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가족을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에베소서 2장 19절 개역개정)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에베소서 2장 19절 새번역)
바울 관련 개론서들을 계속 읽고 있다. 그 중 로완 윌리엄스의 책이 생각났다. 책이 그리 두껍지도 않다. 비아 팟캐스트를 들으며 제법 유익하겠단 생각을 했기에 기억났다.
읽고 나니 내가 할 설교를 로완이 훨씬 더 깊고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역시는 역시 역시다.
“당시 로마 제국을 살아가던 대다수 사람에게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얼마나 별나 보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서는 시민과 노예, 무역 상인과 이주 노동자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으며 이는 매우 낯선 풍경이었습니다.”(29)
낯선 가족. 아직 쓰지는 않았지만 인트로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란 영화로 시작할 예정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상상력이 정말 대단했던 영화였다. 다 보고 나니 가족 같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 이 영화가 새롭게 느껴지진 않았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생각났다. 그 가족들도 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다채로운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를 가족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당시는 신분, 인종, 부, 젠더 등등 엄격하게 구분되던 사회였다. 그 사회에서 바울은 이런 편지를 썼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로마서 15:7)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계획하신 공동체로 우리를 받아들이셨으니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 또한 하나님의 태도를 닮아야, 환대와 받아들임의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66)이다. 나는 너를 받아드릴 수 있을까? 기독교 사상은 이런 담벼락을 부수는데 인류 역사 내내로 힘을 썼다.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 용서와 화해가 있는 공동체.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우리가 그래야 하는 공동체. 바로 교회다. 바울의 편지를 쓰고 100년 뒤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라는 두 젊은 여성이 그리스도인 되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펠리키타스는 노예고 페르페투아는 그녀의 주인이었다.
“두 사람은 원형 경기장에 손을 맞잡고 들어가 들짐승들에게 살이 찢겼으며 결국 사형집행인의 칼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주인은 노예와 손을 맞잡고 걷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태동하고 두 번째 세기에 나온 이 짤막한 이야기는 이웃을 자신의 소유로 보지 말고 예수의 소유로 보라는 바울의 말이 어떠한 변화를 낳았는지 보여줍니다.”(83)
설교로 많은 이야기를 담을 생각이지만 설교를 준비하며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오늘 우리의 교회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아파하는가? 한 몸이라며? 날선 비판에 앞서 아픈 마음이 있는가? 한국 교회의 어의없고, 처참한 소식에 무뎌진 내 마음을 다시금 돌아본다. 교회는 아픈데 나는 아프지 않다. 내 마음이 병든게 분명하다. 몸이 아픈데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