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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문

[책리뷰] 르네 지라르 -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문학과지성사 I 인류학 I 욕망 I 희생양 이론 I 모방 I 신화 I 성경 I 성서]

by 카리안zz 202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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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르네 지라르가 기독교판에서는 유행이었다. 아무래도 정일권 박사가 붓다와 희생양을 주제로 인스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그 붐을 일으켰다. 나도 당시 지라르를 알게 되었고 거기에 대한 책들을 조금 모으기도 했다. 인문학계의 아인슈타인이나 다윈으로 불리는 르네 지라르. 어떤 언론에서는 그를, 기독교를 구한 인물로 보기도 한다. 7년 전 당시에는 그 말에 혹했지만 요즘은 그리스도교는 한 인물이 구하고자 할 정도로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고 생각한게 바뀐 지점이긴 하다.

 

그럼에도 직접 르네 지라르의 책을 읽어보니 대단하긴 했다. 왜냐 포스트모던을 종언했다는 말을 하는지도 알겠다(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를 읽어 본다면 왜 르네 지라르가 좌파 지식인들을 비판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오지훈 작가의 말이었는데 좌파와 우파에서 르네 지라르는 두루 언급이 된다고 한다. 지라르는 우파 사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연구 결과로 말을 할 뿐이다.

 

르네 지라르의 가장 핵심은 모방 욕망이다. 모든 건 이 모방 욕망에서 시작된다. 우리 안에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 욕망은 끝이 없다. 욕망의 경쟁에서 멈출 줄 모른다. 그러다 사단이 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이 일어난다. 그 최후는 만인의 일인에 대한 싸움이다. 희생양으로 지목당한 일인이 죽음으로 사회는 다시 평화로 접어든다. 카타르시스라는 단어의 뜻이 정화라던데. 그 의미를 지라르는 여기에 대입한다. 그리고 희생당한 그 일인을 은폐시킨다. 신성화한다. 신으로 추앙시킨다. 지라르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바로 그 희생양들이라고 본다. 신화의 자리에는 늘 인신제사가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하나도 빠짐없이 인류가 시작하는 신화에는 예외가 없이 인신제사가 있었다. 지라르는 그 폭력을 위와 같이 한 명을 희생양 삼아서 죽이고 신성화 시켰기에 감춰진 사실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지라르의 위대한 발견이다.

 

“신화는 박해자가에는 죄가 없고 희생물한테 죄가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진실을 완전히 뒤바꾸고 있다”(15).

 

그러나 성서는 어떤가? 성서는 십계명에서부터 이 모방욕망을 경계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20:17) 마지막 계명의 내용이다. 사실, 6~9번의 계명도 열 번째 계명의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말한 것이라고 지라르는 분석한다. 사탄이 하와와 아담을 유혹한 것도 역시 모방 욕망이었다.

 

계속해서 나아가 요셉의 이야기에서, 예언자들의 이야기에서 성서는 희생자들이 무고하다는 걸 말한다. 요셉은 신화에서 보였던 이야기 형태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거기에 보복은 사라진다. 형제들은 요셉을 희생양 삼았었는데 나중 베냐민을 희생양 삼으려 할 때 유다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요셉은 보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 용서를 한다. 보복이 멈춘다. 모방적 용망의 양상이 사라졌다. 성서는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한다. 예언자들도 그렇고.

 

그 절정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런 기도를 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세요.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나이다”(23:24). 욕망은 닮는다고 했다. 그러니 모방적 욕망. 욕망 안에 폭력이 전염된다. 한 사람이 죽여야 한다는 만장일치가 일어난다. 적의 적이 친구가 된다. 만장일치로. 헤롯과 빌라도는 서로 반목하여 지냈지만 바로 그날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23:12)는 말씀에서 박해자의 무의식을 복음서의 저자가 잘 포착했다고 말한다. 신화의 사람들도 인류의 사람들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지라르는 그것을 모방 욕망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지라르는 이것을 사탄의 정체라고 본다. 베드로가 에수님의 죽음을 말리려고 했을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화의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다 가장 작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또 신화의 주인공이나 신성한 존재들의 특징이자, 이들이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조건도 볼 수 있다. 이조건으로는 또한 그리스의 ‘파르마코스’의 선택되는 조건도 볼 수 있다. 이 조건으로는 불구자, 육체적, 사회적 결함을 들 수 있다. ... 희생 제의에 나오는 모든 인간 희생양들의 특징과 일치한다. 복수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스인들은 거주지가 없는 사람, 가족이 없는 사람, 불구자, 병자, 버려진 노인들같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는 사람들, ... 문화권이 달라도 이 특징들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102-3)

 

신화는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세상의 평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그 평화는 또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희생양은 발동되고 만인의 일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된다. 은폐된 폭력. 지라르는 이것이 신화의 비밀이라고 강조한다. 아니, 사탄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그다음에는 만장일치의 희생양을 통해 그 공동체를 다시 재생시키는 모방폭력 작용과 스캔들 이론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사탄이라고 볼 수 있다.”(228)

 

그러나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 25:40)라고.

 

성서는 반신화적이다. 성령님의 역할이 변호다. 무고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변호. 지라르는 신학적인 논의는 길게 이어나가지 않지만 자신의 거대한 틀에서 약간 보여주기도 했다. 맺음글에서. 아마도 이건 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지 않나 싶다.

 

거대한 틀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비판받는 것이 있다. 지라르 역시도 자신의 큰 주제를 기점으로 너무 짜맞추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는다. 환원주의라는 비판이다. 그럼에도 지라르의 해석은 참 매력적이다.

 

십자가에 대한 지라르의 논의를 그렇게 확 와닿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건 <십자가의 인류학>을 보면서 정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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