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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김학철 -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문학동네 I 사도 바울과 새 시대의 윤리 I 사도 바울 I 윤리 I 잘잘법]

by 카리안zz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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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간략한 바울 관련 책 중에 이 책을 가장 추천한다. 개인적으론 나에게 톰 라이트가 가장 좋았지만 팬심이기도 하고ㅎㅎ 주변에 추천을 하라고 하면 이 책을 추천하겠다. 출판사도 기독교출판사가 아닌 메이저(?) 문학동네에서 출판되었다. 김학철 교수님은 마태복음책도 EBS에서도 내고 인문과 신학의 접점을 가장 잘 만나게 해주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이 책도 그렇다.

 

김학철 교수님은 2012년 알게 되었다. 학부 졸업논문을 쓰면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다. 박사학위 제목이 <로마의 통치 선전과 마태공동체의 예수>였다. 아주 유익했고 이름도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SNS에서 글을 보고 이분이 그분이구나 싶었고 요즘 <잘잘법>으로 아주 유명해지셨다. 박사를 연세대에서 받았고, 서중석 교수님이 지도교수님이시다. 서중석 교수님 관련해서는 차정식 교수님이 글을 쓴 게 있는데 기억하기론 사회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하는 학파(?) 사단(?)라고 한다. 이 책에서도 그런 당시 사회상에 대해서 잘 기록해 놨다.

특히 고린도교회에서 성찬이 왜 빈부격차를 일으켰는지 잘 알려준다.

 

“바울의 에클레시아에서 ‘식사’의 문제는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인종 및 문화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었다. 가령 ‘성만찬’ 제의를 둘러싸고 빈부 갈등이 촉발되곤 했다. 그레코-로만 사회에는 지역마다 나름의 식탁 문화가 있었다. 고린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내어주는 이른바 ‘후원인’이 된다. 그 후원인에게는 새로이 후원인이 될 만한 친구들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후원인의 집에서 식사 모임을 할 때면 대략 이런 장면이 연출된다. 후원인과 그 ‘친구들’은 가장 좋은 방인 이른바 ‘트리클리니움’에 모인다. 이 방은 밖이 잘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는 주인과 그 친구들에게 좋은 음식과 술이 제공된다. 반면 평범한 손님들은 ‘아트리움’에 모인다. 아트리움은 넓은 안뜰로, 부잣집의 경우 마흔 명 정도가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트리클리니움에 비해 질이 떨어졌다...

 

이러한 식탁 문화에서는 신분과 지위의 차별성이 강조된다. 평소에는 별 구분 없이 지내다가도 식사할 때만큼은 겸상을 하지 못한다. 트리클리니움에 초대받은 사람, 아트리움에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신분 차별이 나타나고, 먹는 자세도 신분에 따라 구분된다...

 

고린도 교회 역시 집에서 모였다, 그곳에서 성만찬을 겸한 식사를 하면서 벌어진 일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자신들에게 익숙한 식사 관습을 따랐을 것이고, 이교도 신전에서 하던 식사 행위와 그레코-로만의 차별적 식탁 문화가 더해져서 고린도 교회 내에서도 신분별로 따로 식탁이 차려졌을 것이다. 바울은 이에 격노했다. 성만찬이야말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의미를 제의적으로 재현하는 결정적 의식인데, 그 의미가 철저히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에클레시아가 사회의 질서를 반복한다면 에클레시아로 모일 이유가 없었고, 분열을 강화하는 식탁이라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셈이다. 예수의 식탁, 곧 성만찬이 타락했다는 보고를 들은 바울은 성만찬의 의의를 다시 한번 피력했다...

 

교린도 교인들이 공동 식사를 위해 모일 때 이른바 가진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친구가 될 만한 이들과 함께 만찬을 즐겼다. 그러나 노예나 노동자, 곧 자기 주인에게 묶여 있는 이들은 공동 식사에 제때 참여할 수 없었고, 자신의 음식을 가지고 올 수도 없었다. 물론 집주인이 얼마간의 음식을 준비해놓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으론 부족하기 일쑤였다. 결과적으로 일찍 와서 먼저 먹고 마시고 있던 사람들은 모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배부르고 취한 상태였다. 그러나 나중에 온 이들은 굶주린 채 배부르게 취해 있는 주인들을 목격해야만 했다. 또 주인의 친구들이 트리클리니움에서 누워 있는 동안 그들은 아트리움에 앉아 있었다. 이것은 예수의 식탁, 곧 바울이 전해준 성만찬이 아니었다.”(203-206)

 

박영호 목사님의 책에서도 이 상황에 대한 묘사가 나오지만 이 책의 묘사를 읽고 나니 더욱 생생하게 그려졌다. 국내파든, 해외파든 이렇게 결과물로 실력을 발휘하면!ㅎㅎ

 

그 외에도 왜 좌파들이 바울에 대해서 연구하는지도 책 중간중간 이야기를 해준다.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테리 이글턴, 슬라보예 지젝, 조르조 아감벤 등 이름값이 엄청난 이들이 왜 기독교 사상을 다시 살펴보려고 할까? 그들이 그토록 이룩해내고 싶었던 이상을 기독교는 해냈기 때문일까? 기독교는 인종, 신분, 계급, , 문화를 넘어 어떻게 한 가족, 한 몸이라는 선언을 했을까? 아주 수치스럽고 비천한 십자가에서 죽은 자를 신으로 섬기며 예배했던 이 독특한 공동체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 같은 대상을 예배하고 있을까? 나는 기독교가 참 신비롭다.

 

예수님도 그렇고 그 제자들도 사실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다. 루이스의 말처럼 사기꾼 아니면 신이다. 둘 중 하나다. 예수님보다 더 멋있고 윤리적인 말들을 한 사람들은 많이 있다.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베드로는 어부였고, 마태는 세리였으며 뭐 그저 그런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그저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지금 우린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 전 고조선에서 부산이란 지역에서 어부일을 하던 자를 우린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시저처럼 알렉산더처럼 나폴레옹처럼 인류사 위대한 흔적을 남긴게 전혀 없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우린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조금마한 흔적이라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책이 인도하는 성서의 세계가 조금은 보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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