 정해 주고, 기본 주제를 제시한다. ... 이 절기들은 시간을 지체하기 쉬운 곁길에서 위대한 구속의 대로로 다시 돌아오돌고 우리를 부른다. 이 절기들은 우리가 설교할 때 끊임없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로 돌아오도록 해 준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선포하려고 존재한다."(118)

 둘째는 외부 사건을 고려해야 한다. "외부 사건은 국가적 사건(예. 선거, 스캔들)이나 공적 논쟁(예. 사형 제도, 실업, 이혼)일 수도 있고, 자연재해(예. 홍수, 기근, 지진)나 다른 참사(예. 비행기 추락, 열차 충돌)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온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머릿속에서 간단히 치워 버리지 못합니다. ... 설교자는 회중의 생각 속에 있는 중요한 공적 문제들에 민감해야 합니다."(118-119)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최순실 사태와 같은 국정농단을 들 수 있다. 지난 번 내가 준비한 설교 역시도 원래 마무리가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윤동주를 통해 배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신천지의 문제가 대두되어서 결론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목회적 요소다. "훌륭한 설교자는 언제나 좋은 목회자라는 말이 있는데, 옳은 말입니다. 좋은 목회자는 자기 성도의 필요, 문제, 의심, 두려움, 소망을 알기 때문입니다. 회중에게 성경 어느 부분을 더 잘 알고 싶은지, 인생의 어떤 문제에서 성경의 분명한 답변을 얻기 원하는지 묻는 것이 바람직합니다."(119) 아까 말했던 목회자가 심방을 해야 할 이유 중에 하나다. 성도들의 어려움들을 성경을 통해서 함께 알아가야 하고 그것을 설교해야 한다. 

 넷째는 개인적 요소가 있다. "하나님이 어느 성경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셔서 우리가 그 본문을 분명히 깨닫고 유익을 얻으면, 이런 통찰과 복을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설교가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해야 한다는 말이 압니다. ... 그러나 깊은 개인적 확신에서 나오는 설교에는 제임스 스토커가 "겅험의 혈흔"이라고 부른 강렬함이 있습니다. 스토커는 또한 "진리는 그것을 자신의 수고와 고통으로 배운 것처럼 말하는 이에게서 나올 때 두 배, 세 배 더 진실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수첩을 곁에 두고 있다가 빛을 비추고 무언가 선명히 보일 때 깨달은 바를 기록해야 합니다."(119-120) 내가 겪었단 삶의 문제를 주제로 한 설교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겪었던 삶의 한 부분을 설교로 한다면 한 세편정도 나오지 싶다. 또, 독서를 하다가 은혜 받고 설교한 적이 있다. 대표적으로 케네스 베일리의 <탕자와 십자가>가 그렇다. 

 설교 본문 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강해 설교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존 스토트가 알려주는 방법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나가면서

 나는 설교의 스피치 기술이 형편없다. 원고를 그대로 읽는다. 그러니 사람들의 귀에 들리는 설교가 아니다. 그렇게 들리는 설교, 스피치가 좋은 설교 기술에 관심이 갈 때, 설교자의 자세를 말하는 이 책이 참 좋았다. (사실 팀 켈러의 <설교>에서 그 내용이 있는 것으로 기억에 남아서 뒤져보니 없어서 당황했다. 지금 이 책을 리뷰하는데 여기에 그 내용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지금도 말씀하신다는 점"(5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는 점을 확신해야"(57) 한다는 것. 나는 이 마음 가짐을 통해서 다시금 설교자의 본연을 가다듬게 되었다. 한편으론 들리는 설교를 위해서 노력을 해야 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다는 사실에 나름의 안도(?)함을 느꼈다. 

