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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성경신학

[책리뷰] 마이클 고먼 -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새물결플러스 I 시민 종교를 거부하는 참된 예배와 증언 I 어린 양을 따라 새 창조로 나아가다 I 요한계시록 I 시민종교 I 참된 예배 I 증언]

by 카리안zz 2022.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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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을 다 읽었다. 집에 있는 책들 위주로 개론서와 함께 읽었다. 공동서신은 빼고 바울서신에 힘을 좀 쏟긴 했다. 그래도 샌더스와 바클레이는 엄두도 못 냈지만 다음 회차에 도전을. 요한계시록은 이 책과 함께 읽었다. 이필찬 교수의 신천지 비판 서적도 함께 읽으려고 했지만 아직도 못 푼 책들 사이에 찾을 엄두를 못 내 이 책만 읽었다. 3월 말에 읽었는데 이제야 리뷰를 남긴다.

 

이 책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 대략적으로 길잡이를 해준다. 다행히 금요설교 본문이 요한계시록이라서 나름 이해가 더 잘 되었다. 안 다행은 이 책을 먼저 읽고 설교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이 책을 다 읽을 때쯤은 요한계시록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어서ㅠ 또, 덕분에 내가 본 주석들은 대부분 보컴 인용을 많이 들던데 본문 중후반 진행 이후 보컴 책이 번역된 걸 알았다. 거의 참고하지 않은 빌(비일)NIGNT 축약판인 대신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제일 참고 많이 한 주석은 NICNT였다.

 

저자는 <레프트 비하인드>와 같은 류의 것을 경계한다. 요한계시록이 그런식으로 많이 잘못 읽혀져서 그렇다. 저자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는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내가 요한계시록의 제목 후보들 가운데 가장 선호하는 것은 이 책의 두 번째 부제인 “어린 양을 따라 새 창조로 나아가다”이다. 나는 이 부제를 통해 요한계시록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와 예배와 제자도를 다룬 책이요, 이 세상에 주는 마지막 소망을 다룬 책이라는 내 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주의적인) 거짓 종교 및 왜곡된 충성과 대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첫 번째 부제인 “시민 종교를 거부하는 참된 예배와 증언”은 언어유희인 셈이다. 요한계시록은 시민 종교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시민답지 않다.” 거부하는 시민 종교가 1세기 것이든 21세기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53)

 

“따라서 이것 아니면 저것의 문제로 돌아간다면, 요한계시록은 (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그는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아계신 분이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푸는 열쇠이시다-를 전하는 좋은 소식이요, 그러기에 심지어 악이 그치지 않고 제국이 폭압을 일삼는 와중에도 영원한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굳건한 신실함을 다룬 책이다.”(53)

 

그 외에 계시록의 장르에 대해서도 시기와 저자, 장소에 대한 개론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서 좋았지만 그중 나는 시민종교에 대해서 가장 인상깊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어려움을 겪었을까? 박해 때문에? 간헐적으로 큰 박해들이 있었지만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어려웠다. 이유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참여하지 않는 이들은 심각한 사회 갈등을 만들어냈다. 이교도 불신자들...은 그런 행위에(카리안 주 – 운동 경기 수사 경연, 이교 신전 경내에서 고기를 사고 먹는 일, 상거래 길드, 클럽, 개인 집안 행사에 드나드는 일... 등 거의 모든 일들이 포함되었을 것, 이 책 86)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이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서 그리스-로마에서 보통 이루어지던 종교, 사회, 정치 활동과 담을 쌓은 것을 애국심이 없고 신을 섬기지 않는 행위로 보았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비공식 석상에서 괴롭힘을 당했고, 어떤 이들은 동업자에게 따돌림 받기 십상이었으며, 정부 관원에게 조사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적어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요한)은 그가 한 행동 때문에 처벌을 받고 유배를 갔다. 그는 자기 체험이 다른 것과 별개가 아니라 증언과 핍박이라는 더 큰 사건의 일부였다고 말한다. 적어도 신실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 즉 버가모의 안디바는 실제로 폭도 손에 혹은 공권력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다(2:13). 어쩌면 희생자는 더 있었을 것이다.”(86-7)

 

내가 자주 말하는 것이지만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몸을 해하는 박해보다는 사회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관계를 끊어질 것을 각오한다는 걸 의미한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카이사르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은 제국의 우상 숭배(시민 종교)와 불의(군사와 경제와 정치와 종교 쪽의 억압), 그리고 특히 로마의 우상 숭배와 불의다.”(88)

 

요한계시록은 거기 로마에서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역사를 관통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로마가 행한 것과 유사한 일체의 모든 우상 숭배와 불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89-90)

 

로마를 숭배하는 시민 종교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들은 시민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았다.

 

“로마는 특히 전달 매체를-행진, 경기, 웅장한 광경, 동상, 군인들이 드는 군기, 주화를-활용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았다. 1세기 주화는 황제를 신으로(실제로 다양한 신으로), 온 우주를 구하고 다르시는 자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평화를 가져온 자로, 적들을 굴복시킨 자 등으로 묘사한다.”(105)

 

제국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 가지 요소 전부에 도전한다.

 

첫 번째, “정치 지배”, 둘째, “정치 질서와 신의 질서를 동일시하는 종교”, 셋째, “지배층을 우대하고 인간 착취를 허용하는 경제 네트워크(108).

 

고먼은 이렇게 시민 종교를 설명하며 자신의 나라인 미국에게 그 제국의 요소가 있지 않은가 조심스럽고 강직하게 말한다. 대선 기간 중 이 책을 읽었기에 나 또한 시민 종교를 생각하며 읽었다. 때마침 해방신학자라는 인간이 2번 찍으면 지옥간다는 말을 했다. 도대체 머리가 어떻게 되어야지 선거가 구원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보단 덜하지만 세계적인 신학자인 김 모교수님께서 이번 선거는 신앙고백이라는 말까지 하기 앞섰다. 나 또한 과몰입을 했지만 모두가 미쳐 있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구교형 목사님의 반성글이 가장 적실하게 읽혔다.

 

가장 비참했던 것은 서로가 다른 후보를 찍었다고 신앙조차도 의심하던 모습이었다. 겨우 5년 마다 이뤄지는 선거가 뭐길래 신앙까지 잡아먹으려고 할까. 로마 제국의 뒤를 조종하고 있던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비웃음이 들리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서로 정치적 지향이 다름에도 한 분 하나님의 대해서 고백하며 함께 예배한다고 강하게 전했다. 모두 각자의 이유있는 정치적 입장이 있다. 나 역시 정치적 입장이 반 국민의힘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교회에 국민의힘을 지지하시는 분들과도 친하다. 그분들은 그분들 나름의 이유로 지지하는 것이다. 그게 왜 잘못 되었다는 말인가?(물론, 다른 경우도 있긴 하다.)

 

여튼, 대선 후 극심한 갈등을 볼 때 이 책의 찬송시가 위로를 주었다.

 

“서로 싸우는 당신 자녀의 광기를 치료해주소서.

우리 자만을 꺾고 당신의 통치에 굴복케 하소서.

철없이 내 잇속만 챙기길 기뻐하고

물질은 부유하나 영혼은 가난한 우릴 부끄럽게 하소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소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소서.

우리가 당신 나라에 이를 수 있게”(198)

 

요한계시록은 지금도 하나님인 체 하는 것들을 벗겨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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