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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Jr. - 우리의 죄 하나님의 샬롬[복있는사람 I 죄 I 샬롬 I 오늘 우리를 위한 성경적 죄 탐구서 I 예수님]

by 카리안zz 2022.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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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조를 위해 읽었다. 비록 설교에 인용된 내용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죄에 대해 탐구하기에 좋았던 책이었다. 더구나 <설교자의 서재>에서도 느꼈지만 적절한 예시로 글을 참 잘 쓴다. 코넬리우스 플랜팅가 Jr.는 앨빈 플랜팅가의 동생이다. 흔히 현대 세 명의 칼뱅주의자 세 명을 꼽으라면(삼두마차랬던가?) 앨빈 플랜팅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리처드 마우라고 누가 말했던 것같다. 앞서 두 명은 미국철학학회 회장까지 역임했고 미국 철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신 분이셔서 수긍이 되었는데 리처드 마우가 그정도 급이였던가 싶은...ㅎㄷㄷ. 여튼, 그 앨빈 플랜팅가의 동생이기도 했고, <설교자의 서재>도 오래 전 인상깊게 읽어서 읽었다.

 

현대인들 중에 이 죄인이라는 개념이 참 불편할 것같다. 아니, 불편하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내가 왜 죄인인가? 이때 죄라고 할 때 범죄자와 같은 사람으로, 자신을 범죄자로 말하는 것처럼 들려 불편한 듯 보인다. 어릴 적 듣던 말들도 한 몫하는 것 같다. 작은 거짓말이나 큰 범죄나 다 똑같은 죄야! 라는 말 때문에 더욱 불편할 듯 싶다. 죄 검열관이 안 되도록 조심해야 겠다. 손가락질하며 너는 죄인이야라고 말하지만 교회의 모습에서 더욱 죄의 모습이 보이는데 세상이 얼마나 우스울까. 우리 죄이며 우리의 문제라고 고백한다면 어떨까.

 

죄란 무엇일까?

 

“죄는 단순히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앙적인 개념이다. ...죄는 법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구주와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다. 죄는 관계를 더럽히는 것이요, 거룩한 아버지요 은혜 베푸시는 분을 슬프게 하는 것이며, 거룩한 띠로 연합한 동반자를 배신하는 것이다. ...

모든 죄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힘을 가진다. 죄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그래서 책망을 받아 마땅한 어떤 행위, 즉 어떤 생각, 감정, , 행동 혹은 이런 것들의 부재 상태라고 하자. 그리고 죄를 범하려는 성향 또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그래서 책망받아 마땅하므로 죄를 행위와 성향 두 가지를 다 뜻하는 말로 써 보자. 죄는 한 인격이 인격적인 하나님께 저지르는, 유책성 있는 모욕 행위다. ... 간단히 말해 죄는 샬롬을 파괴하는 중대한 과실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그 모든 지혜에서 샬롬에 대한 비전을 이끌어 낸다. 이런 자료에서 산출해 내는 결과들은 흔히 아주 평이하다. 일반적으로 말해 강도질, 폭행, 악의적인 험담, 사기, 신성 모독, 시기, 우상 숭배, 위증은 화평을 깨뜨리는 반면, 자선, 포용, 칭송, 생산, 감사, 칭찬, 진실대로 말하기, 하나님 예배하기 등은 화평을 일어 간다.”(39-43)

 

독일 고백교회의 신앙 고백의 토대가 하이델베르크 교리였다는 논문을 본 적이 있다. 모든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와 나치에 미쳐있을 때 독일 고백교회는 반대를 했다. 칼 바르트, 본회퍼가 그들의 대표격이라고 알고 있다. 왜 하이델베르크 교리가 그토록 힘을 발휘했을까? 아마도 순전히 내 생각인데 하이델베르크 교리가 강조하는 죄에 대한 민감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냥 내 뇌피셜이다.

 

우리는 저자의 말대로

 

“오늘날 죄를 다루는 책들은 이 시대 사람들의 관심사에 부응해야 하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에게는 전혀 걱정거리가 아니었던 매듭들을 풀어야 한다. 근대 자연주의는 인간의 존엄을 깨부수고 계몽 시대의 인본주의는 인간의 타락 개념을 때려눕혔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은 그런 문제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구원과 자존감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경향이 있는 걸 보고 놀랄 필요가 없었다. 그 두사람은 인간 악의 근원적인 원인을 탐구하기에 적당한 영역은 심리학이나 사회학 분야라고 하는 이 시대의 광범위한 문화적 전제에 맞닥뜨릴 일이 없었다.”(15-6)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죄는 부패라는 점과 경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점이 와닿았다. 내로남불과 위선, “개별 인물의 성품이 문화를 형성하고, 문화는 다시 성품을 형성하는 방식의 순환도 저자는 잘 짚어준다. 특히나 로버트 슐러가 말한 점, “죄를 다름 아닌 사람들에게서 자존감을 앗아 가는 무언가로 정의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죄란 심리학적인 자기 학대와 거기에 따르는 모든 결과’”(168)라고 말했다. 그는 죄의 정의를 현대의 것으로 바꿨다. 물론, 이러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죄는 훨씬 폭넓다.

 

죄에 되물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법적으로는 연좌제는 폐지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부모가 친일파를 되어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은 그렇게 해서 얻은 부로 좋은 교육, 좋은 먹거리, 좋은 직업을 얻고 잘 살게 되었다. 그렇다면 법적으로는 상관없겠지만 과연 친일행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직접 친일행적을 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산둥 수용소>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사람들이 환경이 어려워짐에 따라 나눔, 배려, 남을 위한 다는 것이 사그러져 갔다. 어떤 환경에 처해있을 때 자신의 본색이 드러난다고 지금 나 역시도 어떤 죄와 악에 대해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닥처오는 상황들 속에서 죄와 악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만큼 나는 인간을 나약하다고 본다. 그럼 왜 인간을 이렇게 만드셨냐고? 그건 죽어서 하나님께 여쭤보다. 악을 왜 만들었는지, 아니 만든 게 맞는지 등등 알 수 없는 것들은 나중에 하늘 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께 물어보도록 하자.

 

여튼, 1990년대 중반에 나온 책인데도 흡입력이 있다. 부제엔 성경적 죄 탐구서라고 했지만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죄를 보려면 게리 앤더슨의 <죄의 역사>를 볼 걸 그랬다. 그럼에도 죄에 대한 고찰을 나름 할 수 있었기에 괜찮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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