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이의 추천을 받은 책이다. 책이 참 예쁘다. 주로 기독교 출판사의 책을 봐서 그런지 몰라도 책이 예쁘다는 느낌을 주는 책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르시시즘 즉, 자기애성 성격 장애 환자는 전체 인구의 0.5~2.5퍼센트로 잡는다. 하지만 의학적 기준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자기애성 성격 성향이 강한 사람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다고 본다. 책의 서두에서 나르시시즘 사회라고 확대해서 보는 여러 저자들을 언급하는데 이 책들이 번역되어 있으면 참 좋겠다 싶다. 물론, 저자는 사회 전체가 그러한 경향을 인정하지만 너무 광범위하게 개념을 확장시키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어느 정도의 확장을 시키기는 한다.
“그 가운데에는 자기애성 성향을 띠기는 하지만 자기애성 성격 장애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할 정도의 자기애 증상을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상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도 나르시시스트라고 부른다.”(18)
나르시시즘은 고대 신화에 바탕을 둔 용어이다. “나르키소스는 자기가 너무 잘생겼다고 자만해 모든 이의 사랑을 거부한다. 그리고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푹 빠져서 그를 잡겠다고 물에 뛰어들어 익사한다.”(19) 이런 신화를 바탕으로 나르시시즘이란 용어가 되었다. 신화의 여러 버전이 있는 것처럼 나르시시스트로 여러 버전들이 있다. 저자는 총 13장을 통해 그 모습의 사례와 특징들을 책에 기록해 놨다.
저자는 자기애성 성격 장애의 핵심 문제를 “심각한 자존감 결핍”(222)으로 본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자기애성 성격 장애의 핵심 문제는 심각한 자존감 결핍이다. 그래서 환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무능과 무력함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222)
전문가가 아니기에 누군가가 자기애성 성격 장애라고 진단을 할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그 성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기는 한다. 나의 아버지를 마주했을 때 가장 느껴지는 것은 자존감 결핍이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자존감 결핍을 채우기 위해 무수히 다른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을 본다. 정유정 작가는 나르시시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징후를 느꼈다는데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자존감을 상업에서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특히나 공감이 가던 챕터는 9장 ‘끊을 수 없는 권력의 맛’편이었다.
“직원들의 눈빛에 불안이 어리면 오히려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 그들의 불안은 곧 그의 권력이 무소불위라는 증거였으니까.”(217)
사역을 하다 권력과 자존감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 목사님은 통제를 통해서 존재감을 찾는 듯했다. 사람들이 자신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보여야 했다. 그렇지 않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데드는(내가 보기엔 다른 의견) 사람은 그날 탁자의 욕받이가 되었다. 아무래도 그 모습이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건드는 행위여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저 옛 시대의 정서였을까. 그럼에도 “그깟 권사 따위”을 내뱉었을 때 우리가 계획한 것을 모든 것을 뒤엎은 이면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불쾌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가 기분 나쁘다고 모든 걸 뒤엎은 것이다. 내 마음 대로 하고 싶을 때 나는 이때를 늘 기억한다. 따지고 보면 그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견제가 없는, 오냐오냐 해주는 목회판에는 누구나 늘상 있는 위험성이다.
이 책이 가장 좋았던 것은 그럼에도 나르시시트를 악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을 최대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다음 자신을 지키면서 나르시시스트에게 “꾸준한 연대감과 애정”(208)을 보여주라고 말한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을 지키는 것. 그 대상과 헤어지더라도 말이다.
책이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마음 또한 예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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