 설교에 대해 가볍게 읽어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가볍지 않다. 한 번 읽을 때는 못 느꼈지만 다시 리뷰를 쓸 때 보니 이 책이 참 좋다. 설교의 기본에 대해서 알차게 내놓는 느낌이랄까? 팀 켈러의 <설교>보다 존 스토트의 <설교>가 더 많은 목회자들에게 시급할 것 같다. 책 맛보기를 꼭 읽어보길 바란다. 또 좋은 설교자를 모셔오고 싶은 당직자들은 이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책 맛보기

 

설교의 비결은 어떤 기술을 온전히 익히는가가 아니라 어떤 확신에 온전히 지배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신학이 방법론보다 중요합니다. 설교 원리를 배우고 설교 기술을 익혀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칫하면 이런 것을 지나치게 신뢰하기 쉽습니다. 설교 기술은 기껏해야 우리를 웅변가로 만들어 줄 뿐입니다. 설교자가 되고 싶다면 신학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신학이 있다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데 필요한 모든 기본적 통찰을 소유한 것이고, 그 일을 성실히 행하도록 자신을 북돋아 줄 모든 동기도 소유한 것입니다. (45)


성경의 인간적 요소를 인정한다는 것은 성경을 문학으로 읽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문학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52)


마틴 로이즈 존스는 "교회사에서 교회가 타락했던 시기와 시대는 언제나 섥가 쇠퇴할 때"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수준이 낮은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기독교 설교의 수준이 낮기 때문입니다. (61)


신약성경은 교회 지도자를 감독 또는 장로라고 부릅니다(딛 1:5). 교회 지도자는 더 이상 제물을 드리는 구약의 제사장이 아니라 주로 성도를 돌보는 일을 책임지는 목회자 혹은 목자입니다(행 20:28). (62)


만일 오늘날 목회자들이 설교와 가르침에 대한 신약성경의 강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사역에 지극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목회자가 행정 업무에 더 많이 관여합니다. 이들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은 서재가 아닌 사무실이며 성경이 아닌 컴퓨터와 휴대전화입니다.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행 6:4)을 최우선순위에 놓으려면 우리가 매일, 매주 하는 일들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평신도 지도자에게 더 많은 일을 위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목회직에 대한 진정한 신약의 태도와 접근이 드러나고, 교회도 매우 건강해질 것입니다. (66)


먼저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경 저자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 저자가 생각한 것을 생각하고, 성경 저자가 느낀 것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의 소임은 성경 저자가 쓴 내용에 우리의 견해를 부여함으로써 그의 견해를 우리의 견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과 생각 속으로 수고하여 들어감으로써 우리의 견해를 그의 견해에 맞추는 것입니다. (98)


숙고하고 기도하면서 깨달은 내용과 추가 질문을 적어 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섬광처럼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이 깨달음을 놓치지 마십시오! (124)


모든 설교자는 끊임없이 설교에 사용할 예를 찾아 두어야 합니다. 물론 설교 소재를 모으기 위해서만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읽는 모든 책에 나오는 탁월한 구절, 그리고 일상에서 떠오르는 영감을 적어 둔다면 유익할 것입니다. (137)


학생들과 젊은 설교자들은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이 질문에 간단한 답변을 제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최고의 답변은 '여러분의 일평생!'일 것입니다. ... 우리는 그동안 쌓아 온 생각들을 바탕에 두고 본문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151)


발성과 몸짓 같은 설교의 실제적 문제를 간략히 언급하기에 가장 좋은 대목에 이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을 위해 리허설을 하면 안 됩니다. 설교자는 배우가 아니고 강단은 무대가 아닙니다. 배우는 자아를 강하게 의식합니다. 그러나 강단에서는 자아를 잊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면 좋겠다는 진실한 소망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표현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162)


제임스 블랙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 좋은 설교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오는 것이다." (172)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선포하도록 지명되었습니다. (175)


설교자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설교 도중 회중 가운데 기이한 정적이 감도는 때입니다. 졸던 이가 깨어나고, 기침 소리가 멈추고, 안절부절못하던 이가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정처 없이 헤매는 시선도, 마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설교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잊히고, 사람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분의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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