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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설교와 목회자

[책리뷰] 헬무트 틸리케 -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by 카리안zz 2020.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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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이번에도 얇은 책이다. 하지만 신학을 전공한 이들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신학을 공부한 모두 한 번쯤 걸렸을 신2병. 이 신2병을 틸리케는 신학 사춘기라고 멋지게 말한다. 나에게도 신학 사춘기가 있다. 사춘기이기에 신학을 공부한 누구라도 걸린 적 있거나 진행 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신대원 졸업했지만 신학과 영영 졸업하고 싶지 않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신2병 즉, 신학 사춘기를 거치는 이들은 해독제를 먹어야 한다. 이 책은 그 해독제이다. 물론 저자는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그런 비슷한 표현을 한다(9). 나는 이 신2병을 어떻게 고쳤던가. 허세로만 가득했던 나의 지난 날을 신학 고수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해독이 된 것 같다. 여튼, 밟혀보거나 틸리케의 책을 읽거나 등등 이러한 사춘기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말에 심히 공감한다.

 

가장 공감되는 점

“...공관복음 양식사를 공부합니다. 이 진리를 갖게 된 그는, 단순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죄인의 구주이신 분께 기도하고 그분이 행하셨다는 모든 이적(십중팔구 전설에 불과한)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을(물론 가장 절묘한 방식으로) 경멸합니다.”(46)

 아아, 이런 분들을 가끔 볼 때가 있는데 틸리케의 말처럼 ‘신학생 병’이란 표현이 가장 적실한 거 같다("이런 경멸은 실제 영적 질병입니다. 그것은 진리와 사랑의 갈등 속에 존재합니다. 이 갈등이 바로 '신학생 병'입니다." p.47). 저분은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왜 저러지 싶었는데 안수받은 목사도 이 질병에 걸릴 수가 있다고 하기에 끄덕끄덕("안수받은 목사도 이 질병에 걸릴 수 있으며 그 경우에도 그 해악은 덜하지 않습니다." p. 47).
 페이스북을 한창 할 때 대표적으로 그런 사람이 보였다. 신학교 가지말라는 글로 유명해 지신 분이다. 나는 왜 그분이 목사 안수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가 정직하려면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지 않고 종교학 공부를 했어야 했다. 사람들은 그의 글이 신학적으로 엄청나다고 보지만 그것도 모르겠고(그냥 그는 A라는 주장이 있으면 B라는 반박을 가져와서 B라는 반박이 있으니 A는 아무 것도 아님이라는 논증을 자주 봤다. 대표적으로 보컴과 르네 지라르를 가지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걸 다마스커스 변증가 쪽에서도 그렇게 말하더라. 한 마디로 그 분야 전체의 시각에서 그들이 가지는 위치를 말하며 그 주장의 어떤 이론인지 자신이 이해한 대로 설명하고- 공감적 읽기 - 그 다음 공격적으로 반론을 펼쳐야 한다. 그의 공격할 때 자신이 번역한 반론의 글이 어떤 맥락과 위치에서 나오는 반론이고 자신도 이 지점의 반론을 지지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는 전혀 그런 실력도 없었고 그저 한국의 공부 안 하는 신학생들을 탓하는 분위기에 떠버린 사람이다. 

 물론, 근본주의와 개혁주의 진영에서 학을 떼는 사람들이 많다. 인정한다. 그건 그들을 비난하면 될 것이지 왜 진지하게 신앙 생활하는 그 자세까지도 경멸하며 비아냥 될까? 그 모습을 볼 때 틸리케가 표혀하듯 나는 그들에게 “어떤 생명의 흔적이나 직접 체득한 진리를 찾을 수 없”고 “온기 없는 관념의 사체가 풍기는 냄새만”(p. 43)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런 이들을 주화입마에 빠졌다고 표현한다. 

 

나가면서

 주화입마에 빠져나오려면 고수의 운기조식이 필요하다.(무협지를 잘 안 읽고 풍문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운기조식을 해줄 고수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헬무트 틸리케이다. 신2병이 곪고 곪아 괴물이 되어가는 이들을 목격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해독제가 필요하다. 운기조식이자 해독제! 신학을 전공하고 공부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메모

이미 신학자가 다 된 것처럼 우쭐대는 사람에게는 (회복할 가망이 있다면) 쾌유를 비는 카드로서 필요할 수도 있겠고, 극단의 예가 될 수도 있겠지만 신학 연구의 흥분과 희망을 모조리 잊어버린 사람에게는 위로를 전하는 카드로서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9)

- 해독제!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생기 잇고 적극적이며 그가 속한 공동체의 청소년 활동에서 친구들과도 사이가 좋은 젊은이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이에 그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 그 외에는 자신이 모든 것을 바로 이해하고 허튼소리는 하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 더구나 그 젊은 리더는 자신이 할 신학 공부를 기대합니다. 그 신학 공부가 자신을 성경 속으로 더 깊이 안내하고, 지금은 분명히 알지 못하는 많은 것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러했던 그가 신학 수업 첫 학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오랜 친구들이 보기에 그는 깜짝 놀랄 정도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인 젊은 직공이 지극히 수준이 낮은(비전문가 수준의) 성경공부를 하면, 그 옆에서 입꼬리를 끌어내린 채 앉아 있습니다. 그런 뒤 둘이 함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 신학생은 마치 새로 알게 된 소문을 옮기고 싶어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수다쟁이처럼 신화와 전설과 양식사를 다룬 '최신 연구'의 내용을 친구에게 설명해 줍니다.
 ... "네가 말한 것은 '전형적인 경건주의'나 '전형적인 정통주의', 아니면 '감리교 신자'가 하는 말이야."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오시안더 같은 유형이구나. ... 즉,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유식한 말들을 그 친구에게 생색내며 설명해 줍니다. (31-33)

- 신2병의 사례

 

 

 

그와 관련하여 그는 가령 칼케돈 신조를 공부하고 공관복음 양식사를 공부합니다. 이 진리를 갖기 된 그는, 단순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죄인의 구주이신 분께 기도하고 그분이 행하셨다는 모든 이적(십중팔구 전설에 불과한)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을(물론 가장 절묘한 방식으로) 경멸합니다. (46)

- 핵공감

 

 

 

그러나 덧붙여 말하면, 칼 바르트와 리츨이 그들을 따르는 '빠' 때문에 그랬던 것처럼, 이 스승(불트만)도 이런 유형 때문에 십중팔구는 불행했을 것입니다. (47)

- 빠가 안티를 양성한다. 

 

 

 

교의학은 2천 년 이상 이어져 온 교회의 사상을 곰곰이 숙고하며, 철학과 예술을 받아들이려 애쓰기도 합니다. 교의학은 시대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곱씹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지금 탐구해야 하는 인간이 누구이며 이 인간이 머물고 있는 나락이 무엇인지 탐색합니다. 올바른 교의학이라면, 그리하여 종교개혁 시대와 정통 시대의 텍스트를 반복 재생하기만 하는 교의학이 아니라면, 인간을 다루지 않는 그 어떤 것도 낯설게 여깁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교의학은 자신이 다루는 문제들을 마치 단성 생식식물처럼 그 자신에게서 거듭거듭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을 품고 시대가 던지는 물음을 통해 생산적인 자극을 얻습니다. 살아 있는 교의학은 생생한 긴장 가운데 존재합니다. (62)

- 내가 생각하는 교의학. 교의학자들이 똑똑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부탁하는 것은 단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깊은 감명을 받은 모든 신학 사상이 반드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야 합니다. ...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루터나 여러분의 이런저런 신학 스승을 믿는 일이 별안간 벌어지고 맙니다. (68)

- (캐공감2)


책 맛보기

 

틸리케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사역자가 훈련받은 신학자이자 실천하는 교회 지도자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그가 쓴 이 작은 연습서의 또 다른 관심사입니다. (17-18)


신학은 실존을 다뤄야 합니다. ...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신학 연구가 마치 환자의 고통은 생각하지도 않는 미숙한 치료처럼 이루어지는 와중에도 우리의 실존은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어질 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며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 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24-25)


이 젊은이의 실제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무대와 그가 이 무대에 관해 이미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 사이에는 어떤 틈새가 존재합니다. (36)


 자칫하면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것 같은 자기 최면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일시하는 잘못에 빠지고 맙니다. ...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신학공부는 종종 덩치는 큰데 내장 기관은 그만큼 성숙하지 못한 젊은이를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청소년기의 특징입니다. 실제로 신학 사춘기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38)


그런 신학생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변성기에는 노래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학생의 삶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이 시기에는 설교하지 않는 법입니다. (39)


비록 교회 공동체가 우리가 하는 연구를 상세히 이해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질문할 우선권을 갖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공동체의 지체라는 사실만큼이나 분명하게, 우리가 바로 그 공동체 가운데서 우리의 신학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질문은, 우리가 품고 있는 특정 신학 관심사에 비춰 부족하고 흠이 있을지라도, 상당히 적절하며 우리가 언제나 통과해야 하는 불을 만들어 냅니다.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은 우리의 신학 성찰 뒤편에 자리한 우리의 그리스도인 된 실존을 언제나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질문은 우리 믿음이 건강한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공동체는 우리 영혼의 목회자입니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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